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의 지렛대를 피하려면

2024.05.26 20:38 입력 2024.05.26 20:40 수정

이대로 흘러가게 둘 수 없다. 우리 공영방송 이야기다. 지배구조 개편, 수신료 제도 점검, 뉴스 공정성 보장 등 해묵은 과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풀풀 냄새를 풍기며 방치되고 있다. 한때 공영방송이란 말만 나와도 부르르 떨며 갑론을박하던 자들은 어디로 갔나. 말 많고 탈 많던 공영방송은 이제 전망도 대안도 없이 무기력하게 새 국회 구성을 기다리고 있다.

제도적으로 방치되어 있건만 시민은 공영방송을 잊지 않고 있다. 공영방송 뉴스는 아직은 시민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뉴스경로 중 하나다. 옥스퍼드 로이터연구소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공영방송 제도를 운영하는 19개 국가의 응답자들 중에서 우리 시민은 공영방송의 사회적 중요성 평가를 5번째로 높게 기록했다. 어쩐지 정쟁에 몰두해온 매체정책 엘리트들만이 ‘이 계륵 같은 제도를 어찌할꼬’라는 표정을 지으며 난감해할 뿐이다.

난감한 사정이 뻔하다. 정권을 잡은 쪽은 어떻게든 공영방송을 활용해서 정치적 발언권을 확대하려 하고, 반대편은 어떻게든 집권당의 공영방송 정책과 운영에 흠집을 내어 정치적 공격의 구실로 활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서로 이 속사정을 투명하게 알고 있다. 그러다 정권이 바뀌면 역할만 주고받을 뿐 같은 정쟁을 반복한다는 것마저 알고 있다. 정치인들이야 그렇고 그런 종자라고 하자. 다만 가련한 자들이 있다면 그 뻔한 정치권에 붙어서 어떻게든 공영방송 언저리에서 한 자리라도 얻으려 기웃거리는 전현직 언론인, 교수, 변호사, 시민활동가 등이다.

자리에 관심만 있는 게 아니라면 공영방송 제도에 대한 전망과 대안이 이렇게까지 가물 수가 없다. 수신료 분리징수를 결정한 뒤 공영방송의 재원위기가 코앞에 닥쳤는데 이렇게 태평할 수가 없다. 심의위원회가 아니라 징계위원회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공영방송 뉴스에 간섭하는 내용규제기구를 보면서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다. 어쩌면 우리 공영방송 제도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남이 아니라 지인으로부터 시작한 ‘기웃거리기’로 무너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제도를 설계할 때 결국 어떤 자들이 공영방송을 운영하게 될지 주의하자. 나는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검토한 논문에서 이 문제를 ‘악인의 지렛대 현상’이라고 부르며 경계한 바 있다. 아무리 세심하게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설계한다고 해도, 특정 세력이 맘먹고 제도를 남용하겠다고 나서면 애초 설계의도를 간단하게 무력화할 수 있다는 경고를 위해 도입한 개념이다.

예컨대, 공영방송 이사 수를 늘리고, 정치권과 학술 및 사회단체들이 이사추천권을 나누어 행사하도록 제도를 정비한다고 해도 공영방송을 남용하기로 작정한 세력들이 작전을 벌이기 시작하면 소용없다. 공영방송 이사진 구성은 일거에 정치권과 단체들의 추천권 행사를 놓고 벌어지는 기묘한 기회주의적 자리다툼으로 변질될 수 있다. 아예 자리다툼 자체를 무력화하는 기이한 간섭을 초래할 수도 있다. 먼 곳에서 사례를 찾을 것도 없다. 지난 선거방송심의원회 구성과정을 기억해 보자.

나는 제안한다. 여야합의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논의할 수 있는 협의체를 구성하고, 여야동수로 전문가를 파견해서 제도개선 대안들을 구해 보자. 협의체가 공영방송 내 타협과 조정의 기회는 확대하지만, 악인의 지렛대에 저항할 수 있는 제도를 대안들로 제시하면 좋겠다. 그 대안들을 놓고 공론조사를 수행해서 시민적 숙의로 어떤 대안을 선호하는지 확인해 보자. 그리고 공론조사 결과를 참조해서 새 국회가 여야합의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방송법 개정을 추진해 보자.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한다며 허송세월한 지 수십년이다. 여야가 입장을 바꿔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남 탓을 해온 지도 벌써 몇 번째 정권인지 모른다. 제발 이번엔 잘해보자.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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