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자에 강력한 체력 요구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2018.12.28 21:07 입력 2018.12.28 21:25 수정
조은아 | 피아니스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러시아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

러시아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의 공연을 앞두고 있던 필자의 동료는 석 달 전부터 몸만들기에 돌입했다. 매일 줄넘기를 수백번씩 뛰고 근력운동을 체계적으로 이행했는데 그만큼 이 협주곡은 강력한 체력을 요구한다. 연주자는 건반의 전 영역을 적극 활용하면서 몸뚱이의 온 무게를 실어 자신의 에너지를 남김없이 불태워야 하는 것이다.

라흐마니노프는 작곡가 이전에 스스로 걸출한 피아니스트였다. 음악사의 중요 작곡가 중 프란츠 리스트와 더불어 피아노의 비르투오적 기교를 한층 더 현란하게 진화시킨 주인공이었다. 광활한 음역을 축지법이라도 쓰듯 종횡무진 활보하고, 여러 음들을 동시에 두텁게 공명시키는 특유의 스타일은 그의 신체조건과도 관계가 깊다. 190㎝를 훌쩍 넘은 장신의 거구는 Do에서 다음 옥타브의 La까지 닿는 거대한 손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손바닥을 활짝 펼쳐봐야 Do에서 다음 옥타브의 Re 혹은 기껏해야 Mi까지 닿을 뿐이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커다란 손으로 피아노가 가진 악기의 특징과 장점을 훌륭히 구현했다.

피아노 협주곡 3번의 헌정은 라흐마니노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라 칭송했던 요제프 호프만에게 돌아갔다. 워낙엔 초연도 호프만에게 의뢰했지만,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광폭한 음역을 소화하기엔 손의 크기가 충분치 않았다. 스타인웨이사에서 호프만의 협주곡 3번 연주를 위해 건반 폭을 좁힌 피아노 제작을 시도했으나 호프만은 정중히 사양한다. 결국 라흐마니노프 자신의 피아노와 지휘자 발터 담로쉬, 뉴욕 필하모닉의 초연으로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다.

당시 뉴욕 헤럴드는 “우리 시대 협주곡 중 가장 흥미롭고 아름다운 작품”이라 호평하면서도, “극단적인 테크닉과 장대함으로 인해 여러 피아니스트가 연주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우려했었다.

라흐마니노프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를 대표하는 양대 음악원에서 수학한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가 섭렵한 러시아 피아니즘은 손가락의 속력과 강세를 음악 전면에 빤히 내세우는 것을 경계한다. 낱낱의 발음이 들리기보다는 프레이징을 자연스럽게 구현하고 호흡이 긴 레가토를 연결하는 데 더 집중하는 것이다. 라흐마니노프 역시 손가락만 돌리는 무의미한 기교에 질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피아노 작품은 다른 작곡가에 비해 음표의 수가 현저히 많다. 많은 음들이 동시에 소리를 내며 피아노의 다채로운 장중함을 강조한다. 연주자는 음표의 산만한 다발, 두터운 층위 속에 숨어있는 멜로디 선을 간결히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세상 속 연습실]연주자에 강력한 체력 요구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20세기 전반기를 호령했던 피아니스트답게 라흐마니노프의 모든 작품은 자신이 연주하는 것을 전제로 작곡되었다. 그렇게 폭발적이고 초인적인 기교가 만발하는데도 정작 스스로는 평정심을 잃지 않은 모양이다. 그의 연주를 접했던 스트라빈스키는 ‘연주 도중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는 유일한 피아니스트’라 질투할 정도였다.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연주해 녹음한 음반을 들어봐도 테크닉은 더함도 덜함도 없이 정확하며, 센티멘털은 섬세하게 억제되어 있다. 이렇듯 기교와 완력에 매몰되지 않고, 레가토의 긴 호흡과 명징한 구조를 구현하는 것이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을 연주하는 후대 피아니스트들의 ‘넘사벽(!)’ 과제라 하겠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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