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기능올림픽

2014.02.07 19:03 입력 2014.02.07 21:59 수정
황병주 |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산업전사’들, 패자 부활의 잔혹사

방송과 언론이 소치올림픽으로 들썩이는 것을 보니 다시 올림픽 시즌이다. 올림픽의 가장 강렬한 기억은 아마 ‘쌍팔년도 올림픽’일 것이다. 담배부터 고속도로, 심지어 탱크에까지 88이란 이름이 붙었고 금메달을 목에 건 자랑스러운 ‘대한의 자식들’이 텔레비전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올림픽을 치르면서 한국은 구질구질한 1970년대와 작별하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주지하듯이 올림픽은 국가 간 경쟁의 글로벌 이벤트이다. 국가와 민족 단위로 편제된 국제질서는 1등부터 꼴찌까지 전 지구를 단일한 수직 계열화로 묶어냈고 올림픽은 그 질서의 상상적 재현 메커니즘이 되었다. 비슷한 것으로 월드컵이 있다. 양대 글로벌 이벤트에서 4등을 한 한국, 과연 선진국일런가.

여기 선진국을 향한 또 다른 올림픽이 있다. 정식 명칭은 국제직업훈련경기대회쯤 되겠지만 기능올림픽이라는 별칭이 더 유명한 이 대회는 단연 한국의 독무대이다. 1967년부터 참가하기 시작해 1977년 최초로 종합우승을 한 이래 9연패를 달성했는가 하면 2013년까지 치러진 20개 대회에서 무려 18번의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스포츠 올림픽이나 기능올림픽이나 국가별 등수를 매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한국은 독자적 순위매김에 골몰한다.

1967년 첫 출전해 종합 4위의 성적을 거둔 국제 기능올림픽 선수단이 서울 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67년 첫 출전해 종합 4위의 성적을 거둔 국제 기능올림픽 선수단이 서울 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국가·자본 의기투합 ‘민족주의 동원’

구질구질한 1970년대는 무엇보다 기능올림픽의 시대였다. 1947년 스페인에서 시작되어 1953년 제1회 국제대회가 개최된 기능올림픽에 한국이 참여하게 된 것은 1965년 유럽순방 중이던 김종필의 구상으로부터였다. 5·16 쿠데타의 구상자답게 김종필은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이었다. 중앙정보부와 공화당을 만들어내더니 자의 반 타의 반 유럽 외유길에 한눈에 반한 게 기능올림픽이었다. 귀국하자마자 김종필은 권력 2인자라는 조건을 십분 활용해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켰다. 1966년 1월 국제기능올림픽한국위원회를 만들어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고 참관인단 파견을 거쳐 1967년부터 정식으로 참가하기 시작했다.

첫 선수단의 출국신고를 받고 박정희는 훌륭한 성적을 거둔 선수에게 일생을 보장할 것을 약속했다. 처녀출전해 세계 4위의 성적을 거두고 귀국하자 범국민적 환영행사가 개최되었다. 요란한 카퍼레이드를 거쳐 서울 시민회관에서 개최된 환영대회가 국무총리 이하 9개 부처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고 대통령에게 귀국신고를 하였다. 시작과 끝은 언제나 청와대였다.

기능올림픽의 황금기는 1970년대였다. 1977년 최초로 종합우승을 했고, 1978년에는 부산 대회를 유치하였다. 종합우승을 차지하자 환영행사는 말 그대로 ‘거국적으로 거행’되었다. 카퍼레이드, 대통령 귀국신고와 함께 국립묘지 참배가 추가되었고 지역별 환영행사도 대대적으로 치러졌다. 언론과 방송 또한 연일 1면 기사로 우승 소식을 전했고 동아일보는 사설로 “조국의 번영을 몸으로 실천하고 이룩하는 역군들”이라고 칭송했다. 화룡점정은 영애 박근혜양을 대동한 박정희가 “미국 등 선진 공업국가들의 선수들과 일대일로 당당히 겨루어 종합우승한 것”을 치하하는 것이었다.

기능올림픽은 국가와 자본의 합작품이었다. 초대 김종필을 위시해 김재순, 오학진, 이낙선, 홍성철 등 1980년도까지 역대 위원장들은 김재순을 제외하고 모두 5·16 쿠데타 주역이었다. 반면 부위원장은 재벌들이 주로 맡았다. 이낙선 위원장 시절에는 럭키금성의 구자경을 위시해 이정림, 박용학 등 재계 거물들이 부위원장이었다. 실무 담당인 사무총장은 대학교수였다. 기능을 매개로 국가와 자본 그리고 지식이 삼위일체를 이룬 셈이었고 학교와 공장은 그 제도적 장치였다.

국가와 자본이 의기투합한 이유는 분명했다. 기능올림픽은 무엇보다 ‘민족중흥’이라는 민족주의 스펙터클의 훌륭한 무대였다. 양정모의 금메달 하나에 전국이 들썩일 정도였는데 기능올림픽은 종합우승을 밥먹듯이 했다. 당시까지 세계대회에서 한국이 종합우승을 차지한 것은 기능올림픽이 유일했다. 세계체제 속에서 자신의 존재증명을 하는데 이만한 호재가 없었다.

■ 가혹한 경쟁으로 탄생한 ‘국가대표’

물론 기능올림픽은 규모와 영향력 그리고 중요도 측면에서 스포츠 올림픽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월드컵과 박스컵의 차이라고나 할까. 17~22세 사이 청소년 대상의 직업교육 활성화 차원에서 시작된 대회를 몇 배로 뻥튀기하여 전 민족적 국가 이벤트로 만든 것은 박정희 체제의 민족중흥 욕망일 것이다. 어쨌든 박정희 체제에서 기능올림픽은 주관적으로 지상 최대의 제전이어야 했고 또 그렇게 ‘산업전사’들을 호명했다.

