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되고 폐기된 몸, 이 시대 새로운 ‘괴물’의 탄생…연극 <괴물 B>

2021.07.26 11:34 입력 2021.07.26 23:03 수정

지난 23일부터 서울 대학로 알과핵 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괴물 B> 는 산업재해로 손상된 노동자의 육신과 그 고통의 흔적에 대한 이야기다. 극단 코끼리만보 제공

지난 23일부터 서울 대학로 알과핵 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괴물 B> 는 산업재해로 손상된 노동자의 육신과 그 고통의 흔적에 대한 이야기다. 극단 코끼리만보 제공

짙은 어둠 속, 공장의 망치 소리가 적막을 깬다. 이내 어둠이 옅어지며 네명의 배우가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낸다. 누군가는 숨쉬기 힘겨운 듯 쇳소리를 내고, 누군가는 신음을, 또 다른 이는 고통스러운 듯 몸을 비튼다. 곧이어 읊조리듯 이어지는 말들이 그들의 현재를 이야기한다. ‘떨어졌어’ ‘헛디뎠어’ ‘무너졌어’ ‘끼였어’ ‘치였어’ ‘깔렸어’. 각자의 역사와 상흔을 갖고 있는 몸들은 이곳에서 하나가 된다. 인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유령도 아닌, 훼손된 몸의 조각들로 구성된 “단수이자 복수인” 존재, 이 극의 주인공 ‘B’의 몸을 통해서다.

지난 23일 막을 올린 극단 코끼리만보의 신작 <괴물 B>는 산업재해로 손상된 노동자의 육신과 그 고통의 흔적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 B는 이 시대의 새로운 ‘괴물’이다. “B의 역사가 곧 근대의 역사”라는 대사처럼, B의 몸은 타인들의 훼손된 신체들로 구성돼 있다. 기계에 잘려나간 누군가의 손가락과 다리, 공장에서 발생한 화재로 타버린 어떤 이의 젖가슴, 분진으로 망가진 석공의 폐가 그의 몸에 붙어 있다. 즉 B는 사람을 ‘갈아넣어’ 이룩한 산업화와 자본주의 이면의 비극을 상징하는 존재이자 그 세계가 폐기한 몸들의 대변자인 셈이다. “부분이 결합된 몸이니, 누더기 같다고 할까요?”

‘B’는 알파벳 ‘A’와 대비되는, “일종의 자학적 호칭”이다. 이 세계에 얼마나 많은 ‘B’가 존재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매년 발생하는 산재 사고로 그 수를 짐작할 뿐이다. 몸의 원래 주인들은 지금도 어디에선가 살아가고 있지만, B는 그 몸이 훼손된 시간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의 몸을 이루는 파편들이 사고의 순간을 기억할 때마다 B는 고통으로 몸부림친다. 그리고 여기, 폐공장의 B는 이제 그 긴 고통의 시간을 끝내고자 한다.

연극 <괴물 B> 공연 장면. ‘괴물 B’(오른쪽)는 산업재해 현장에서 훼손된 타인들의 신체들로 이뤄졌다. B는 알파벳 A와 대비되는 “일종의 자학적 호칭”이다. 극단 코끼리만보 제공

연극 <괴물 B> 공연 장면. ‘괴물 B’(오른쪽)는 산업재해 현장에서 훼손된 타인들의 신체들로 이뤄졌다. B는 알파벳 A와 대비되는 “일종의 자학적 호칭”이다. 극단 코끼리만보 제공

연극 <괴물 B> 공연 장면. 극단 코끼리만보 제공

연극 <괴물 B> 공연 장면. 극단 코끼리만보 제공

이야기는 오래전 문을 닫은 폐공장에서 B가 젊은 배달 노동자 ‘연아’와 만나며 전개된다. 아주 오래전 통조림 공장이었던 이곳은 누군가의 잘린 손가락으로 B의 몸이 탄생한 곳이자, 쉴 새 없이 울리는 콜을 받고 ‘배달을 뛰는’ 연아에겐 잠시 지친 몸을 쉬게 하는 장소다.

“내가 원할 때만 달린다”를 모토로 내건 배달 회사에서 ‘자율적으로’ 일을 선택하고 수행한다고 자부하지만, 그런 연아의 삶도 고단하기는 마찬가지다. 오래전 실종된 연아의 아버지는 피켓 라인을 넘어 공장으로 돌아간 이른바 ‘살아남은 자’였다. ‘천국행 티켓’을 쥐고 공장에 복귀하는 버스에 오른 날, 연기처럼 어디론가 사라진 뒤 지금껏 소식이 없다. 아버지가 일했던 공장 노동자들은 사용자의 정리해고에 맞서 싸울 수라도 있었지만, 연아 같은 플랫폼 노동자들은 부당한 일을 당해도 싸울 대상조차 불투명하다. 이들에게 업무 지시를 내리는 배달 애플리케이션(앱)의 “인공지능(AI)과 맞장 뜰 수는 없는” 노릇이다.

B는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연아에게 사람 찾는 일을 부탁한다. 그가 찾는 사람은 총 세명, 연아는 수고비를 받고 그중 한 사람을 찾기로 한다. B가 찾는 사람들은 어디에선가 생을 이어가고 있는, 그의 손상된 신체의 주인들이다. 왜 이 옛사람들을 찾느냐는 연아의 물음에 B는 답한다. “죽으려고.”

매년 수백여명이 일하다 목숨을 잃어도 좀처럼 변하지 않는 한국 사회의 노동 현실을 날카롭게 묘파한 연극이다. B라는 ‘괴물’을 만들어낸 것은 무엇인지, 사람들을 무디게 만들 정도로 지독하게 되풀이된 이 비극은 왜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지, 그 세계에서 ‘진짜 괴물’은 무엇인지 연극은 묻는 듯하다. 진화하며 대물림되는 절망, 몸과 정신에 차곡차곡 쌓인 고통의 흔적을 지닌 인물들은 “이게 왜 재난이 아니냐”고 이야기한다.

반복되는 재난을 암시하듯, 망치 소리로 시작된 연극은 망치 소리와 함께 막을 내린다. B가 사라진 자리, 여전히 도시엔 또 다른 ‘B’들이 배회한다. “하나의 괴물이 이 도시를 떠돌고 있다. B라는 괴물이.”

극작가 한현주는 “구의역의 청년과 태안 발전소의 청년이 잊히질 않아 2018년 겨울 이 작품의 초고를 썼다”고 밝혔다. 손원정이 연출하고 배우 이영주, 오대석, 정선철, 이은정, 하치성, 문성복, 김은정, 조성현, 최지혜가 연기한다. 공연은 서울 대학로 알과핵 소극장에서 8월1일까지.

[리뷰]소모되고 폐기된 몸, 이 시대 새로운 ‘괴물’의 탄생…연극 <괴물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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