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밖으로부터의 시선: 장하준과 신기욱

2014.03.16 21:10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창의적 접목 모색한 장하준 통일 한국 근간 ‘통합의 민족주의’ 제시한 신기욱

지식인이 자신이 태어난 곳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활동하는 것은 인류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 고대 그리스 지식인들은 지중해 각 지역에서 자유롭게 활동했다. 중국에서도 춘추전국시대에 지식인들은 여러 나라를 유랑하면서 자신의 학설을 왕성하게 펼쳤다. 지식이 본래 보편성을 고유한 속성으로 갖듯이 지식인 역시 출발부터 세계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경제학자 장하준(왼쪽 사진)이 선진국 경제발전의 진실을 추적하고 그 통념에 이의를 제기했다면, 사회학자 신기욱(오른쪽)은 민주주의의 상상력에 기반을 두고 민족주의의 방향을 제시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경제학자 장하준(왼쪽 사진)이 선진국 경제발전의 진실을 추적하고 그 통념에 이의를 제기했다면, 사회학자 신기욱(오른쪽)은 민주주의의 상상력에 기반을 두고 민족주의의 방향을 제시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장하준
통념의 경제학에 이의 제기… 맹신적 신자유주의 비판
미국발 금융위기 때 큰 울림

▲ 신기욱
민주 사회의 평등 시민으로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상상
다문화사회 수용 해법 제공

■ 밖에서 본 한국 사회

이런 지식과 지식인의 세계성을 생각할 때면 떠오르는 말이 있다. “자기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상냥한 초보자다. 모든 땅을 자신의 고향으로 보는 사람은 이미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하나의 타향으로 보는 사람은 완벽하다.” 12세기에 활동했던 성 빅토르 수도원의 위고가 남긴 말이다.

지식인이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 이 말만큼 정확하게 표현한 언설도 없다. 이 말에 담긴 의미는 분석 대상인 사회에 대해 지식인이 가져야 할 거리와 그 거리 속에서 이뤄져야 할 성찰의 중요성에 있다. 자기가 속한 사회를 벗어나 자기 사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지식인은 비로소 독자적인 비교와 분석의 관점을 가질 수 있다.

돌아보면 한국 사회와 서구 사회의 비교 분석, 동아시아와 서구 사회의 비교 분석은 우리 사회 대다수 사회과학 연구들의 출발점이었다. 우리 사회 모더니티와 동아시아 모더니티, 그리고 서구 사회 모더니티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이 유사성과 차이를 규명하는 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를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바람직한 미래를 위한 방향 모색과 정책 개발에 유용한 통찰을 안겨주기도 한다.

최근 우리 사회 밖에서 활동하는 우리나라 출신의 지식인들은 결코 적지 않다. 이제 이 기획은 이들의 연구를 살펴보고자 한다. 밖에서 활동하되 이들은 국내 지식사회에 작지 않은 지적 자극을 안겨주고 영향을 미쳤다. 여기서 나는 두 사회과학자를 주목하고자 한다. 영국에서 활동해온 경제학자 장하준과 미국에서 활동해온 사회학자 신기욱이 그들이다.

■ 장하준, 발전국가의 민주적 재구성

장하준의 <사다리 걷어차기>와 신기욱의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

장하준의 <사다리 걷어차기>와 신기욱의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

지식인이 어떤 상을 받았는지가 그를 평가하는 데 일차적 기준은 아니지만 그의 업적을 살펴보는 데는 나름 유용하다. 장하준은 뮈르달상(2003)과 레온티에프상(2005)을 연거푸 수상함으로써 40대 초반에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경제학자가 됐다. 그는 또 베스트셀러 작가다. 우리 사회에서 경제학자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 어려운데, <사다리 걷어차기> <쾌도난마 한국경제> <나쁜 사마리아인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등 그의 책들은 발표될 때마다 큰 화제를 불러모았다.

장하준은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를 졸업한 후 영국으로 건너가 경제학을 공부한 다음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를 맡아 왔다. <사다리 걷어차기>(원제는 Kicking away the Ladder, 2002)는 장하준이란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린 책이다.

이 책은 야심만만한 저작이다. 경제학의 일반적인 생각들, 예컨대 재산권 보호가 경제발전의 전제이고, 적극적 산업정책이 결국 경제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며, 신자유주의가 경제성장을 이뤄낼 수 있다는 가정들에 대해 그는 역사적 진실을 추적하고 그 통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미국 등 주요 선진국들은 시장주의나 자유무역이 아니라 국가 개입과 보호무역을 통해 선진국이 됐고, ‘사다리 걷어차기’를 통해 후진국과의 경제적 격차를 유지해 왔다는 게 장하준의 주장이다. 그는 비교역사적 관점에서 산업·무역·기술 정책을 주목하는 동시에 제도와 경제발전의 상호관계를 분석함으로써 과연 우리는 선진국의 경제발전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탐색한다.

