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피서를 떠나게 해주는 몰입

2018.08.03 17:18 입력 2018.08.03 17:25 수정
조은아 | 피아니스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시원하고 청량한 소리가 필요했다. 일상에 몸은 묶여 있어도 정신적 피서를 떠날 만한 음악이었다. 그러다 스티븐 허프의 내한 연주를 기억하는 동료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강렬한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었는데, 흔한 블랙과는 오묘하게 다른 먹색 슈트에 구두마저 에메랄드그린 빛깔로 번쩍였다는 것이다. 동료는 공연 내내 구두가 신경 쓰였다고 했다. 그렇게 삐딱하게 기억하면서도 허프의 손가락에 관하여는 찬사 일색이었다. 왼손과 오른손을 각각 다른 피아니스트가 전력을 다해 연주하는 것처럼 압도적 테크닉이 인상적이라 했다. 적확한 타건은 표현의 과잉을 여과하는 절제로 치열히 단련되었는데, 그러면서도 충실한 감정의 표현이 절묘하게 와닿더라며 놀라워했다.

피아니스트 스티븐 허프.

피아니스트 스티븐 허프.

에메랄드그린 빛, 연주자가 신었다는 구두 색깔에 정신이 확 깨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걸출한 비르투오소로 인정받는 그의 사운드도 덩달아 궁금했다. 스티븐 허프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을 꺼내 몰입해 들었고, 덕분에 정신의 피서를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영국 출신의 이 피아니스트는 완벽한 테크닉과 폐부를 찌르는 음악적 감성으로 자신의 입지를 단단히 다져왔다. 그는 ‘음악의 유행이나 일시적 경향을 초월하는 비범한 위상’을 가졌으며, ‘모험심이 대단히 강한 연주자’로도 정평이 나 있다. 허프의 레퍼토리 목록을 일별하다 보면 독특한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남들이 다 연주하는 주요 레퍼토리에서 한 뼘 차 어긋나 무대에 잘 오르지 않는 곡들을 발굴해 왔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1번’처럼 널리 알려진 작곡가라 하더라도 숨어 있는 곡을 재조명하거나, 훔멜이나 샤브리에처럼 낯선 작곡가의 숨어 있는 명곡을 되살리는 데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발굴된 곡들은 대개 기교적으로 상당히 까다롭다. 수많은 음표들이 구름을 이루는 곡에서 주선율과 배경을 명징하게 분별해 들려주는 것이 허프 연주 테크닉의 압도적 장점이다.

허프는 음악 분야 외에도 다방면의 재능을 갖고 있는 전인적 지식인이다. 문학과 신학에 관련된 여러 저서를 저술했으며, 직접 자신의 음반 해설을 작성하곤 한다. 그 내용은 자못 방대하며 학구적 깊이를 갖추고 있다. 그는 작곡 분야에도 음악세계를 적극 확장했다.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을 앙코르로 즐겨 연주한다. 정작 작품번호(Opus)를 진지하게 붙인 최초의 작품이 피아노를 위한 곡이 아니라 첼로 협주곡이란 사실도 흥미롭다. 2007년 첼리스트 스티븐 이설리스와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초연한 그의 첼로 협주곡 ‘The Loneliest Wilderness’를 위해 그는 지휘자로도 처음 데뷔했었다.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은 스티븐 허프의 음악인생 중 중요한 이정표를 세운 작품이다. 2005년 댈러스 심포니와 합을 맞추며 불과 3주 만에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실황 녹음한 음반은 하이페리언 역사상 단기간 내에 가장 많이 판매된 음반으로 기록되었는데, 르 몽드 드 라 뮈지크는 특히 “라흐마니노프 본인의 연주 이후 필히 감상해야 할 중요 음반”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이처럼 내면의 깊이를 추구하면서도 음악적 자의식을 드러낸 그의 음악에서 청량하고 시원한 청각적 에너지를 얻게 되었다.

조은아 | 피아니스트

조은아 |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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