산업전사들은 무엇보다 혹독한 경쟁의 산물이었다. 기능경기대회는 기능과 스포츠를 결합시켜 최대한의 경쟁 원리를 가동시키는 방식이었다. 국가대표는 지방대회와 전국대회를 거쳐 선발되었는데 1978년의 경우 지방대회 참가 2768명 중 전국대회를 거쳐 최종 국가대표로 선발된 인원은 33명이었다. 지방대회 출전 또한 학교·기업별로 선발과정을 거쳐야 했기에 실질적으로 경쟁에 투입되는 인원은 훨씬 더 많았다.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서는 지방대회 기준으로만 83 대 1의 경쟁률이었고 실제로는 수백 대 1의 경쟁을 뚫어야 했다.

가혹한 경쟁으로 내몰린 이들의 삶의 중심에는 가난과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1994년의 조사에 따르면 거의 대부분의 메달리스트들은 극심한 빈곤으로 대학을 포기하고 공고로 진학하거나 공장에 취업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제1차 경쟁에서 패배한 셈이었다. 빈곤은 계층상승의 핵심 통로인 교육과정에서부터 저열한 위치를 강요했고 결국 ‘공돌이, 공순이’라는 하층의 삶으로 퇴적되어야 할 운명이었다. 이들을 시장의 경쟁 메커니즘으로 회수할 수 있다면 사회전체를 자유경쟁으로 동원할 수 있을 터였다.

■ 계층상승 욕망 불지핀 ‘달콤한 약속’

박정희 체제는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를 위해 기계공고, 시범공고, 특성화공고 등을 집중적으로 설립해 기능인력을 대규모로 양성하고자 했다. 이들이 기능올림픽의 주요 자원이었고 혹독한 경쟁의 주역이었다. 가정형편상 국비 지원이 되는 공고로 진학한 어느 금메달리스트의 회고에 따르면 “매우 어둡고 적막한 학교 건물 지하 3층 창고에서 오랜 기간 집중 훈련”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심신이 피로한 것은 둘째치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힘들었다”고 고백하면서 “여기에서 이겼기 때문에 지방대회, 전국대회, 국제대회에서 일등을 할 수 있었다”고 기억했다. 또 다른 금메달리스트는 3년 반 동안 밤 10시까지 이어지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빈곤은 제1차 경쟁의 탈락자들을 만들어냈지만 그 빈곤을 벗어나는 길 또한 또 다른 경쟁, 패자부활전이었다.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 셈이었는데, 그만큼 더욱 절박했고 이를 잡기 위한 피나는 자기계발이 요구된 것이었다.

이 계층상승 욕망에 불을 지핀 것은 국가의 달콤한 약속이었다. 박정희는 첫 종합우승을 치하하는 자리에서 “비록 여러분이 상급학교에 진학 못했다고 하더라도 노력만 하면 학문과 이론을 배울 수 있도록 대학에 진학하는 길도 터놓았다”고 강조했다. 화려한 축하 파티에서 산업전사들의 깊은 트라우마를 건드린 셈이었는데, 기능대학이 그 치유제가 될 수 있을는지는 본인조차 믿기 힘들었을 것이다.

밤을 새워 손가락이 잘려나갈 위험 속에 선반과 씨름하고 살갗에 불꽃이 튀기는 용접을 배웠건만 그 결과는 그리 신통치 않았다. 평생을 책임지겠다던 대통령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1994년 조사에 따르면 100명의 조사대상 메달리스트 중 10여명이 해외 이민을 떠난 상황이었고 설문에 응한 32명 중 동일 분야에서 계속 일하고 있는 사람은 불과 9명에 그쳤다.(<한국인의 장인의식>, 한국개발연구원)

메달리스트들은 실제 보상이 거의 없었거나 매우 미흡했다고 토로했다. 특히 스포츠 올림픽 수상자들과의 형평성 문제를 공통적으로 거론했다. 연금제도도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열악했고 직장에서의 대우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했다. 게다가 기능올림픽으로 ‘숭문천공(崇文賤工)’의 풍조가 바뀌었다고 선전해댔지만 어느 금메달리스트는 “기능인 천시사상이 결코 개선되리라고 보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얘기”라고 단언했다. 요컨대 기능올림픽 금메달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평등을 가져올 수는 없었다. 대신 혹독한 경쟁과 훈련을 통해 굶어죽을 자유와 계층상승의 자유 사이로 내몰렸던 것이다.

이 자유로운 개인은 민족중흥을 내세운 대대적인 민족주의 동원전략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어디까지나 나 자신을 위해 땀 흘린다고 생각”하는 주체이기도 했다. 국가의 대대적 동원 속에 ‘국가대표’가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위한 고독한 경쟁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이 메달리스트야말로 자유주의가 기대하는 개인의 모습에 가까웠다. 이들은 국가주의적 집단 주체로 호명된 국가대표이자 경쟁의 쓴맛을 본 개인이기도 했다. 패배의 열패감을 ‘기술 하나 배워두면 밥은 굶지 않는다’는 근대적 격언으로 무마하면서 새로운 기회의 평등, 또 다른 경쟁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현재 이 전사의 후예들은 국가대표이자 삼성과 현대 선수단의 일원으로 기능올림픽에 참가한다. ‘배워서 남 주나’라는 삶의 교훈은 살인적인 취업난 속에 배워서 기업에 줘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스스로를 시장의 고독한 개인으로 구성해 낸 이 전사의 후예들은 과연 패자부활전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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