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진보주의, 사상의 과잉과 정치의 빈곤: 조희연과 김상조

2014.03.02 21:34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이론·실천 결합’ 사회운동 방향 제시한 조희연
‘명민한 분석’ 한국 경제 개혁 처방 내린 김상조

이념구도를 지칭하는 말로는 보수 대 진보, 우파 대 좌파가 흔히 쓰인다. 주목할 것은 보수와 우파, 진보와 좌파가 언제나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구(舊)소련과 같은 국가사회주의의 경우 20세기 전반에는 진보적 성격을 보여줬지만, 20세기 후반에는 보수적 성격이 두드러졌다. 이렇듯 경우에 따라선 ‘보수적 좌파’ ‘진보적 우파’라는 말도 가능하다. 이념구도가 갖는 이러한 특징을 말하는 것은, 이 기획이 오늘날의 진보주의와 보수주의를 다룬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다.

조희연(왼쪽 사진)이 민주화 시대의 시민운동론 제시, 진보주의의 패러다임 모색 등 거대담론을 제시했다면 김상조(오른쪽)는 재벌 개혁, 소액주주 운동 등 미시적인 정책 대안 마련에 주력해왔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조희연(왼쪽 사진)이 민주화 시대의 시민운동론 제시, 진보주의의 패러다임 모색 등 거대담론을 제시했다면 김상조(오른쪽)는 재벌 개혁, 소액주주 운동 등 미시적인 정책 대안 마련에 주력해왔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조희연
최근 급진 민주주의 주창… 진보 패러다임의 진화 모색
진보 정신에 가장 충실해

▲ 김상조
경험적 분석·법 개혁 우선시… 신자유주의 비판·대안 제시
‘공정 경제’ 향한 남다른 열정

■ 진보주의란 무엇인가

진보주의란 변화를 통해 더 나은 삶과 사회를 모색하려는 사상적·정치적 기획을 통칭한다. 근대 이후 진보주의는 17·18세기의 계몽주의와 19세기의 마르크스주의로 대표됐고, 20세기에 들어와선 ‘자본주의 안의 개혁’(사회민주주의)과 ‘자본주의 밖의 혁명’(사회주의)으로 분화되고 발전해 왔다. 오늘날의 진보주의는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미국의 진보적 자유주의, 중국의 시장사회주의 그리고 생태주의·페미니즘 등을 포함한 급진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에서 진보주의 담론은 드라마틱한 역사를 갖는다. 1950년대 냉전분단체제가 공고화되면서 불허됐던 진보주의는 1970년대 이후 박현채의 ‘민중경제론’, 한완상의 ‘민중사회학’ 등을 통해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고, 1980년대를 뜨겁게 달군 ‘사회구성체 논쟁’을 거치면서 학문적 시민권을 얻었다. 2000년 재일 지식인 윤건차는 한국 진보주의 지식인들을 ‘구좌파적 마르크스주의’ ‘신좌파적 마르크스주의’ ‘알튀세르적 마르크스주의’ ‘좌파적 시민사회론’ ‘급진적 민주주의론’ ‘진보적 민족주의론’ 등으로 분류했는데, 1987년 민주화 시대가 열린 이후 짧은 기간 안에 진보주의는 이론적 르네상스를 맞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한국 진보주의의 풍경을 나는 ‘사상의 과잉’이라고 묘사하고 싶다. 여기서 과잉이란 부정적 뉘앙스를 갖는다기보다는 차고 넘친다는 의미다. 흥미로운 것은, 진보 사상이 이렇게 차고 넘쳤던 것에 반해 진보 정치는 상대적으로 빈곤한 모습을 보여 왔다는 점이다. 그동안 진보주의를 대표해온 지식인들은 결코 적지 않다. 여기서 나는 두 사람을 주목하고 싶다. 사회학자 조희연과 경제학자 김상조가 그들이다.

■ 조희연, 진보적 사회운동의 사회학자

조희연의 <비정상성에 대한 저항에서 정상성에 대한 저항으로>와 김상조의 <종횡무진 한국경제>.

조희연의 <비정상성에 대한 저항에서 정상성에 대한 저항으로>와 김상조의 <종횡무진 한국경제>.

진보주의의 핵심이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열망에 있다면, 이런 진보의 정신에 가장 충실한 지식인은 조희연이라고 늘 생각해 왔다. 세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첫째, 그는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의 한 주역을 담당했다. 둘째, 민주화 시대를 이끈 시민운동의 이론적 지반인 ‘진보적 시민운동론’을 제시했다. 셋째, 최근 급진 민주주의를 주창해 진보주의 패러다임의 진화를 모색하고 있다.

조희연은 1956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성공회대에서 사회학을 가르쳐온 동시에 지난 30년 동안 진보적 학술운동을 주도해 왔다.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결합이 진보 지식인의 미덕이라면, 이를 우리 사회에서 조희연만큼 보여준 지식인은 없다.

조희연의 진보주의에는 여러 사상적 전통이 결합돼 있다. 카를 마르크스에서 밥 제솝으로 이어지는 네오 마르크스주의, 국가에 맞서 시민사회의 저항성을 부각시키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시민사회론,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하고 ‘우리 안의 보편성’을 주목하는 한국적 사회과학 방법론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마르크스가 염원한 인간해방과 그람시가 추구한 대항 헤게모니는 그의 이념을 지탱하는 양대 지주다.

