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무대 선 진보학계 원로 연세대 명예교수 오세철

2010.12.20 21:42 입력 2010.12.20 22:43 수정
손동우 기획에디터

“강의실·시위현장서 늘 하던 얘기, 이제 무대서 합니다”

사람이 의당 지녀야 할 덕목의 하나로 흔히 일관성을 꼽지만 그것을 구체적인 삶 속에서 유지·실천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특히 한국 사회의 우편향 또는 보수 절대 우위라는 정치·사회적 지형 속에서 진보적 삶의 자세를 오랫동안 간직하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젊은 시절 세상을 뒤엎을 듯한 기개로 사자후를 뿜어대던 수많은 진보주의자가 이런저런 이유를 내세우며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보수화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 터이다.

최근 대학로에서 개막된 <반도체 소녀>에서 대학교수 역을 맡아 열연 중인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가 공연장 인근의 한 카페에서 연극 출연에 얽힌 얘기를 하고 있다. 그는 “오랫동안 강의실이나 집회장에서 했던 사회주의적 실천이라는 얘기를 연극 무대로 옮겨 왔다”고 말했다.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최근 대학로에서 개막된 <반도체 소녀>에서 대학교수 역을 맡아 열연 중인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가 공연장 인근의 한 카페에서 연극 출연에 얽힌 얘기를 하고 있다. 그는 “오랫동안 강의실이나 집회장에서 했던 사회주의적 실천이라는 얘기를 연극 무대로 옮겨 왔다”고 말했다.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이런 점에서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67)는 ‘일이관지(一二貫之)의 진보주의자’라고 할 만하다. 자신의 이념적 정체성을 ‘마르크스주의자’로 규정하는 그는 학문의 영역뿐만 아니라 실천의 분야에서도 마르크스주의를 구현하고 있는 진보학계의 대표적 인물이다. 37년 동안 재직했던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직에서 5년 전 물러난 뒤 다양한 활동을 해오고 있는 그가 최근 연극배우로 변신했다. 지난 11일 개막된 <반도체 소녀>에서 오세철은 대학교수 역을 맡았는데 연극은 해를 넘겨 1월2일까지 계속된다. 공연장소가 있는 대학로의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 부근 카페에서 그를 만나 연극 출연에 얽힌 일화와 진보주의자의 삶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았다.

내일모레면 일흔이 되는 나이에 오세철이 ‘늦깎이 배우’로 무대에 오른 것은 <반도체 소녀>의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최철의 강력한 권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6년 전 창단된 극단 ‘날’은 <코뮌> <관동여인숙> <삽질> 등 사회성 짙은 작품을 매년 1편씩 무대에 올려왔는데 이번의 <반도체 소녀>도 백혈병으로 숨진 여성노동자(삼성전자), 해고된 여성노동자(재능교육), 노동자 과로사(자동차 부품생산업체 동희오토) 등 3개 노동현장의 얘기를 그리고 있다. 오세철은 “그동안 극단 ‘날’의 연극을 보면서 관객과 평론가 노릇만 해 왔는데 이들 노동현장을 지켜보면서 아예 배우로 나서고 싶었다”며 “배우로서 연기를 한다기보다는 강의실과 시위현장 등에서 오랫동안 늘 해오던 얘기를 연극무대로 옮겼을 뿐”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소녀>는 주인공 격인 세운·정민 남매와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세운은 삼성에 취업해서 안온한 삶을 누리려는 대학원생으로서 사회문제에 무관심하고,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에만 관심을 갖는 요즘 세대들의 전형이다. 그런데 세운의 여자친구인 혜영은 재능교육 해고 노동자이며, 지도 교수가 ‘노동자의 단결’을 강조하고 강의실에서 공산당 선언을 낭독하는 마르크스주의자 오세철이다. 세운은 여자친구와 지도교수로 인해 고민에 빠진다. 한편 세운의 누나이자 간호사인 정민은 기아자동차 하청업체인 동희오토의 비정규직 노동자인 동용과 연인 사이인데, 삼성전자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죽어가는 ‘반도체 소녀’의 호스피스를 맡으면서 격심한 내적 변화를 겪게 된다.

