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유신의 교육과 대중지성

2013.12.27 20:41 입력 2013.12.27 23:59 수정
천정환 |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

개발주의 ‘폭압’ 속에서 꿋꿋이 큰 대중지성

유신의 모더니즘과 광속도 개발은 ‘새마을노래’가 읊는 것처럼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소득 증대 힘써서 부자 마을 만드”는 데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시기를 좀 넓게 잡아 1960~1980년대 개발연대에서의 가장 의미 깊은 개발과 그 큰 과실은 ‘인간 개발’이었다. 이 점은 정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시대에 우리는 말 그대로 세계 최고 수준의 ‘인적 자원’과 교육 인프라, 문화적인 수준과 지적인 깊이를 단숨에 갖추게 되었다.

누적되어온 ‘포텐’(잠재력)이 터졌다고 해야 할까? 대중은 적어도 이 면에서는 지극히 자발적이고 적극적이며 한마음으로 ‘개발’에 동참했다(물론 딸들을 상급학교에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못나고 가난한 가부장들이 여전히 많긴 했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이는 온갖 제도적 불합리와 방해나 모순을 뚫고 진정 아래로부터의 힘으로 이뤄진 과정이었다. 배는 곯아도 공부는 해야 한다는 그 열의와 욕망은, 물론 새로운 버전의 학벌사회를 만드는 부수적 효과를 내기도 했지만, 뭘 바라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혼연일체가 된 채로, 신앙처럼 불꽃처럼, 모든 계층과 남녀들 사이에서 타올랐다고 하는 편이 더 사실에 맞는 듯하다. 그렇지 않으면 산업체 특별학급에 다니거나 검정고시 전선에 서 있던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과 노동자·농민과 그 아들딸들의 열정을 이해할 수가 없다.

■ 학벌사회와 재수생 문제

한국의 대중지성은 정권의 폭압 속에서 커나갔다. 대학생들의 사회 모순에 대한 인식은 날카로워졌다. 대학 밖에서는 가난과 소외를 이기며 읽고 쓰는 노동자들이 생겨났다. 사진은 1970년대 대학 캠퍼스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국의 대중지성은 정권의 폭압 속에서 커나갔다. 대학생들의 사회 모순에 대한 인식은 날카로워졌다. 대학 밖에서는 가난과 소외를 이기며 읽고 쓰는 노동자들이 생겨났다. 사진은 1970년대 대학 캠퍼스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배움에 대한 위대한 한국적 열정은 유신시대에도 부작용을 낳았다. 1970년대 내내 ‘재수생 문제’가 심각했는데, 대학입시에 낙방한 재수생뿐만 아니라 고교입시나 중학입시에서 낙방한 청소년들도 문제였다. 서울 광화문(공평동과 내수동) 뒷길은 세칭 ‘재수로’라 불릴 정도로 대입 학원들이 밀집된 지역이었다. 이 동네 대폿집과 맥주집에는 대낮부터 남녀 재수생들이 담배를 꼬나물고 희희덕거리며 청춘의 고민을 불태웠으며, 동네 당구장은 물론 카바레까지 재수생들 덕에 경기가 좋았다 한다.

중학입학 무시험제도와 고교 평준화 및 학군제도가 도입되면서 1970년대 중반에는 중입·고입 재수생 문제가 차츰 해소돼 갔으나 1976학년도 대입에서 25만3000여명의 응시자 중 무려 16만명가량의 불합격자가 발생하자 다시 재수생 문제가 크게 사회 문제화되었다. 특히 박정희가 1월 문교부 업무 순시 중에 학원가 주변에 유흥장이 많아 걱정된다면서 “올해 내로 재수생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하는 바람에 1976년 내내 한국 사회 전체가 재수생 대책을 고민하고 논쟁했다. 가뜩이나 서러운 삼수생에게 대입 전형 과정에 불이익을 줘 삼수생 수를 줄이자거나, 재수생을 졸업한 고교에 등록하게 해서 진학 및 생활 지도를 받게 하자는 황당한 방안이 검토되기도 했다.