조희연의 대표작은 <비정상성에 대한 저항에서 정상성에 대한 저항으로>(2004)이다. 우리 사회 사회운동이 ‘개발독재적 예외국가’의 비정상성에 대한 투쟁에서 출발했다면, 이제 자본주의적 정상성을 특징짓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에 주력해야 한다는 게 이 책의 메시지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적 정상성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비정상성들인 노동 유연화, 비정규직 증가, 성 차별, 환경 파괴, 장애인 및 동성애자 차별 등에 저항하는 급진 민주주의 기획을 조희연은 진보적 사회운동의 새로운 방향으로 제시한다.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과 실천을 연구하는 데 정치학자와 사회학자 사이에는 주목할 만한 차이가 존재한다. 정치학자들은 정당정치와 같은 제도정치를 중시하는 반면, 사회학자들은 노동운동·시민운동으로 대변되는 운동정치에 주목한다. 한걸음 물러서서 볼 때, 소망스러운 민주주의를 성취하기 위해선 위르겐 하버마스가 말한 ‘쌍선적 심의정치’, 즉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새로운 결합이 요구된다. 조희연이 제도정치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당정치와 사회운동의 생산적 결합은 더욱 강조될 필요가 있다.

■ 김상조, 신자유주의 비판의 경제학자

개인적으로 소중한 체험의 하나는 참여연대에서 일했던 경험이다. 1994년 창립된 참여연대에는 소장 학자들이 대거 참여했는데, 장하성·조희연·김동춘·김상조 등이 그들이었다. 그때 처음 만난 김상조는 두 가지 점에서 내게 이채로웠다. 하나가 경제개혁에 대한 그의 열정이었다면, 다른 하나는 한국 경제를 분석하는 그의 명민함이었다. ‘분별 있는 열정’을 갖춘 경제학자가 다름 아닌 김상조다.

김상조는 1962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났다. 한성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쳐 왔고, 경제전문 시민단체인 경제개혁연대를 이끌어 왔다. 우리 사회에서 김상조라는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장하성과 함께 벌인 소액주주운동이었다. 소액주주운동을 비판하는 진보적 경제학자들도 적지 않았지만, 이 운동을 통해 그는 ‘재벌개혁의 전도사’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우리 사회에서 진보주의 경제학은 크게 마르크스주의 경제학과 케인스주의 경제학으로 나뉜다. 김수행이 전자 그룹을 대표한다면, 김상조는 후자 그룹에 속한다. 경제학자답게 그는 사실과 통계를 중시하며, 거대 담론보다 경험적 분석과 구체적인 법 개혁을 우선시한다.

<종횡무진 한국경제>(2012)는 김상조의 대표작이다. 이 책은 제도학파의 ‘경로의존성’과 ‘제도적 상호보완성’이라는 개념에 의거해 거대 담론에서 미시 정책에 이르는 한국 경제의 종단과 재벌·중소기업·금융·노동의 구조분석 및 개혁 방향을 포괄하는 한국 경제의 횡단을 탁월하게 분석한다. 한국 경제에 대한 그의 대안은 신자유주의의 극복과 구자유주의의 확립에 있다. 그의 이러한 처방은 경제민주화를 구현하기 위한 제도 개혁과 정책 대안으로 구체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아 마땅하다.

김상조는 정말 똑똑하고 유쾌하기까지 한 경제학자다. 공정한 경제와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그의 남다른 열정이 학자로서의 연구 시간을 적잖이 앗아간 것으로 보여 내심 안타까웠다. 어떤 이는 김상조식 대안이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비판할지 모른다. 하지만 역사에 비약은 없다. 재벌개혁이든 금융개혁이든 한걸음 한걸음의 실천과 그 누적이 더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하는 편이다.

■ 진보주의의 미래

진보주의 사상이 풍요로운 것에 비해 진보주의 정치는 허약한 게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시민사회에는 보수 대 진보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있는 반면, 정치사회에서는 진보의 정치적 대표성이 제대로 발휘되고 있지 못한 게 진보 정치세력이 놓인 현주소다.

이러한 ‘정치의 빈곤’을 낳아온 요인은 여럿이다. 민주당이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못한 채 중도와 진보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보여온 게 한 요인이라면, 민주노동당 해체 이후 진보 정치세력의 이합집산에 따른 실망은 또 다른 요인이다. 여기에 더하여 세계화와 정보사회의 진전이라는 구조적 조건의 변화에 대응하는 새로운 정책 대안의 모색에도 적극적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진보의 핵심을 이루는 가치는 시장의 적절한 제어, 사회적 약자의 보호, 개인적 자율과 공동체적 연대의 생산적 결합에 있다. 앤서니 기든스가 강조하듯, 정책의 혁신만이 진보의 가치를 지킬 수 있다. 더불어 신자유주의 극복, 복지국가 구축의 진보정책에 동의하는 정치세력이라면 작은 차이를 넘어선 큰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 그것이 정치다. 이 목표를 향해 가는 도정에서 조희연과 김상조의 연구는 새로운 자극과 격려를 계속 안겨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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