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페미니즘, 여성해방과 양성평등을 향하여: 이효재와 조한혜정

2014.02.02 20:43 입력 2014.02.02 23:05 수정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한국 여성이 처한 겹겹의 억압 깨우친 이효재

일상·언어 속 ‘작은 폭군들’ 해부한 조한혜정

2월이 되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졸업을 앞뒀는데도 사회에 진출하지 못한 제자들 때문이다. 특히 여학생들은 안타까움을 더한다. 2011년 우리나라 대졸 이상 여성의 고용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가장 낮은 62%를 기록했고, 그 상대적 임금도 남성 임금의 68%에 불과했다.

이효재(왼쪽 사진)가 ‘한국 여성학과 여성운동의 대모’로서 학문과 운동의 영역을 아우르며 여성해방의 중요성을 일깨웠다면, 조한혜정(오른쪽)은 문화인류학자로 우리 사회의 가족관계와 가부장제를 분석하며 여성해방의 방향을 탐색해왔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효재(왼쪽 사진)가 ‘한국 여성학과 여성운동의 대모’로서 학문과 운동의 영역을 아우르며 여성해방의 중요성을 일깨웠다면, 조한혜정(오른쪽)은 문화인류학자로 우리 사회의 가족관계와 가부장제를 분석하며 여성해방의 방향을 탐색해왔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이효재
학계 최초로 ‘여성’ 변수 도입… 역사 이해 바탕한 토종이론
학문·여성운동 아우른 ‘대모’

▲ 조한혜정
가부장제와 ‘남성다움’ 비판… 문화·교육의 현주소 파헤쳐
새로운 여성 주체 구성 추구

■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

인구 절반을 차지함에도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지위는 취약하기 이를 데 없다. 극소수 커리어우먼들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만, 다수 평범한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차별받고 배제된다. 유교 윤리에 기원한 가부장제 문화 역시 여전히 공적 조직과 일상생활에 모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페미니즘(feminism)은 여성들이 처한 이러한 상황을 주목하고 여성해방과 양성평등을 모색하는 이론 및 실천을 말한다. 서구사회에서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은 모더니티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본격적으로 토론돼온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다. 그동안 자유주의·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물론 포스트모던·탈식민주의·에코 페미니즘 등 다양하게 발전해왔다.

여성 문제에 접근하는 데는 성(sex)과 젠더(gender)의 구분이 중요하다. 성이 남성과 여성 간의 해부학적 차이를 말한다면, 젠더는 양성 간에 존재하는 사회·문화적 차이를 뜻한다. 중요한 것은 이 젠더가 교육과 사회화를 통한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점이다. 한마디로 남성과 여성 간의 사회적 불평등은 타고난 게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며, 따라서 양성평등은 매우 중대한 인권과 민주주의의 과제다.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즘이 활발히 논의된 것은 1970~1980년대 여성운동과 여성학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후자의 그룹은 ‘여성사연구회’ ‘또 하나의 문화’ 등을 만들어 페미니즘 담론을 펼치고, 이를 여성운동에 접목시켜왔다. 이러한 역할을 선도해온 지식인으로 나는 사회학자 이효재와 인류학자 조한혜정을 주목하고 싶다.

■ 이효재, 운동으로서의 여성해방

이효재의 <한국의 여성운동: 어제와 오늘>과 조한혜정의 <한국의 여성과 남성>.

이효재의 <한국의 여성운동: 어제와 오늘>과 조한혜정의 <한국의 여성과 남성>.

2003년 교수신문은 <오늘의 우리 이론 어디로 가는가 : 현대 한국의 자생이론 20>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여성학을 대표하는 이로 꼽힌 이가 이효재다. 1979년 대학에 입학한 나는 옆 이화여대에서 가르치는 이효재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고 그의 글들을 읽었는데, 조형, 조한혜정과 함께 그는 내게 여성 문제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우쳐준 사회학자였다.

이효재는 1924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1957년부터 1990년까지 이화여대에서 사회학을 가르쳤다. 그의 학문적 기여에 대해선 대표적인 진보사회학자였던 김진균의 지적이 인상적이다. 김진균은 이효재의 학문적 업적으로, 첫째 우리 학계에 처음으로 여성이라는 변수를 도입하고, 둘째 여성학에서도 역사적 이해를 중시해 토종이론을 만들고, 셋째 분단 사회학을 개척한 것을 들었다.

<한국의 여성운동: 어제와 오늘>은 이효재의 대표 저작이다. 1989년 초판이 나온 이 저작은 1996년 ‘한국 여성학과 여성운동’을 덧붙인 증보판으로 다시 출간됐다. 이 책에는 근대 여성 민족운동부터 분단시대 여성운동에 이르기까지 우리 여성운동이 걸어온 과거와 나아갈 미래에 대한 이효재의 성찰 및 전망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이효재의 연구가 갖는 선구적 의미는 우리 여성이 처한 다중적 억압에 대한 계몽에 있다. 식민지배, 분단현실, 가부장제적 국가권력, 자본주의 산업화는 여성의 일방적 희생을 강제함으로써 이중삼중의 억압 아래 놓이게 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러한 현실을 넘어서기 위해 이효재는 가족과 사회의 민주화, 무엇보다 양성평등을 향한 여성운동의 능동적 역할을 강조했다.