이 시절 비좁은 대학문 앞에서 와글거리며 서 있던 것은 바로 베이비붐 세대였다. 결국은 대학 입학 정원의 증원이 ‘근본적인’ 대책으로 선택됐다. 다시 말해 대학을 더 세우고 인가하여 진학률을 높이는 방안이 실행됐다. 한국 사회를 확 바꿔놓게 될 이 대책은 1978년 10월에 나왔다. 문교부는 당시 33.1%였던 대학 진학률을 53.5%까지 끌어올려 대학교육을 ‘보편화’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발표했다. 당장 1979학년도 대학 입학정원을 무려 4만9490명이나 증원하고 1980년에도 5만~7만명을 대폭 증원하기로 했다. 2년 만에 대학생 수를 10만명이나 한꺼번에 늘린다는 계획은 군사독재가 아니면 집행하기 어려운 놀라운 밀어붙이기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증원 계획은 주로 지방대학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는데 사실 지방대학에는 당장 교원과 교실이 부족했다.

문교부는 우수 교수요원 확보를 위해 서울대 등의 대학원을 대폭 확충하기로 했으며 대학교수 연구비를 20억원 증액하고 연간 200명의 교수를 해외에 파견할 계획도 세웠다. 비록 갑자기 늘어난 학생 수를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대학교수의 ‘리즈 시절’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시책 때문에 많은 대학교가 새로 태어나고 재편·승격됐다. 경기도에 인천공과대학, 전북에 우석여자대학, 부산사상공단 내에 인제의과대학이 신설됐고, 서울 소재 대학 중 ‘경영능력이 우수한 대학에 지방분교를 허가’하여 한양대는 반월공업단지, 중앙대는 안성, 동국대는 경주에 각각 분교를 설립하게 됐다. 또 기존의 초급대학 제도를 없애고 6개교를 대학으로 승격시켜 경동공업전문학교는 동의대학, 안동초대는 안동대학, 목포초대는 목포대학, 마산초대는 마산대학, 군산여자초대는 군산대학, 강릉초대는 강릉대학으로 각각 승격되었다.

그리고 지방대학 야간 정원도 크게 확대했다. 제주대, 원광대, 경남대, 관동대, 울산공대가 증원했고, 또 국가경제 발전에 필요한 인력을 양성한다는 명분으로 기초과학 및 외국어학과 등에 1만7860명을 증원했다. 수도여사대와 청주여사대는 각각 세종대학과 청주사대로 바뀌어 남녀공학이 됐다. 따라서 흔히 전두환 정권의 작품으로 오해되는 졸업정원제는 실질적으로 이때 시작된 셈이다.

■ 독서운동과 지하독서

한편 1960~1970년대에는 ‘국민개독운동’도 벌어졌다. 기독교를 믿자는 운동이 아니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모두(皆)가 독서인이 되자는 전국 규모의 책 읽기(讀) 운동이었다. 원래 민간에서 시작된 마을문고운동, 자유교양운동 등을 정부가 지원하고 관변화함으로써 독서운동에 학생과 지역민들이 강제로 동원되기도 했다. 특히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이어진 ‘대통령기 쟁탈 전국자유교양대회’는 거대한 규모였다. 절정에 달한 1974년에는 전국에서 8900여개교, 즉 전국 학교의 96%, 학생의 90%가 대회에 참가했다.

정권도 관심이 많았다. 제1회 자유교양대회 시상식부터 정일권 국무총리가 치사를 했을 뿐 아니라 매해 문교부 장관이나 국회 문공위원장이 대회에서 치사를 했다. 육영수 여사도 1970년부터 매해 상위 입상자와 학부모를 청와대로 불러 격려했다. ‘자유교양’지는 1971년 수상자와 학부모가 모인 자리에 참석한 육 여사의 동정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큰딸 근혜양이 대학입시 준비를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고전을 잘 이해하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임을 느끼셨다고 어머니로서의 체험담을 들려주셨는데 그때의 표정은 ‘퍼스트레이디’라는 말에서 풍겨나는 위엄보다는 자애와 우애로써 가득 차 있었다.”

