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 반대한 한규설 ‘회고담’ 100년만에 발굴

2005.11.14 07:59

1905년 체결된 을사늑약 100돌을 맞아 조약 체결에 끝까지 반대하다 파면된 참정대신(오늘날 국무총리에 해당) 한규설(韓圭卨:1848~1930)의 생생한 비화가 공개됐다.

한규설의 을사늑약 증언을 보도한 1930년 1월 14일자 ‘조선통신’.

한규설의 을사늑약 증언을 보도한 1930년 1월 14일자 ‘조선통신’.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 원장(명지대 석좌교수)은 일본 외교사료관에서 한규설의 회고담이 실린 ‘조선통신’(1930년 1월14~17일자)을 발굴, 13일 공개했다. ‘조선통신’은 일제시대 한국 관련 기사를 일본에 전하는 신문의 일종이다.

‘한말정객의 회고담’이라고 이름붙여진 ‘조선통신’의 기사는 당시 조약체결에 마지막까지 항거했던 한규설의 생생한 육성증언이 담겨 있다. 4회에 걸쳐 연재된 이 기사는 조약체결 전후의 급박했던 조정 분위기, 박제순을 비롯한 을사오적들의 행태, 그리고 내각수반으로서 조약을 온몸으로 막으려 했던 한규설의 고민들이 담겨 있다.

한규설은 회고담에서 “을사늑약 이후 외부인들과의 접촉을 끊고 두문불출하고 살아왔다”며 “‘살아 숨쉬는 시체’(未冷屍)와 같은 내가 무슨 면목으로 세인들을 대할 수 있겠는가”라고 심경을 토로했다.

한규설의 회고담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당시 조약체결의 실무대표인 박제순 외부대신에 대한 회고. 박제순은 16일까지만 하더라도 조약체결을 반대하며 “외부대신의 인장(印章)을 뺏길 것 같으면 자결하는 게 낫다”고 말해 조정 대신 중에서도 한규설의 신망을 크게 받았다. 그러나 다음날 회담장에서 박제순은 태도가 돌변, 인장을 건네주고 말았다.

한규설은 또 처음에는 내각대신들이 모두 조약체결 불가를 말했으나 어전회의가 진행되면서 일제의 외교관, 군인들이 고종황제의 거처였던 덕수궁 수옥헌(漱玉軒) 근처까지 들어오며 압박하자 이완용, 권중현, 이지용 등이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고 전했다. 한규설은 18일 오전 1시30분께 외무대신의 날인으로 조약이 체결된 뒤 조약무효를 위해 각 대신들에게 면직조치를 취했으나 다음날 오히려 자신이 면직되어 무위로 끝났다고 회고했다. 자료를 검토한 동국대 한철호 교수(한국사)는 “한규설의 회고담은 당시 내각 수반이자 조약의 최고책임자로서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제에 의해 수행됐음을 거듭 입증하는 자료”라고 말했다.

〈조운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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