보수 언론을 비롯한 일각에서 오세철의 전력(前歷)과 내용 일부를 문제삼아 ‘공산주의 연극’ ‘운동권 연극’ 등으로 공격하고 있는 데 대해 그는 “전형적인 침소봉대 이데올로기 공세”라고 단언하면서 “이번 작품은 주인공 남매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가족 이야기이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다수 소시민의 삶을 그린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비정규직이나 해고 노동자를 다룬다고 ‘공산주의 연극’이 된다면 그런 공산주의 연극은 많을수록 좋다”며 “연극을 포함한 모든 예술이 시대의 반영인데 젊은이의 대부분이 비정규적 노동자가 되는 현실을 어떻게 외면하겠느냐”고 반문했다. 또 출연배우 가운데 교수직을 번갈아 맡고 있는 오세철과 작가 류민용을 제외하면 ‘운동권 출신’은 없으며, 이들은 모두 대학로 연극판에서 10년 이상 활동하고 있는 전문 연기자들이다.

교수 역의 대사가 많지 않는 데다 행동반경도 강의실과 법정 등 움직임이 크게 없어 특별히 연기 지도를 받은 것은 없다고 한다. 그래도 그 나름대로는 두 달 가까이 매일 대사를 외고, 표정과 몸짓도 연구하는 등 연기에 공력을 기울였다.

오세철은 “더욱이 자식·제자뻘 되는 젊은 배우들이 세심하게 배려해줘서 연기에 전혀 불편함과 어려움이 없다”면서 “자랑 같지만 연극을 본 사람들이 ‘전혀 초보자 같지 않다’는 평가를 내린다”고 말했다. 운전을 처음 할 때 좌우와 뒤편은 보이지 않다가 점차 사방이 시야에 들어오듯이 처음 무대에 섰을 때도 관객들이 전혀 보이지 않다가 7회 정도 지나니 관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암기에만 급급했는데 이제는 대사가 완전히 수중에 들어왔다”며 “내 연기는 매일매일 새로워지는, 그야말로 일일우일신의 궤도에 접어들었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오세철의 연극 출연은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진 우연이 아니다. 부모와 누나 모두 연극과 관련된 활동을 했고, 그 자신도 대학시절 연극에 몸담았던 ‘연극쟁이 집안’ 출신이기 때문이다. 저명한 영문학자이자 연극평론가였던 부친(오화섭 전 연세대 교수·1979년 작고)과 영문학자이자 연극·영화배우였던 어머니(박노경 전 이화여대 교수·1950년 작고)는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 유학시절 만나 결혼한 뒤 진보적 연극운동에 참여했으며, 2살 위 누나인 오혜령 역시 심야 라디오 방송 DJ도 겸한 ‘스타 극작가’였다. 대학시절 그는 부친이 설립한 ‘연희극예술연구회’에서 오현경 등과 함께 활동했으며, 이와는 별개로 누나와 함께 ‘연세예술동우회’를 만들어 인형극과 번역극 <마담 그레고리> <제17 포로수용소> 등으로 전국 순회공연까지 했다. 오세철은 “대학 강단에 서지 않았다면 아마도 연극판으로 갔을 것”이라며 “모르는 사람은 ‘외도’니 ‘깜짝 출연’이니 하지만 우리 집안 내력을 알고 있는 이들은 이번의 연극 출연에 대해 다들 ‘콩 심은 데 콩 난다’고 한다”고 말했다.

극단 목화의 대표이자 극작가·연출가인 오태석과도 대학시절 연극으로 인연을 맺었다. 경영학과와 철학과로 학과는 달랐지만 1961년 연세대 입학 동기였던 두 사람은 연극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조카 항렬인 오태석은 오세철에게 ‘아저씨’라고 불렀다. 오세철은 “며칠 전 오태석이 공연장에 와서 <반도체 소녀>를 관람한 뒤 스태프들과 배우들에게 꼼꼼하면서도 신랄한 비평을 했다”면서 “주제가 무거울수록 연기는 밝게 하라는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서 연극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고 말했다.

오세철은 자신을 ‘사회주의자’가 아닌 ‘마르크스주의자’로 규정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다. 사회주의는 마르크스 이전에도 수없이 많은 분파와 유파가 존재했지만 세상을 변혁시키는 과정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적 원칙은 단 하나뿐이라는 굳은 믿음 때문이다. 그는 “마르크스는 생전에도 ‘그런 것(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원칙에서 벗어난 잡다한 조류)이 마르크스주의라면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강조하곤 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는 국가공권력의 탄압과 대중의 오해·오독(誤讀)이라는 양쪽 모두에 겹질린 채 심각한 불구상태가 계속돼 왔다는 게 오세철의 진단이다. 남북 분단과 북한정권의 존재, 마르크스주의는 곧 친북이고 김일성주의라는 오해와 오독 속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이 땅에서 질식당했으며, 김일성의 북한 정권은 물론이고 옛 소련의 스탈린 체제 역시 마르크스주의는커녕 국가 자본주의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한국 사회에서 마르크스주의자로 산다는 것은 고난의 길”이라며 “이를 숙명으로 알고 돌파하려 한다”고 말했다.

