영화 ‘만추’…남과 여, 짧지만 애잔한 72시간

2011.02.10 21:40 입력 2011.02.11 11:12 수정

영화 ‘만추’…남과 여, 짧지만 애잔한 72시간

멍든 얼굴, 멍한 표정의 여자가 한적한 주택가를 어기적대며 걷는다. 여자는 문득 발길을 돌려 집으로 뛰어간다. 한 남자가 고개를 바닥에 처박은 채 쓰러져있다. 여자는 자신과 남자가 찍힌 사진을 찢어 먹어치운다.

7년 후, 수감 중인 여자 애나는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모범수인 그녀는 72시간의 휴가를 받는다. 버스를 타고 시애틀의 집으로 돌아오던 애나는 한 남자를 만난다. 머리와 옷 매무새를 가다듬는 모양, 여자에게 접근하는 매너 등이 예사롭지 않다. 남자 훈은 여자가 원하는 남자 노릇을 한 뒤 돈을 받는 걸 직업으로 삼고 있다.

3일 후의 예정된 이별, 그 사이 벌어지는 여자와 남자의 이야기가 <만추>의 전부다. 애나는 중국인, 훈은 한국인이다. 둘은 영어로 대화하고, 가끔 모국어로 혼잣말한다. 사연 많은 애나와 그만큼의 사연이 있는 훈이 서로를 온전히 알기에 72시간은 너무 짧다. 그러나 평생 간직할 사랑의 추억을 만들기엔 충분히 길다.

또다른 ‘고객’을 찾던 프로페셔널 훈은 애나를 요리조리 찔러본다. 그러나 우발적으로 남편을 죽인 뒤 영어의 몸이 된 애나가 낯선 이에게 마음을 쉽게 열 리가 없다. 교도소에선 수시로 애나의 위치를 확인하는 전화를 걸어온다. 훈 역시 쾌활한 척하지만 실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 늘 자욱한 안개가 끼어있고 자주 비가 오는 시애틀의 풍광은 두 남녀의 관계처럼 질척댄다. 러닝타임이 절반은 지나서야 둘은 독백, 방백이 아니라 대화하기 시작한다.

두 배우는 정확한 영어로 많은 대사를 하지만 어쩌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 같다. <만추>는 말이 아니라 감정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 감정은 대양의 파도가 아니라 호수의 물결 같다. 어쩌다 비친 햇빛, 찡긋하는 눈빛, 흩날리는 머리결같이 미세한 표현법으로 그들의 감정이 전달된다. 훈은 말한다. “어떤 얘기는 꼭 말로 해야만 하는 건 아니죠.”

그러므로 영화에 대한 반응은 갈릴 것 같다. 굵직한 이야기와 빠른 전개를 즐기는 관객들은 될듯 말듯 아무 것도 안되는 둘의 관계에 복장을 터뜨릴 것이다. 섬세한 감정표현과 느릿한 템포를 사랑하는 사람에겐 ‘올해의 영화’가 될 수도 있다.

<만추>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고, 10일 오전 언론시사회를 통해 다시 공개됐다. 지난해에는 ‘탕웨이의 <만추>’였는데 그 사이 ‘현빈의 <만추>’가 됐다. 이날 시사회가 열린 왕십리CGV는 수 많은 취재진, 관계자들 때문에 최근의 그 어느 한국영화 시사회장보다 혼잡했다.

그러나 영화가 누구의 것이든, 두 배우는 충분히 매력있다. 탕웨이는 데뷔작 <색, 계>의 성공이 우연이 아님을 입증했다. 이런 여배우를 한국영화에 캐스팅했으므로, 한국영화의 역량은 충분히 성장했다고 판단할 수 있겠다. 여자를 즐겁게 해주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남자를 현빈처럼 느끼하지 않게 표현하기도 힘들다.

한국영화사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지금은 프린트가 유실된 이만희 감독의 동명 원작(1966)에 근거했다. <만추>는 김기영, 김수용 감독에 의해서도 리메이크된 적이 있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가족의 탄생>의 김태용 감독 작품이다. 17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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