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새마을운동과 뉴타운

2014.01.03 19:01 입력 2014.01.03 21:51 수정
황병주 |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돈 맛’으로, 욕망하는 농민을 생산하다

2008년 4월 제18대 총선에서 서울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한나라당은 무려 83%의 선거구를 휩쓸었는데 이는 보수 집권 여당의 승리로는 사상 최대였다. 이 놀라운 총선 결과의 원인은 무엇일까? 노무현 정권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크게 작용했을 테지만 직접적 이유는 ‘뉴타운 개발’이었다. 서울시장 이명박의 작품이었던 뉴타운 개발은 오직 경제적 욕망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뉴타운, 순 한글로 새마을이다.

이 욕망의 열차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출발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아담과 이브가 첫 승객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 열차가 한국 농촌마을에 도착한 시점은 대략 1970년대 언저리가 될 것이다. 1970년대 한국 농촌에는 새마을 열풍이 몰아쳤다. 새마을, 영어로 하자면 뉴타운이다.

새마을운동은 국가 주도의 농민동원 프로젝트로는 사상 최대 효과를 냈다고 보지만, 성공과 실패를 간단하게 정리하기는 애매하다. 공식적으로 새마을운동의 목표는 농촌 환경개선, 소득증대 그리고 정신혁명이었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첫 번째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으나 두 번째는 별로였고 세 번째는 도대체 계량할 방법조차 없다.

<b>뉴타운의 근원 새마을운동</b> 2000년대 뉴타운 개발에서 드러난 경제적 욕망의 연원은 1970년 새마을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농촌 주민들이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된 담장 개량 작업을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뉴타운의 근원 새마을운동 2000년대 뉴타운 개발에서 드러난 경제적 욕망의 연원은 1970년 새마을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농촌 주민들이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된 담장 개량 작업을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농촌 ‘잘살기 운동’의 출발점… 시멘트 살포

‘잘살기 운동’인 새마을운동의 성과는 농민의 농촌 탈출, 즉 이촌향도 흐름을 저지했는가를 보면 될 것이다. 농민들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살기 좋아진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몰려드는 우매한 짓을 할 까닭이 있겠는가. 그러나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극성기는 또한 이촌향도의 극성기였다. 서울인구는 1970년대 10년간 무려 300만명이 증가했다. 농민들은 국가의 선전, 방송과 언론의 호들갑에도 자신들의 삶의 육감을 더 신뢰했다. 그 감각에 따르자면 도시로 가야 했다. 1970년대 농민들은 농업, 농촌, 농민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인데 매우 정확한 판단이 아니었겠는가. 산업화가 농업, 농촌, 농민의 희생을 통해 진행된다는 것은 세계사적으로 확인된 바이다.

그럼에도 새마을운동에 대한 농민들의 반응은 상당히 인상적인 것이었다. 전국 거의 모든 마을에서 연인원 수백만명이 동원됐고 자기 농사일도 내팽개친 채 운동에 헌신하는 숱한 지도자와 이장들이 나타났다. 새마을운동의 경험을 일생일대 최고의 보람찼던 일로 기억하는 농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반응의 요인은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물질적 유인 효과가 있었다. 새마을운동의 첫 출발은 남아도는 시멘트를 모든 마을에 500포씩 살포하는 것이었다. 국가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본 적이 거의 없었던 농민들에게 이 시멘트 ‘만나’가 최초의 먹거리였음은 분명했으며 이후로도 정부 지원은 새마을운동의 최대 동력원이었다. 새마을 지도자나 이장들에 따르면 정부 지원을 따면 하고 못 따면 내년을 기약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또 하나 중요했던 것은 농민들의 자존감이었다. 단적으로 새마을운동을 통해 농민들은 국가 최고 지도자와의 동일시가 가능해졌다. 이승만과 윤보선이 왕족과 귀족 분위기를 냈다면 박정희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것을 자랑했다. 밀짚모자를 쓰고 논두렁에서 농민들과 막걸리를 나누는 대통령의 모습은 분명 생경한 것이면서도 농민들의 감동을 끌어냈음직 하다.

