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괴한 천재’ 사티 음악엔 서정·소박한 내면 묻어나

2018.12.14 16:28 입력 2018.12.14 16:30 수정
조은아 | 피아니스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에릭 사티(1866~1925)

에릭 사티(1866~1925)

에리크 사티가 직접 기술한 <건망 회고록>에 따르면 그의 하루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예술가는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 여기 나의 매일의 활동 시간표가 있다. 나는 아침 7시18분에 일어나 10시23분부터 11시47분까지 영감을 받고, 12시11분까지 점심을 먹은 뒤에 12시14분에 책상을 떠난다. 건강을 위해 오후 1시19분부터 2시53분까지 내 영토를 말을 타고 돌아본다. 또 다른 영감의 한판 승부가 오후 3시12분부터 4시7분까지 이어지고, 5시부터 6시47분까지 다양한 작업들(펜싱, 회고, 부동자세, 방문, 명상, 수영 등)에 매진한다. 저녁식사는 오후 7시16분에 시작해 20분에 끝낸다. 밤 8시9분부터 9시59분까지 교향곡적 독서(크게 책읽기)를 한 후, 규칙적으로 밤 10시37분에 취침하러 간다. 일주일에 한번씩은 (화요일) 새벽 3시14분에 깬다.”

1917년 사티는 ‘문화적 무정부주의자’라는 죄목으로 8일 동안 감옥에 갇히고 만다. 장 콕토가 쓴 시나리오, 피카소의 무대 디자인, 사티의 음악으로 초연된 디아길레프의 <파라드(Parade)> 탓이었다. 충격적인 무대 디자인과 더불어 사이렌·권총·타자기 소리들이 어우러진 전위적인 음악으로 인해 비평가들로부터 고소를 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 커다란 스캔들은 그를 추종하는 일군의 젊은 작곡가 집단을 태동시키는 계기가 된다. 파리 음악원의 학생들이었던 여섯명의 젊은 음악도들에게 사티는 당시 유럽을 지배하던 바그너리즘과 인상주의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처럼 여겨졌다.

오리크(Auric), 오네게르(Honegger), 뒤레(Durey), 미요(Milhaud), 플랑크(Poulenc), 타유페르(Tailleferre)로 구성된 프랑스 6인조(Les Six)는 파리의 몽파르나스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각기 다양한 음악적 스타일을 지닌 데다 어떤 공동의 선언을 주창하지도 않았기에 이들을 특정 ‘악파’로 부르기엔 다소 어폐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공유한 공통분모는 기존의 음악질서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했다는 사실이다. 이들 젊은 음악가 집단이 사티로부터 어떤 특정한 음악어법을 배운 것은 아니다. 다만 당대를 장악했던 후기 낭만주의와 인상주의 사조에 굴복하지 않되 꿋꿋이 자신만의 색깔을 고수해나갔던 점, 음악을 신성한 예술의 대상으로 올려놓기보단 시선을 과감히 낮춰 예술의 일상성을 모색한 점 등과 같은 사티의 선도적 용기를 본받고자 했을 것이다. 프랑스 6인조는 반낭만주의와 반인상주의의 표방에 그치지 않고 반표현주의, 신고전주의, 초현실주의, 다다이즘에 이르는 다양한 사조로 진화했다.

조은아 교수

조은아 교수

사티는 시대를 앞서나간 선도자였던 동시에, 당대의 흐름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자신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용기 있게(혹은 무심히) 구축한 음악가였다. 이 기괴한 천재는 사람의 시선이 가지 않는 구석을 편애했다고 한다. 그의 음악표제에도 나오는 <라 벨르 엑상트리크>(La belle Excentrique)를 직역하면 ‘구석의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엑상트리크는 형용사로 표시될 때 ‘구석진’의 뜻이지만, 명사로는 ‘기인’이란 의미이다. 사람들은 사티가 평범함을 숨기려 기이함을 과장한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과연 그럴까. 그의 음악에 묻어나는 서정적이고도 소박한 내면은 이러한 기인적 성향과 어떻게 상응하는 것일까. 동전의 양면처럼 상반되는 그의 인성과 음악은 우리에게 커다란 물음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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