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다시 한번, 키신

2018.11.02 16:58 입력 2018.11.02 17:08 수정
조은아 | 피아니스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예프게니 키신과 크리스티안 짐메르만의 공연을 2주 간격으로 감상한 동료 피아니스트가 있었다. 아무런 편견 없이 공정하게 듣기 위해 같은 홀에서 열린 두 사람의 리사이틀에 일부러 같은 객석에 앉았다고 했다.

지난달 2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예브게니 키신이 연주하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지난달 2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예브게니 키신이 연주하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두 대형 피아니스트들의 연주가 어떻게 다른지, 해석과 음향, 테크닉 등을 세밀히 따져가며 꼬치꼬치 캐물었건만, 기술적인 분석이 다 하찮다는 듯 허를 찌르는 대답이 돌아왔다. “짐메르만의 연주는 다음날 아침 바로 피아노로 달려가 연습을 하고 싶어질 만큼 악기에 대한 사랑을 일깨웠어. 하지만 키신은 정반대더군. 피아노를 때려치고 싶게 만들더라고.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못 칠 테니까.”

예프게니 키신의 공연이 열릴 때마다 사람들은 티켓 예매를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든 마찬가지. 누군가는 이런 클릭 전쟁을 두고 ‘키신이라는 난자를 차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헤엄치는 수십만의 정자’라 비유할 정도다.

어디 예매뿐인가. 그가 마지막 곡을 연주하면 온 관객이 기립해 30번이 넘는 커튼콜로 마라톤 앙코르를 끌어낸다. 사인회는 자정을 훌쩍 넘을 때까지 진행되기 일쑤다. 청중들이 그의 연주에 이토록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반면 피아니스트들이 키신의 연주를 듣고 그토록 낙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실황으로 그의 사운드를 직접 접하다 보면 우선 강력한 파워와 고난도 테크닉에 놀라게 된다. 건반에 손가락을 하나씩 더 덧댄 것은 아닐까 싶을 만치, 모든 소리가 또랑또랑하고 명료하다. 종종 손목을 곧추세우며 어깨부터 손끝까지 하나의 선처럼 연결하는데,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중력의 하중을 강화하며 음량을 키우려는 의도일 것이다. 보통의 피아니스트는 이 주법을 마냥 신뢰하지 않는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무뎌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신은 누구보다 날렵한 손가락으로 민첩하고 독립적인 움직임을 보여준다. 건반에 내려뜨린 손가락을 다시 제자리로 원위치시키는 장력을 중력만큼 훌륭히 다스리는 덕택이다. 건반에서 튀어 오르는 탄력은 온몸으로 확장되어 곱슬거리는 머리의 반동까지 이어진다. 피아노가 부서지든지, 키신이 산산조각 나든지, 청중의 우려를 불식시키듯 폭발하는 힘을 유연히 다스린다.

기술적인 위력만 갖췄다면 ‘피아노의 신’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피아니스트 입장에서 의기소침하며 좌절을 느끼게 되는 지점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무시무시한 몰입과 음악에 모든 것을 바치는 혼신이다. 키신은 복잡하고 난해한 악절에서 여타 피아니스트들이 그렇듯 안전하고 수월하게 연주하려 들지 않는다. 저러다 대형사고가 나지 않을까 싶을 만큼 생경한 위험에 온몸을 내던진다. 그러므로 청중은, 특히 피아니스트들은 그가 난파라도 당할까 노심초사 긴장한다. 마지막 악절에 이르러서야 무사한 귀환을 안도할 수 있으니 말이다.

조은아 | 피아니스트

조은아 | 피아니스트

이렇듯 청중을 꼼짝없이 사로잡는 키신의 용맹함은 절묘한 전체를 구축하면서도 세부의 치밀함을 꿰뚫어 공존시키는 걸출한 능력에도 기인한다.

그가 독특한 연습법을 갖고 있을 것이라 예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대답은 허를 찌르듯 간결했다. 그저 원하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끊임없이 반복해 연습한다는 것이다. 기술적으로 어려운 부분은 테크닉에 집중하고, 기술적 부담이 없는 부분은 감정표현에 심혈을 기울인다고 한다. “내 인생에 좌우명은 없다. 목표가 있다면 내 잠재력을 깨닫는 것”이란 그의 언급에서 치열한 자기성찰로 스스로를 극복하는 신화를 마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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