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사 첫 ‘통사성격의 연대기’로 큰 가치

2005.03.31 17:54

[실록 민주화운동 결산 좌담] 언론사 첫  ‘통사성격의 연대기’로 큰 가치

-사회=이번 시리즈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초창기에 어떻게 싹이 터서 어떤 과정을 거쳐 전개됐으며, 그 성과는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춰 기획됐다. 민주화운동사 정리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도라고 할 수 있는데, 시리즈의 의미를 정리한다면.

▲유시춘=우리 민주화운동의 역사도 전태일 분신이나 3선개헌으로부터 계산해 보면 벌써 한 세대가 넘었다. 그야말로 역사의 대장정이라 할 만하다. 70년대는 유신치하로 모든 기록과 전언(傳言)조차 불가능한 엄혹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모든 이야기들이 민주화운동에 복무한 소수 사람들의 기억에만 머물러 있었다. 본격적인 평가는 훗날 역사가들에게 맡기더라도 이들 소수의 기억을 역사와 국민의 기록으로 남겨놓자, 야사를 정사로 바꿔놓자, 이런 것들이 시리즈의 기획 취지였다. 그동안 민청학련이나 87년 6월항쟁 등에 대한 학자들의 부분적인 연구는 간혹 있었으나, 민주화운동사를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춰 일관성있게 정리한 기획은 ‘실록 민주화운동’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우재=시리즈 집필을 위해 자료를 정리하면서 우리나라 민주화운동도 이미 장구한 세월을 지나왔다는 점을 실감했다. 그에 비해 이를 제대로 다룬 운동사가 없었다. 성명서 등을 모아놓은 자료집 성격의 운동사는 더러 있었으나, 전체 20년의 세월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한 것은 최초인 것 같다. 신문 연재라는 성격 때문에 단절(斷切)적이고 사건 중심이라는 한계가 있으나, 그래도 통사로서는 처음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김남일=개인적으로 필진에 뒤늦게 합류했지만 상당히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당시 공포 속에서 괴롭게 하루하루를 보냈던 그 시절을 이렇게까지 자유롭게 회고할 수 있다는 게 스스로 자랑스러웠다. 내가 그때 그 현장에서 지켜봤던 그 역사 속에 나도 있었구나 하는 그런 느낌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이번 시리즈는 나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 그 시절을 어렵게 살았던 사람들, 때로는 반대편에 있었던 사람까지 포함해 고통스러운 시절을 함께 살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비망록이 되지 않을까 싶다. 민주화가 어느 정도 정착된 이후에 오히려 민주화운동사를 무시하고 의도적으로 망각하려는 풍토가 있는데, 이같은 경향에 맞서 다시 한번 역사의 환기통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사회=오늘 이 자리에 나온 분들은 민주화운동의 상당한 시기, 혹은 어느 한 시기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직접 몸으로 겪었던 일을 글로 옮긴 셈이기도 한데, 개인적 감회가 적지 않았을 것 같다.

▲유시춘=글을 쓰면서 가슴이 복받치는 경험을 했다. 그것은 내가 주로 활동했던 80년대 중·후반을 집필하면서였다. 민주화의 기운이 한창 고양되던 그 즈음에는 풍찬노숙이라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 길거리를 헤매면서 마른 빵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고, 거듭되는 시위나 면회투쟁으로 굉장히 심산한 나날을 보냈다. 당시 거리를 헤맬 때는 솔직히 민주화가 이렇게 빨리 성취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벌써 그것이 역사가 됐다는 감격이 있었고, 자긍심도 느꼈다. 우리 현대사는 박은식 선생이 쓰신 ‘독립운동지혈사’ 못지않은, ‘민주화운동지혈사’라 일러도 모자람이 없는, 수많은 양심들의 희생과 고난 속에 대장정을 이루어냈다는 면에서 우리의 국가 정통성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다. 현대사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된 것이 개인적으로 가장 큰 소득이었다.

▲김남일=그때는 참으로 무서운 시절이었다. 지금이니까 이렇게 편하게 얘기하지, 그 당시는 아주 막막할 때가 많았다. ‘내일 잡혀가지 않을까’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오늘 집에 들어갈 때는 어떻게 들어갈까’ 등등. 나 스스로도 그렇지만 아주 강인한 사람들이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같은 사람들이, 약한 사람들이 차마 뒤로 빠지지 못해서, 그렇게 어울리고 어울리다가, 그것이 결국 역사가 됐다. 물론 고문을 당해도 강고하게 버틴 사람도 있었지만, 다들 어렵고 힘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자랑스럽다.

▲이우재=개인적으로는 21세 때 감옥에 들어갔는데, 글을 쓰는 과정에서 ‘참 사람이 많이도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일상적인 삶 속에 묻혀 사느라고 그저 그렇게 지나쳤었는데, 80년 광주를 빼고라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는 것을 다시 실감했다. 글을 쓰다가 한참동안이나 그냥 멍하게 앉아 있을 때도 있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지만, 그래도 지금 와 있는 곳이 얼마나 소중한가,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가, 그런 생각을 간혹 한다.