우리 사회 사상가들 가운데 그의 시대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들이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이러한 명명이 가능한 사례들은 1960년대의 ‘김수영 시대’, 1970년대의 ‘리영희 시대’ 정도일 것이다.

여성학의 경우 1970~1980년대는 ‘이효재 시대’였다. 학문과 운동의 영역을 모두 아우르며 여성해방의 중요성을 일깨워온 그는 ‘여성학과 여성운동의 대모’라는 호칭이 참 잘 어울리는 사상가다.

■ 조한혜정, 문화로서의 여성해방

이 기획에서 가장 쓰기 어려운 글은 스승에 관한 것이다. 그 까닭은 학자인 동시에 인간으로 그를 만나왔다는 데 있다. 조한혜정이 내겐 그렇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군부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1981년 강의실에서였다. 그때부터 나는 그로부터 페미니즘과 문화 연구에 대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우리 사회의 문화적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학자다.

조한혜정은 1948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80년부터 연세대에서 인류학을 가르쳐왔다. 그의 책들 중 가장 유명한 저작은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 1·2·3이다. 이 저작들은 탈식민주의 이론에 기반해 우리 지식사회의 내면 풍경과 우리 문화 및 교육의 현주소를 날카롭게 분석해 큰 관심을 모았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책은 <한국의 여성과 남성>(1988)이다.

<한국의 여성과 남성>에서 조한혜정이 겨냥한 것은 가부장제에 대한 ‘재구성적 해체’다. 미셸 푸코가 제시한 재구성적 해체란 지식의 재생산에 적용되는 선택과 배제의 규칙들을 분석함으로써 왜곡된 현상을 인지 가능한 대상으로 전환시켜 이런 왜곡이 더 이상 이뤄지지 않도록 그 인식론적 근거를 해체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방법론에 입각해 조한혜정은 우리 사회 가부장제와 가족관계를 분석하고 ‘남성다움’을 비판하며 여성해방의 새로운 방향을 탐색한다. 그가 특히 강조한 것은 여성을 억압해온 ‘큰 폭군들’뿐만 아니라 일상·언어·감정생활에서 가부장제를 정당화해온 수많은 ‘작은 폭군들’이다. 이러한 폭군들에 대한 비판적 해부에서 그는 문화인류학자로서의 감각과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조한혜정의 사상을 지탱하는 세 기둥은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 탈식민주의다. 그의 연구가 빛나는 것은 서구 이론의 단순한 소개를 넘어서서 이를 기반으로 우리 사회에 걸맞은 여성의 새로운 주체 구성을 추구해왔다는 점이다. 그의 이러한 지적 모험이 연구실 밖으로 걸어 나와 ‘또 하나의 문화’에서 볼 수 있듯이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돼왔다는 게 제자인 내게는 더없이 큰 영향을 미쳤다.

■ 페미니즘의 미래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호주제 폐지, 전문직의 여성 비중 증가에서 볼 수 있듯이 더디지만 꾸준히 향상돼왔다. 하지만 사회 전반에서 여성은 여전히 크게 배제되고 소외되고 있다.

양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세 가지가 중요하다. 첫째, 남녀 차별 해소를 위한 고용정책이 강화돼야 한다. 많은 여성들이 경제적 목적이든 자아실현 목적이든 일하기를 원하는데도 노동시장 참여율은 매우 낮다. 또 상당수 여성 노동자는 비정규직에 종사하고 있다. 정부와 시민사회는 여성들의 안정된 일자리 창출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이를 위한 보육 및 노인 부양 등 공적 서비스를 개선해야 한다.

둘째, 여성 전문인력이 적극 활용돼야 한다. 해당 분야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전문인력이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이 아니라 ‘취집’을 한다는 것은 인력 낭비이자 국력 낭비다. 절반의 인재만으로는 세계화가 강제하는 국가 간 경쟁에 적극 대처하기 어려울뿐더러 이는 인권의 관점에서도 정당하지 않다.

셋째, 가부장제적 문화 또한 변화돼야 한다. 대부분 사회조직과 문화는 철저히 남성중심적이고, 각종 매체는 물론 일상에서도 여성은 ‘볼 수 있는 존재’라기보다 ‘보여지는 존재’로 나타난다. 이러한 가부장제적 문화가 지속되는 한 양성평등은 요원하다. 공적 영역과 더불어 가족을 포함한 사적 영역에서도 새로운 평등의 문화를 정착해야 한다.

양성평등에서 중요한 것은 태도와 의지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유보하기 시작하면 여성의 지위는 결코 나아질 수 없다. ‘지금, 여기서’의 실천이 중요하다. 여성해방과 양성평등은 21세기에 부여된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의 하나다. 이를 위한 제도 개혁과 문화 혁신은 이효재와 조한혜정의 사상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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