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력발전소 반대 시위 때 기업 조형물에 스프레이···대법 “재물손괴 아냐”

2024.05.30 10:55 입력 2024.06.03 17:17 수정 김나연 기자

“재물손괴죄 쉽게 인정하면 표현의 자유 억누를 위험”…‘벌금형’ 원심 파기

청년기후긴급행동 관계자들이 30일 두산중공업 기후불복종 행동에 관한 대법원 상고심 선고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대법원은 이날 활동가들에게 유죄 판정을 내린 원심을 깨고 파기환송했다. 정효진 기자

기후위기 활동가들이 두산중공업(현 두산에너빌리티)의 해외 석탄화력발전소 건설 반대 시위를 하며 기업 조형물에 페인트를 칠한 행위가 재물손괴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세척이 쉬운 수성 스프레이 페인트를 사용했고, 시위 직후 세척도 했기 때문에 조형물을 훼손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은 30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과 재물손괴 혐의로 기소된 청년기후긴급행동 강은빈 대표와 이은호 활동가에게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수원지법으로 돌려보냈다.

2021년 강 대표와 이 활동가는 정부의 ‘베트남 붕앙-2 석탄화력발전소 수출 사업’ 시공에 참여한 두산중공업(현 두산에너빌리티)에 반발하는 긴급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두산중공업 건물 앞 조형물에 녹색 페인트가 든 스프레이를 뿌리며 “기후위기 시대에 그린뉴딜 최대 수혜기업으로 선정되고 친환경 인프라를 구축하겠다고 이야기하는 두산이 석탄화력발전소를 새로 짓고 있는 상황은 더 이상 묵인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검찰은 이들이 사전 신고 없이 시위를 했고, 조형물을 훼손했다며 집회·시위 위반과 재물손괴 혐의로 기소했다.

강 대표와 이 활동가는 재판 과정에서 “베트남 주민의 건강상 피해 및 생태계 오염을 방지하고 기후위기가 가속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행위로서 정당행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또 “조형물에 뿌린 수성 페인트는 물과 스펀지로 깨끗이 지울 수 있어 재물을 손괴했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강 대표에게 벌금 300만원을, 이 활동가에게 벌금 200만원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시위를 사전에 신고하도록 한 것은 타인이나 공동체의 이익이 침해되는 것을 방지해 공공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사전조치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며 “시위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의견이 정당하다고 해서 신고의무가 면제된다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재물손괴 혐의에 대해서는 “페인트를 제거하는 데 상당한 시간과 노력과 비용이 소요됐으며 일부는 원상회복이 불가능하게 됐다”고 말했다. 2심 재판부도 “합법적인 수단과 방법을 통하여 의견을 전달할 수 있었다”며 이들의 항소를 기각했다.

대법원은 이를 뒤집었다. 대법원은 활동가들이 녹색 페인트를 칠한 것이 조형물의 효용을 떨어뜨렸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피고인들은 미리 준비한 물과 스펀지로 조형물을 세척했으므로 조형물을 원상회복이 어려운 상태로 만들어 그 효용을 해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일부 스프레이가 남은 부분은 극히 제한적인 범위인데, 비나 바람 등에 자연스럽게 오염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했다.

또 재물손괴 혐의를 손쉽게 인정할 경우 표현의 자유가 제한될 수 있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형법상 재물손괴죄를 쉽게 인정한다면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게 될 위험이 있다”며 “민사상 손해배상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지난해 법원은 두산 측이 강 대표와 이 활동가에게 낸 1840만원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했다.

다만 대법원은 이번 판결로 인해 모든 낙서행위에 재물손괴죄가 배제되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대법원 판례상 재물손괴죄는 타인 소유물의 효용을 침해하려는 생각으로 해당 물건이 본래 가진 효용을 없애거나 줄인 경우 성립한다. 예컨대 도로에 페인트를 칠해 차선 등을 구분할 수 없게 됐다면 도로의 효용이 떨어졌으므로 재물손괴가 인정될 수 있다.

청년기후긴급행동은 선고 뒤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판결을 통해 (우리의 행위가) 기후활동가들의 활동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다행”이라고 했다. 이 활동가는 “법원의 판결은 전향적이지만 기후위기와 불평등은 너무나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며 “이번 선고를 계기로 여타 석탄발전소 등에 대해서도 어떻게 대응해나갈지 다음 단계를 고민해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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