-사회=이 기획이 다룬 시기를 보면 지금으로부터 멀리는 35년, 가까워도 15년이 흘렀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80년 광주를 까마득한 과거의 일쯤으로 기억한다. 이번 기획은 이들에게 현재가 있게 된 뿌리, 여전히 진행형 사건으로서 민주화운동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자세하게 이야기해 달라.

▲유시춘=개인적으로 들은 충격적인 이야기가 이 시리즈를 처음 기획하게 만들었다. 서울시내 어느 대학교에서 신입생 구두시험을 보는데, 5·18 광주에 대해 물었더니 10명 중 1명 정도만 이 사건을 알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머리를 때리는’ 이야기였다. 저 멀리 제주도 아파트 밑에 4·3항쟁의 수많은 피가 묻혀 있는 것처럼 지금의 자유를 구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는지, 민족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젊은 세대에게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사건 중심 서술이다보니 거기에 가려져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조명되지 못한 면이 있다. 연재 중에도 당시 관련자들이나 독자들로부터 그런 점을 아쉬워하는 반응이 적지 않게 들어왔다.

▲이우재=언젠가 만주지역의 항일운동사 자료를 봤는데, 그곳에서도 조선인들이 참 많이 죽었더라. 현대사에 대한 기록이 충분히 이루어진다 해도 기록에 남겨지는 사람은 얼마 안된다. 가능한 한 사건 속에 묻힌 사람들, 조명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자고 했는데 실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사건 주동자 몇명을 중심으로 기술한 경우도 많았다. 기사 분량의 제한도 있었고, 사건을 설명하려면 대표적인 사람들 위주로 서술하지 않을 수 없는 기술적인 한계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 점이 가장 마음 아팠다. 지금도 일부 신문은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이 호의호식하는 것처럼 다루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전력이 사회적인 핸디캡이 돼 지금도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복원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게 가장 회한스럽다.

▲유시춘=시리즈는 사건별로, 연대기적으로 구성하다가 어떤 사람을 통해 민주화운동의 고귀한 정신을 얘기해야 할 때는 인물로 접근했다. 노동운동과 인권운동에서 반드시 조명해야 할 조화순 목사, 조영래 변호사 등이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조화순 목사의 경우 특히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어머니와 같았던 분인데, 제도권에서는 거의 기록이 안돼 있다. 정사로 쓴다면 그런 사람의 기록은 턱없이 부족할 수도 있다. 나는 조목사가 작은 예수라고 생각한다. 조화순 목사 이야기를 쓰면서 스스로 정신이 고양되고, 또 내가 느꼈던 고양된 정신이 읽는 사람들에게도 전달되기를 소망했다. ‘민주화운동 영웅사’가 아니라 ‘민중사’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사건 중심이다보니 가려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김남일=나 역시 제일 걸리는 대목 중 하나였다. ‘노동과 문학’ 편의 경우 애초 한차례를 예정했으나 굳이 두차례로 나누어 정리했다. 한 꼭지로 하면 박노해 중심으로밖에 기술이 안되기 때문이었다. 박노해 이전과 이후, 박노해만큼 알려지진 않았지만 노동문학의 씨를 뿌리고 그 맥을 이어갔던 수많은 노동자들과 시인, 소설가 얘기를 안할 수가 없었다.

-사회=이른바 서울 중심, 중앙 중심의 기술로 지역운동이나 부문이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됐다는 지적도 있다.

▲유시춘=워낙 중앙집중적인 사회이다보니 민주화운동사조차 서울 중심으로 기술된 측면이 있다. 부산, 마산, 대구 등 서울보다 더 척박한 환경과 몰이해 속에서 훨씬 더 치열하게 싸우며 고생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얘기를 담지 못한 건 정말 아쉽다. 이제 우리가 밑그림 정도를 그려놓은 것이다. 이번 시리즈가 앞으로 완성돼야 할 운동사의 조그마한 뼈대를 제공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사회=자료 확보나 인터뷰 등을 위해 많은 취재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취재 과정에서 겪은 고충이나 보람이 있었다면.