■ 농민을 ‘1등 국민’으로 치켜세운 파격

새마을 연수원에서는 장관을 비롯한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이름모를 시골마을의 새마을 지도자와 숙식을 함께하며 서로 동지라고 불렀다. 월간 경제동향보고 회의석상에는 매 번 새마을 지도자 한 명이 선정되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를 했다. 이름 대신 ○○댁으로 불리던 부녀 지도자들은 군수와 면장 같은 높은 분들이 자신의 이름을 호명하면서 칭찬하는 것을 듣고 말할 수 없는 희열과 보람을 느꼈다고도 했다.

나아가 박정희는 1970년대부터 농민과 농촌에 대한 열렬한 상찬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1960년대까지 농촌과 농민은 후진성의 상징으로 근대화의 제1차 대상이었기에 늘 국가와 대통령으로부터 설교조의 계몽연설을 들어야만 했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 박정희는 도시 대신 농촌을 강조했다. 도시는 서구화에 찌들어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 같은 곳이라고 비난하면서 오히려 농촌과 농민이 유구한 민족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보물창고라고 치켜세웠다. 농촌과 농민은 ‘서구화 없는 근대화’ 전략의 첨병으로 배치된 셈이었는데,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공략하는 형식은 마오주의를 닮기도 했다. 이는 산업화에 따른 새로운 사회적 적대와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민족주의 담론전략이었다. 어쨌든 농민들로서는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칭찬을 듣게 된 셈이었다. 농민들은 새마을운동을 통해 1등 국민으로 호명되었고 그 호명에 응답을 한 셈이었다.

이 밖에 여러 가지 통치기술들이 많이 동원됐다. 새마을운동의 기본 단위는 마을이었는데 전통적인 공동체의 결속력과 함께 선별 지원을 통해 마을 간 경쟁을 부추기는 전략을 펴기도 했다. 공동체적 압력을 활용하는 방식은 토지 희사와 같은 경우에 위력을 발휘했다. 새마을 사업을 위해 필요한 사유지를 마을 총회를 열어 자발적 희사 방식으로 강제 수용하는 식이었다. 박정희는 이를 마을 민주주의 또는 생활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유신의 민주주의가 새마을 열차를 타고 시골로 낙향해버린 셈이었다. 아마 상행 열차에는 농민들이 타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기본은 국가 관료제의 팽창과 강제력이었다. 1963년 1203명에 불과했던 전라북도 공무원 수는 1980년 8109명으로 늘어난 반면 같은 기간 인구는 248만명에서 223만명으로 줄어들었다. 인구가 줄어드는데도 공무원은 7배 가까이 늘어났으며 그만큼 국가 통치성이 확대 강화된 것이다. 국가 통치성은 다만 양적으로 확대된 데 그치지 않고 ‘영농과학화’란 이름의 근대적 지식권력으로 무장해 농업생산과정을 장악해 들어갔다.

면단위 지방 공무원들은 모두 담당 마을이 정해졌고 며칠씩 마을에 머물면서 새마을운동을 압박하기도 했다. 때로는 신품종 못자리가 아닌 곳을 과학이란 미명하에 장홧발로 짓밟으면서까지 농민들을 겁박했고, 나무조사와 밀주단속을 통해 농민들의 일상을 장악해 들어갔다. 마을마다 공동 퇴비장을 마련하게 하고 주기적으로 실적을 체크했는가 하면 지붕개량을 위해 반강제적으로 농협 융자를 받게 했다.

농민들이라고 순순히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퇴비장에는 나무 박스를 안에 집어넣어 눈속임을 했고 관의 눈을 피해 밀주를 담가 먹었으며 별 대안이 없었기에 산에서 몰래 나무를 해다 아궁이를 따뜻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국가와 속고 속이는 게임을 하거나 숨바꼭질은 할 수 있을지언정 정면 승부는 불가능했다. 왜 그랬는가.

무엇보다 농업 재생산 과정이 거의 완벽하게 국가와 자본의 손안에 장악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농업은 외부 간섭이 대단히 곤란한 산업이었다. 수천년간 농업은 매우 고립적이고 자기완결적인 생산과정을 영위해왔다. 그러나 산업화는 이촌향도를 부추겼을 뿐 아니라 농사 짓는 과정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종자 구입부터 농작물 판매에 이르기까지 농업은 거의 완벽하게 자본과 국가에 의해 장악되었다.

