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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데뷔해 연기경력만 35년째인 배우 김혜수에게는 오랜 숙제가 있었다. 어떤 인물을 연기해도 배우 김혜수의 흔적을 지우기가 쉽지 않다. 김혜수는 자신을 버리고 완전한 영화 속 인물이 되고 싶었지만, 관객들은 어떻게든 그 속에서 김혜수를 찾아냈다.

김혜수는 생각을 바꿨다. 다른 사람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기보다 카메라 앞에서 정직하게 연기하는 데 중점을 뒀다. 지난 5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김혜수는 “늘 염두에 두는 것은 군더더기 없이 캐릭터로만 정직하게 드러나는 인물”이라며 “테크니컬한 것보다 그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12일 개봉하는 <내가 죽던 날>은 지금까지 김혜수가 출연한 영화 중 가장 정직하게 김혜수가 드러나는 작품이다. 김혜수가 과거 영화 속 상황과 비슷한 일을 당했을 때 실제로 했던 말, 실제로 겪은 악몽이 그대로 반영됐다. 김혜수는 “이전에는 무의식적으로도 내가 드러나는 것을 배제하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좀 자유로웠다”며 “(이번 영화의 경우) 나의 상처나 고통, 어두운 면을 감추고 시작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고 밝혔다.

김혜수는 이제 영화 속 인물에서 자신의 흔적을 지우려고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되기보다 카메라 앞에서 정직하게 연기하는 데 중점을 둔다.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김혜수는 이제 영화 속 인물에서 자신의 흔적을 지우려고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되기보다 카메라 앞에서 정직하게 연기하는 데 중점을 둔다.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내가 죽던 날>은 태풍이 몰아치던 밤, 외딴섬 절벽 끝에서 유서 한 장만 남긴 채 고등학생 세진(노정의)이 사라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개인적 문제로 잠시 일을 떠났다가 복직을 앞둔 경찰 현수(김혜수)는 범죄사건의 주요 증인었던 세진의 실종을 자살로 종결하기 위해 섬으로 향한다. 세진의 보호를 담당했다가 경찰을 그만둔 전직형사, 연락이 두절된 가족, 소녀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이웃주민 순천댁(이정은) 등을 만나 소녀의 행적을 추적해 나가던 현수는 소녀가 홀로 감당했을 고통에 공감한다. 수사를 진행하면서 현수는 자신의 모습과 닮은 소녀에게 점점 더 몰두하고, 감춰진 진실에 조금씩 다가간다.

제목과 줄거리만 봐서는 미스터리 스릴러에 가까워 보이지만 <내가 죽던 날>은 여성 간의 연대를 이야기하는 영화다. 김혜수, 이정은, 노정의 등 주연배우는 물론 각본과 연출을 담당한 박지완 감독도 여성이다. 현수는 남편의 배신으로, 세진은 아빠와 오빠의 범죄로 고통에 빠져 있다. 현수는 세진의 흔적을 살피다 동질감을 느끼고, 조금씩 자신의 문제를 마주하기 시작한다. 영화 중반부 “내곁에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외침에 누군가 “네가 남았다”고 답변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결국 이 영화의 여성들은 스스로 ‘나’를 구원하고, 종국에는 서로를 구원한다.

김혜수는 “뭐에 이끌리듯이 <내가 죽던 날>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보통 글(시나리오)이 좋을 경우에도 그 감독의 전작을 단편까지 모두 다 본 뒤에 결정을 하는데, 이번에는 그 모든 것을 다 건너뛰고 바로 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내가 죽던 날>에 투자하겠다는 회사가 좀처럼 나서지 않아도 김혜수는 계속 기다렸다. 김혜수는 “투자자 입장에서는 용기가 필요한 작품이었다”면서도 “막연한 믿음이 있었고, 이 영화를 반드시 해내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고 말했다.

영화 <내가 죽던 날>의 주요 인물은 모두 여성이다. 경찰 현수(김혜수·맨 위 사진)와 고등학생 세진(노정의·아래), 세진의 이웃주민 순천댁(이정은)은 스스로 나를 구원하고, 종국에는 서로를 구원한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영화 <내가 죽던 날>의 주요 인물은 모두 여성이다. 경찰 현수(김혜수·맨 위 사진)와 고등학생 세진(노정의·아래), 세진의 이웃주민 순천댁(이정은)은 스스로 나를 구원하고, 종국에는 서로를 구원한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김혜수는 현수라는 캐릭터를 만들고 구현하는데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영화 속 현수가 친구 민정에게 매일 꾸는 악몽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현수가 시달리는 ‘죽어있는 자신을 보는 꿈’은 2012년 무렵 김혜수가 1년여간 꾼 악몽이었다. 김혜수는 “언론에 제 개인사(어머니가 거액의 부채를 져 김혜수가 책임을 져야 했던 일)가 나온 것은 작년이었지만, 제가 처음 안 것은 2012년이었다”며 “영화 속 현수의 ‘나는 내 인생이 멀쩡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대사도 내가 실제로 했던 말”이라고 했다. 이어 “당시에는 일을 할 상태도 아니었고, 일을 하기도 싫어 모두 정리를 하려고 했는데, 영화 속 현수처럼 곁에 친구가 있어 계속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30년 넘게 연기를 하고 있지만, 김혜수는 여전히 현장을 즐기지 못한다. 김혜수는 “나는 나를 좋아하고 괜찮게 여기는 편인데 연기를 할 때만 내가 싫다”며 “현장에서 모니터링을 하는 것은 내 한계를 직면하는 것이라, 현장은 여전히 가장 가고 싶지 않은 두려운 곳”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김혜수는 한 작품을 끝낼 때마다 ‘은퇴’를 꿈꾼다. “스스로에게 ‘그래 이 정도면 네 능력 치고는 잘해왔다. 이제 깔끔하게 끝내자’”고 마음먹는다. 2017년에는 텔레비전으로 영화 <밀양>을 보고 ‘배우는 저런 분들(송강호, 전도연)이 하는 거지, 나는 그만해야겠다’고 또 결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은퇴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김혜수는 “내가 작품들을 조용히 거절만 하면 자연스럽게 은퇴인데, <밀양>을 보고 나서 몇달 있다가 <국가부도의 날> 시나리오를 보니 피가 막 거꾸로 돌았다. 치사하게 몇개월 사이에 생각이 바뀌었다. 대신 속으로 ‘요것까지만’이라고 했다”며 웃었다.


홍진수 기자 soo43@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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