▲유시춘=70년대를 쓸 때가 참 어려웠다. 성명서 하나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었고, 취재는 오로지 당시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이제는 연세가 많이 들어 기억마저 가물가물한 사람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큰 수확이 있었다면 민중신학을 취재할 때 미국 뉴저지에 있던 문동환 박사를 수소문해 만난 일이다. 연락했더니 마침 목사님이 귀국한다고 했다. 녹음기를 들고 4~5시간 동안 문익환 목사 일가의 이야기, 민중신학 태동기 전후 상황 등을 들을 수 있었다. 아쉬웠던 순간도 있었다. 작고한 이우정 교수의 경우 7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해직된 교수이자, 여성운동의 대모라 할 수 있는 분이다. 75년 3·1 명동사건을 계기로 김대중씨가 재야와 처음 연결됐는데, 이우정 교수가 그 전후 사정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가 그만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이를 놓치고 말았다. 70년대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의 구술과 증언을 어떤 식으로든 남겨두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우재=학생운동은 운동진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컸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건을 쓰게 되면 뒷얘기도 풍부하게 나올 것이다. 그런데 ‘70년대 학생운동’, 이런 식으로 정리하다보니 많은 얘기를 할 수 없었다. 사실 양적으로 보면 민주화운동사에서 차지하는 학생운동의 비중이 70%는 될 것이다. 민주화운동사를 통해 민초들의 힘을 조명하자는 취지 때문에 불가피하게 줄인 면이 있다. 관련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지금 처지에 따라 그때를 얘기하는 게 다르다는 점을 느꼈다. 자기가 서 있는 위치가 그때의 연장선상에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말이 다른 것이다. 누구는 과장도 하고 누구는 “별거 아니었다”고도 하고. 그래도 80년대는 신문보도라도 있었는데 70년대는 정말 힘들었다.

▲김남일=79년 긴급조치 관련 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당시 내가 관련됐던 사건의 유인물을 찾을 수 있었다. 이사 다니면서 ‘어디에 끼워 놓았을 텐데’ 하다가 잊고 있었는데,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수 있지만 자료를 챙기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을 새삼 느꼈다. 운동사를 제대로 정리하려면 야사를 수집하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 이러한 작업들은 정부가 체계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 독립운동사를 쓰는 것과 똑같이 의미있는 작업이다.

-사회=최근 정치권에서 과거사진상규명법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묻혀 있는 사건들을 다시 조명해 그때 국가권력이 어떻게 개인들을 파괴시켰는지 진실을 규명하자는 것인데, 여전히 정치권에서는 답보상태에 머물고 있다.

▲김남일=최근 프랑스의 나치 부역 지식인 숙청을 다룬 ‘지식인의 죄와 벌’이라는 책을 보면서 ‘우리가 너무 물러터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는 모리악과 카뮈가 벌인 논쟁이 소개돼 있다. 대표적인 우파 지식인인 모리악은 ‘우리는 나치가 나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나치와 똑같은 짓을 해서는 안된다’는 논리를 내세워 나치 부역자들을 용서해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카뮈는 “온 국민과 관련된 진실이 문제가 될 때 정의가 해야 할 일은 자비를 침묵시키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자비부터 베푸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치욕스러운 역사에 대해 진실을 밝히는 것은 정의가 하는 일이고, 그리고 나서 자비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우재=물론 ‘해묵은 과거를 왜 쓸데없이 지금 파헤치느냐’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말이 성립되려면 과거가 극복됐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80년대 대학에 다닐 때 학생들을 모질게 고문하던 경찰이 있었다. 억지로 혐의를 만들어 학생들을 구속하기도 했다. 그런데 일전에 그 경찰이 서장으로 임명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런 사람들이 절절하게 참회하고 공직에서 물러났다면 굳이 과거사 청산을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랬다는 말은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다. 진실을 밝히고 과거를 반성한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왜 지금 과거를 파헤치느냐’는 말이 성립될 수 있겠나. 미래를 위해서도 과거사 청산은 중요하다.

[실록 민주화운동 결산 좌담] 언론사 첫  ‘통사성격의 연대기’로 큰 가치

▲이우재=산업화에 합류한 사람들은 사회에 일찍 적응했고 또 부자도 됐다. 그러나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사람들은 거기에 쏟아부은 열정만큼 뒤처져 버렸다. 그 사람들도 가정이 있고, 또 살아가야 하는데 여전히 가난하다. 그때의 열정으로 인해 지금 사회에서 뒤처져 있는 그 사람들을 시리즈에 제대로 담지 못한 게 가장 가슴 아프다.

▲김남일=80년대에 활동했던 노동자들을 보면, 일부는 국회에도 진출했지만 여전히 다들 어렵게 살고 있다. 그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역사적 평가가 있어야 한다. 동시에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도 있어야 할 것이다. 80년대는 너무 강고했고, 그 여파로 90년대라는 시기는 뭔가 지친 느낌이 많았다. 우리 스스로 자긍심도 별로 가지지 못했고 가질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최근 호주의 한 여교사가 한국 노동자들의 문학운동을 주제로 해서 쓴 박사 논문을 보았다. 외국에서 학위의 주제가 될 정도로 우리 민주화운동사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는 말이다. 한동안 우리가 지치기도 했고 이런저런 여건이 좋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때의 진실을 밝히는 노력을 계속했어야 하는데, 너무 쉽게 타협한 건 아닌지 그런 반성도 하게 된다.

-사회=오랜 시간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어 고맙다.

[실록 민주화운동 결산 좌담] 언론사 첫  ‘통사성격의 연대기’로 큰 가치

〈정리 김상철기자 ksoul@kyunghyang.com/사진 서성일기자 cent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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