■ 국가와 자본에 완벽히 장악된 농업

이러한 변화를 상징했던 것이 1968년부터 시행된 고미가 정책과 1970년대의 녹색혁명이었다. 고미가 정책의 주된 이유는 식량문제였다. 1970년을 전후해 수입 양곡비용은 매년 10억달러를 넘나들었다. 쌀 팔아먹느라 귀하디귀한 달러를 다 써버리는 상황이었고 급기야 전경련까지 나서 고미가 정책을 주문했다. 1970년대 후반 고미가 정책이 후퇴할 때도 역시 전경련의 건의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농업조차 기업의 주문대로 경영되는 시대가 된 것이었다.

1968년 애초 7% 인상으로 책정되었던 추곡 수매가 인상률이 17%로 높아졌고 이듬해에는 22.26%까지 올라감으로써 본격적인 고미가 정책이 실시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수출 경쟁력을 위해 저임금·저곡가 유지가 불가피했기에 고미가 정책은 이중곡가제가 되었다. 그 결과 고가로 수매하여 저가로 방출하는 데 따른 적자, 즉 양특적자(양곡관리특별회계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1980년도에는 누적 적자가 1조원을 넘었다.

여기에 통일벼로 상징되는 다수확 신품종 보급이 결합되었다. 미질은 형편 없었지만 소출량이 많았던 통일벼를 정부가 고가로 매입함으로써 농가경제는 상당한 정도로 개선될 수 있었다. 이에 1970년대 중반 농가 소득이 도시가구 소득을 일시 추월하는 상황이 나타나기도 했다. 물론 이는 가구 단위로 비교한 것이고 1인당 소득으로 환산하면 농촌이 도시를 능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인당 실질 소득은 1965년 농촌이 도시의 87.7%에 달했으나 1975년에는 78.6%로 떨어졌고 이듬해에는 65.8%에 불과했다.

통일벼로 상징되는 녹색혁명은 무엇보다 돈이 많이 드는 농법이었다. 종자를 구입해야 했으며 보온못자리용 비닐도 사야 되고 병충해에 약해 농약도 많이 쳐야 했다. 게다가 비료도 더 많이 주어야 했다. 이제 돈이 없으면 농사짓는 것이 불가능했다. 농촌의 돈 문제, 즉 농업금융은 농협을 통해 장악되었다. 1970년대 초반 농가부채 중 농협의 비중은 30% 남짓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것이 1980년도에는 48.7%로 절반에 육박하더니 1990년에는 80%를 넘어섰다. 이는 곧 농협이 농민들의 돈줄을 거의 완전히 장악해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제 농사를 지으려면 종자와 함께 종잣돈도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정 하에서 농민들이 국가의 주문을 나몰라라 하는 것은 매우 곤란했다. 먹고살려면 농사를 지어야 했고 농사를 지으려면 농협 돈을 빌려야 했고 돈을 빌리자면 농협에 신용을 저당잡혀야 했다. 돈을 매개로 농민은 곧 자신의 모든 삶을 국가에 저당잡힌 셈이었다. 이로부터 농민운동의 슬로건은 농가부채 탕감, 추곡 수매가 인상과 같이 국가에 돈과 관련된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농민은 국가에 밀착되면서 또한 돈 맛을 알게 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돈 맛이 주입된 것이었다. 농민은 이제 수천 년의 관습에서 벗어나 교환가치로 모든 것이 환원되는 삶 속으로 들어서게 됐다. 실질적 포섭이란 말은 이럴 때 써야 될 것이다. 요컨대 새마을운동의 최대 성과는 욕망하는 농민의 생산이었다.

돈 맛이 주입된 농민이 도시로 향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도시에 들어온 농민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는 굳이 부연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도시에서 뉴타운에 열광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도 사족이 될 것이다. 이촌향도는 공간의 이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양식의 전면적 변화였으며 나아가 사고방식과 가치관의 근본적 변환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 모두는 뉴타운에 입주하고 싶은 이촌향도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새마을 노래의 또 다른 이름은 농민장송곡일 터이며 그 무덤으로부터 뉴타운의 욕망이 자라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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