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비극이 흐르는 곳···‘물의 세계’ 위에 펼쳐지는 창극 ‘리어’

2022.03.27 11:25 입력 2022.03.27 20:04 수정

국립창극단의 신작 <리어>가 지난 22일부터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관객과 만나고 있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정수라 불리는 <리어왕>을 우리 고유의 말과 소리를 입혀 재탄생시킨 작품이다. 국립창극단 제공

국립창극단의 신작 <리어>가 지난 22일부터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관객과 만나고 있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정수라 불리는 <리어왕>을 우리 고유의 말과 소리를 입혀 재탄생시킨 작품이다. 국립창극단 제공

무대는 거대한 ‘물의 세계’다. 막이 오르면 적막하고 황량한 물가를 연상케 하는 무대 위에 배우들이 등장한다. 희뿌연 물안개 속에서 물 속에 발을 디딘 채, 배우들의 합창이 시작된다. “물이여. 멀고 먼 길 고단한 물이여. 고요해지려는도다. 리어여, 물이여. 물이여, 리어여.”

화려한 창작진으로 개막 전부터 기대를 모았던 국립창극단의 신작 <리어>가 마침내 베일을 벗었다. 무대를 채운 20t의 물은 이 공연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이미지다.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사납게 흐르고 흔들리는 물의 변화무쌍한 속성이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의 흐름과 닮았다. 물살에 휩쓸려가지 않으려는 인간의 욕망과 어리석음, 그럼에도 거역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갈등하고 좌절하는 인물들의 분투가 물의 이미지를 통해 구현된다.

“상선(上善)은 약수(若水)일러니 만물을 이로이 하되 다투지 아니하고 모두가 저어하난 낮은 곳에 처하노라.” 절망으로 미쳐버린 늙은 왕 ‘리어’로 분한 소리꾼 김준수는 노자 ‘도덕경’의 한 구절을 노래하며 무대에 등장한다. 이번 공연을 위해 원작을 새로 집필한 극작가 배삼식은 삶이라는 비극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통찰을 ‘물의 철학’으로 일컬어지는 노자 사상과 엮어냈다고 한다.

공연은 이런 작가의 의도에 충실하게, 물의 이미지로 시작해 물로 끝난다.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믿었던 두 딸에게 배신을 당하고, 그 충격으로 미쳐 광야를 헤매다가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린 리어의 질곡 많은 삶을 물에 빗댄다. 배우들은 180분의 러닝타임 내내 물 속을 걷거나 뛰고, 때론 격렬하게 물을 튀기거나 허우적대며 극한의 감정을 표현한다. 잔잔하고 고요할 때는 마음을 비추는 거울처럼, 태풍이 불 땐 영락없이 휘청거리는 삶의 형상처럼 물은 작품의 정서를 투영한다.

창극 <리어>의 한 장면. 국립창극단 제공

창극 <리어>의 한 장면. 국립창극단 제공

창극 <리어>의 한 장면. 국립창극단 제공

창극 <리어>의 한 장면. 국립창극단 제공

극중 리어의 상황과 감정에 맞게 섬세하게 짜인 무대 연출이 인상적이다. 1막의 마지막, 리어가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광야를 떠도는 장면은 조명과 소리를 통해 천둥과 뇌우를 생동감 있게 구현했다. 모든 것을 잃은 리어가 무대 끝에서 광대와 비틀거리며 등장하고, 검은 옷을 입은 코러스 배우들이 선보이는 합창과 안무가 비극적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소리가 중심이 된 창극이지만 안무 역시 눈에 띄는 작품이다. 이번 작품으로 첫 창극 연출에 도전한 안무가 겸 연출가 정영두는 물 위에 선 배우들의 몸짓 하나하나에 이야기를 불어넣었다.

국립창극단은 그간 <메디아> <트로이의 연인들> <오르페오전> 등 서양 고전을 재해석한 작품으로 창극의 소재와 영역을 확장해 왔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정수라 불리는 <리어왕>은 우리 언어와 소리를 만나며 색다른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한승석(작창·음악감독)과 정재일(작곡)이 의기투합한 소리는 증오와 광기, 파멸 등 비극적인 정서를 묵직하게 담아냈다. 무엇보다 열다섯명의 소리꾼들이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극한의 에너지와 기량에 압도당하게 된다. 31세의 나이에 80대 리어 역에 ‘파격 캐스팅’ 된 김준수는 카리스마 있는 소리로 자신의 기량을 드러냈다. 글로스터 역을 맡은 유태평양은 뛰어난 소리꾼뿐만 아니라 재능 있는 배우로서의 능력을 입증했다. 셋째 딸 코딜리어와 광대 역을 맡은 민은경의 호소력 있는 소리도 관객들의 큰 박수를 끌어냈다.

공연은 죽음이라는 폭풍우가 지나간 뒤 잔잔한 물을 비추며 막을 내린다. “이 고요를 위하여, 적막을 위하여 그 모든 소란이 필요했던가.” 어느덧 푸른빛으로 변한 고요한 물 위에 선 배우들의 노래가 긴 여운을 남긴다. 출연진의 코로나19 확진으로 당초 일정보다 개막이 늦어진 창극 <리어>는 2회 공연 회차를 늘려 오는 30일까지 무대에 오른다.

창극 <리어>의 한 장면. 국립창극단 제공

창극 <리어>의 한 장면. 국립창극단 제공

80대 노인 ‘리어’로 변한 소리꾼 김준수. 국립창극단 제공

80대 노인 ‘리어’로 변한 소리꾼 김준수. 국립창극단 제공

글로스터 역을 맡은 소리꾼 유태평양. 국립창극단 제공

글로스터 역을 맡은 소리꾼 유태평양. 국립창극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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