오세철이 마르크스주의에 입문하게 된 것은 실로 우연이었다. 대학 2학년 때인 62년 청계천 고서점을 배회하던 그는 1901년 출간된 영문판 <자본론>을 싼값으로 손에 넣게 됐다. 그는 “너무나 어려운 내용이어서 제대로 해독하지 못했지만 어렴풋이 맛은 본 셈이었다”고 말했다. 오세철과 동년배인 이른바 ‘6·3세대’들은 박정희 군사정권에 맞서는 반독재·반파시즘 투쟁의 세례를 받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해서 운동을 할 만한 지적·사회적 풍토가 형성되지 않았다고 한다.

오세철이 체계적으로 마르크스를 공부하게 된 것은 모교인 연세대 경영학과의 강단에 선 지 5년 만인 72년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 유학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이 대학 사회학과의 펠더만 교수로부터 <자본론>을 주요 텍스트로 하는 사회학 고전이론을 배웠고, 심리학과 인류학 등도 폭넓게 공부했다.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국가인 미국에서 마르크스를 깊이 공부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였지만 그는 마치 한지(韓紙)가 먹을 빨아들이듯 마르크스와 관련한 지식을 흡수했다. 오세철은 “나중에 동료들로부터 ‘너는 유신 선포 이후 3년간이라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미국에 가서 편안하게 공부만 하지 않았느냐’는 힐난 아닌 힐난을 듣기도 했다”고 말했다.

유학을 마친 75년 오세철은 연세대로 복귀하면서 대학 캠퍼스를 주무대로 활동하는 이른바 ‘강단 마르크시스트’가 됐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강단 좌파’나 ‘강단 사회주의자’가 갖는 부정적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면서 “그러나 그때는 용기 부족 등으로 인해 활동 영역이 강단에 머물렀고 따라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좌파든 우파든 대학 교수가 갖는 특권과 특혜도 느낄 수 있었다. 전교조가 합법화되기 이전 오세철은 동료 교수들과 함께 전교조에 가입했는데 해직된 이들은 모두 초중등 교사였고, 그를 비롯한 대학 교수들은 ‘건재’했다. 오세철은 “당시 해직된 선생님들에게는 뭐라고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너무나 미안했다”고 말했다.

‘강단’에 머물던 오세철을 ‘현실과 실천’ 속으로 떠민 원동력은 두 개의 사건을 통해서였다. 우선 77년 그의 제자였던 경영학과 2학년생 3명이 대강당의 유리창을 깨고 ‘유신철폐’를 외치다가 모조리 경찰에 체포된 일이 그것이다. 그는 격심한 수치심과 자괴감을 느껴야 했다. 어린 제자들은 온몸을 날려 싸우는데 자신은 고작 강단에서 고매한 이론을 읊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학원민주화투쟁 등 점차 행동반경을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오세철은 “그때 연세대에는 무슨 서명운동이 벌어질 때마다 고 김찬국·성내운 선생과 내 이름이 적혔다”고 말했다.

오세철을 결정적으로 변모시킨 것은 87년 6월항쟁 당시 경영학과 제자였던 이한열의 죽음이었다. 그는 학교에서 치러졌던 장례식에서 교수대표 조사를 읽었다. 그는 “이한열의 죽음은 나를 완전히 깨뜨렸다”면서 “그 이후부터는 계속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갔으며 뒤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오세철은 90년 민중당 창당 멤버로 참여하면서 현실정치에 몸을 실었다. 당시 민중당에는 이우재(대표)·이재오(사무총장)·김문수(노동위원장)·장기표(정책위원장) 등이 대거 참여했고, 오세철은 대학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결국 민중당의 실험은 당내 정파들의 이견이 해소되지 않은 데다 선거에서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는 바람에 실패로 끝났다. 6년 전 어느 날 오세철은 국회 앞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시위를 하고 있었는데 이미 한나라당 3선의원이 된 김문수가 그 앞을 지나갔다. 김문수는 “아니, 선생님, 아직도 이러고 계십니까”라며 말을 걸었고, 오세철은 “아직 이러고 있고, 앞으로도 이래야 할 것 같다”고 대답했다.