이런 장하준의 결론은 한 시대를 풍미해온 신자유주의 교리에 대한 신뢰가 기실 근거 없는 맹목적 믿음에 불과하고, 경제적 성공이 아닌 실패로 귀결될 것임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지켜볼 때 그의 신자유주의 비판은 그 울림이 자못 컸던 것으로 보인다.

<사다리 걷어차기> 이후 일련의 저작에서 장하준이 제시한 대안은 사회적 타협을 일궈낸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의 창의적 적용과 새로운 산업·무역·기술 정책의 모색이다. 이른바 ‘발전국가의 민주적 재구성’이라 부를 수 있는 이 대안은 세계화의 구조적 강제 속에서 한국 경제가 나아갈 방향의 하나로 진지하게 검토할 만한 가치를 갖는다. 더불어, 전문적 글쓰기와 대중적 글쓰기를 적절히 결합시키는 그의 책들이 경제학의 시민적 계몽에도 남다른 기여를 해왔다는 점 또한 특기할 만하다.

■ 신기욱, 민족주의의 성찰적 반성

다른 나라에서 우리 역사와 사회를 연구하는 분야를 한국학이라 부른다. 유럽 대학의 경우 한국 사회 연구에 관심이 있지만, 미국 대학만큼 활발하지는 않다. 오랜 한·미관계의 역사와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자연스레 한국학을 활성화시켰다. 신기욱은 브루스 커밍스, 제임스 팔레 등에 이어 미국에서 활동해온 대표적인 한국학자이자 동아시아 국제관계 전문가다.

신기욱은 1961년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났다. 연세대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사회학을 공부한 다음 아이오와대 교수와 캘리포니아대(로스앤젤레스 분교) 교수를 거쳐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와 아·태연구소 소장을 맡아 왔다. 사회학자로 학문의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최근에는 한·미관계와 동아시아 전문가로 널리 알려졌다.

우리 사회와 연관해 주목할 그의 저작들은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 <하나의 동맹, 두 개의 렌즈>다.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원제는 Ethnic Nationalism in Korea, 2006)는 학문적으로도 뛰어나고 현실적 함의 또한 풍부한 그의 대표작이다. 민족주의의 다양한 이론적 토론을 바탕으로 한국 민족주의의 역사·정치·유산을 검토하는 이 책은 다른 나라 언어로 쓰인 우리 사회에 대한 가장 탁월한 저작의 하나다.

신기욱은 한국의 민족주의를 ‘종족적 민족주의’로 파악한다. 혈통과 인종이라는 생물학적 특성을 강조하는 종족적 민족주의는 양면성을 갖는다.

한편에서 그것은 반식민주의와 반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했을 뿐만 아니라 산업화를 위한 ‘개발 윤리’의 기초를 이뤘고, 통일과정에서도 통합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것은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정체성들을 주변화시키거나 억압함으로써 인권과 시민권의 침해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신기욱이 제시하는 해법은 민주주의의 상상력이다. 민족주의가 자신에 내재된 배타성과 억압성을 해소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민주적 정치조직의 평등한 시민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상상할 수 있게 해야 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게 그의 메시지다. 다문화사회의 도래에 주목할 때 극복해야 할 인종적 민족주의에 대한, 미래의 통일 한국이 가져야 할 통합의 민족주의에 대한 신기욱의 충고는 이론적·실천적으로 숙고할 만한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 한국 사회의 미래

내년이면 해방 70년이 된다. 돌아보면 70년에 가까운 지난 시간, 우리 사회에 부여된 두 개의 과제는 산업화와 민주화였다. 세계시간 속에서 뒤처졌던 만큼 그것은 ‘추격산업화’와 ‘추격민주화’로 진행됐다. 추격산업화가 성장에 모든 것을 거는 전략으로 나타났다면, 추격민주화는 군부권위주의를 해체시키고 민주주의의 절차와 내용을 뿌리내리려는 기획으로 나타났다.

그동안 우리의 산업화와 민주화는 비서구 사회에서 모더니티를 성취한 모범 사례로 꼽혀 왔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가 하는 게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대한 문제의 하나는 시대정신의 부재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설 새로운 시대정신은 이제 당연히 복지국가와 통일이 돼야 한다. 이는 규범적 지향인 동시에 현실적 목표다.

장하준과 신기욱의 연구가 갖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사회가 어떤 경제와 사회를 일궈나가고, 어떤 국가비전을 모색해야 하는지에 대해 두 사람은 비록 밖에 있지만 안에 있는 이들이 경청할 만한 조언과 충고를 안겨준다. 전 세계를 고향인 동시에 타향으로 봐야 하는 지식인의 태도에서도 장하준과 신기욱은 후학들에게 한 모범을 제시해주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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