제목에서 보듯 이 좋은 취지의 운동은 다분히 ‘유신스럽게’ 진행됐다. 마치 청룡기나 황금사자기 또는 전국체전 같은 군부독재시대의 스포츠대회를 연상하게 하는 ‘대통령기 쟁탈 전국자유교양대회’에는 전국 각 시·도에서 초·중·고 및 대학생들이 각각 학년별 ‘선수’로 참가했다. 득점이 높은 학생에게 금·은·동메달을 수여했고, 학교별로 딴 메달 득점수를 종합하여 시상하고, 시·도별 참가 학교들의 점수와 독후감 제출자 수를 합산하여 시·도별 상도 주었다. 그래서 ‘자유’로운 고전 읽기는커녕 예상문제 풀이와 선수 합숙훈련 같은 군사독재식 동원과 성과주의가 이 독서운동을 오염시켰다. 그러나 이런 관변 독서운동이 아니라도 대중의 독서력과 독서인구는 확대·확장일로에 있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지하독서’ 인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이 쏜 총탄에 맞은 바로 그날, 1974년 8월15일, 서울역에서 청량리를 오가는 지하철 1호선 첫번째 구간이 개통되었다. 연이어 지하철 1호선의 다른 구간도 개통되어 근대 대중교통과 도시사의 새 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1976년 8월13일자 경향신문은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 2주년을 맞아 지하철이 바꾼 일상풍속을 명랑한 어조로 소개했다. 종로 등 지하철역 주변의 상권이 커지고 지하철역이 새로운 데이트와 약속 장소로 쓰인다는 것. 그리고 지하철에서는 다른 대중교통 공간보다 공중도덕이 잘 지켜져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거의 없다는 것. 이어 지하철은 버스처럼 흔들리지 않고 조명도 밝아서 책뿐만 아니라 일간지나 잡지 읽기에도 좋아 서울시민들이 지하철을 탈 때면 으레 포켓북이나 읽을거리를 소지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이 ‘지하독서’의 미풍은 2000년대 말 잡스와 갤럭시의 전면 내습을 받아 전면 퇴락하기 전까지 근 40년간 한국 독서문화의 한 축을 담당했다.

박정희와 그 체제가 점점 이성을 잃고 미쳐갈 때 이처럼 새로운 대중지성과 민중주의의 지적·윤리적 토대가 만들어졌다. 박정희의 폭압과 개발주의는 대중지성과 민중주의의 성장과 불균등하고 비대칭적인 변증법적 관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1975년 이후 소위 긴급조치를 발동하면서부터 박정희와 그 일당은 검열과 반공의 칼을 휘두르며 더 미쳐 날뛰었지만 함석헌·리영희를 위시한 몇몇 저자의 책들이 청년·대학생층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유신체제에 대한 이반의 힘도 점차 커졌다. 노동자들이 두 눈을 파랗게 세상을 향해 뜨는 이야기를 담은 황석영이나 조세희의 소설도 잘 팔렸다. 대학생들은 단지 숫자만 늘어난 게 아니라 한국 사회의 모순과 그 해결 방법에 대한 인식도 날카로워졌다. 1970년대 말에 야학운동과 노동자들을 향한 지식인의 투신이 시작되었다. 광주민중항쟁의 한 주역이었던 윤상원·박기순 등의 ‘들불야학’이나 최근에 영화로 만들어져 새롭게 조명된 부산의 ‘부림’ 사건의 주역들도 이때부터 독서운동에 나섰다. 그리하여 전태일의 후배들이 드디어 책을 읽고 자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유동우·석정남처럼 전국 각지의 공장·교회·야학에서 노동자로서, 나아가 민주주의자이며 인간으로서, 가난과 소외를 이기며 읽고 쓰는 노동자들이 생겨났다.

개발연대 한국의 대중지성은 폭압 속에서 이처럼 잘 커나갔다. 그 결과 1980~1990년대의 한국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억압적이고 무식한 군사독재·반공체제가 없었다면, 한국인의 지적·문화적 역량은 더 깊고 넓어지지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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