민중당 이후 오세철은 민중정치연합, 사회주의정치연합, 노동자의 힘 등의 대표를 맡았다. 2008년 2월에는 ‘혁명적 사회주의 노동자당 건설’을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노동자연맹(사노련)을 결성해 이 단체의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8월 경찰은 사노련을 촛불시위의 배후세력으로 지목했고, 오세철은 국가보안법 위반(국가변란 선전·선동 등) 혐의로 기소돼 현재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검찰은 지난 3일 오세철에게 징역 7년을 구형했다. 그는 “통상 구형 이후 2주 내에 열리는 선고심이 <반도체 소녀> 공연이 끝난 이후인 내년 1월 말에 잡힌 걸 보면 재판부가 아마도 연극을 아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문답 대화가 끝난 뒤 인터뷰이와 인터뷰어는 <반도체 소녀>의 스태프들과 출연배우들이 품평회를 하고 있던 공연장 주변의 실내 포장마차로 자리를 옮겼다. 출연진들은 서로 소주잔을 나누면서 여섯 차례 이뤄진 공연의 성과와 미흡한 대목, 개선점 등을 조목조목 얘기했다. 대화가 무르익어 갈 무렵 인터뷰이는 주머니에서 빨간 알약을 꺼낸 뒤 좌중에게 두 알씩 돌렸다. 그가 스스로 ‘붉은 혁명의 비타민’이라고 명명한 빨간색 비타민C 정제(錠劑)였다. 배우들은 이 ‘혁명 묘약’을 먹으면서 더욱 연기에 매진할 것을 결심하는 눈치였고, 인터뷰어는 앞으로 쓸 모든 기사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 오세철과 사람들
‘사회과학대학원’ 추진 멤버, 즐거운 지하단체 ‘즐좌’ 모임
두터운 좌파인맥 비결은 ‘술’


‘진보학계의 원로’ ‘오래된 마르크스주의자’ 등으로 불리는 오세철은 그 세월만큼이나 당연히 두꺼운 ‘좌파 인맥’을 갖고 있다. 우선 학계에서의 오랜 동지로는 고 김진균 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와 김세균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김수행 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등이 있다. 그는 이들 세 사람과 함께 ‘정부나 자본에 예속되지 않는 대안학교로서 실천적 지식인들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2005년 사회과학대학원 설립을 준비했다. 사회과학대학원은 프랑스 68혁명의 성과로 문을 연 파리 8대학을 모델로 했는데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오세철은 “교수 인원 충원과 학생 모집 모두 계획대로 되지 못했다”며 “그러나 사회과학대학원 개설은 포기가 아니라 유보한 것이며 조만간 실현될 것”이라고 말했다.

본격적이고 무거운 담론보다는 가벼운 얘기에 약간의 술을 곁들이는 ‘즐좌(즐거운 좌파들의 모임)’라는 ‘지하단체’도 있다. 2년 전 오세철이 사노련 사건으로 체포됐다가 구속영장이 기각돼 석방되자 그의 지인들은 이를 축하하면서 즉석에서 ‘즐좌’ 결성을 결의했다. 모임의 멤버로는 강내희·김세균·김수행·박거용·박상환·서관모·손호철·유초하·최갑수 교수와 김상곤 경기도교육감 등이다. 오세철은 “1심 선고일인 내년 1월27일 즐좌가 있을 예정이어서 즐겁다”라고 말했다.

오세철이 자신의 좌파 인맥을 ‘관리’하는 핵심적인 수단은 뭐니뭐니해도 술이다. 그는 예닐곱살 때부터 선친의 반주상 옆에 앉아 있다가 술을 배웠는데 이 때문에 ‘술 버릇이 아주 괜찮다’고 한다. 그는 술과 학문, 혁명의 공통점으로 ‘5대 불문(不問)’을 꼽는다. 환경이나 상황을 따지지 않는 ‘청탁불문’, 친소관계와 물리적 거리를 따지지 않는 ‘원근불문’, 함께 하는 사람들의 지위를 따지지 않는 ‘고저불문’, 마지막으로 죽기살기로 해야 하는 ‘생사불문’이 바로 그것이다. 오세철은 “나의 독창적인 5대 불문이론을 내세워 수많은 사람들을 포섭했다”고 자랑했다. 출신학교는 다르지만 동갑내기인데다 61년도 같은 학번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와는 대학시절부터 친교를 맺어왔는데 오세철은 최장집이 결혼할 때 함진아비로 나서서 맹활약을 하기도 했다. 오세철은 “최 교수의 유일한 단점은 술을 거의 못한다는 사실”이라며 “이 때문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 오세철 약력

△ 1943년 서울 출생
△ 연세대 경영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 미국 노스웨스턴대 경영학 박사
△ 연세대 교수, 민중당 교수위원장, 민중정치연합 대표 역임
△ 현 연세대 명예교수
△ 저서 <현대사회의 조직과 변동> <사회주의와 노동자 정치> <다시 혁명을 말한다>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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