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세계화 대안 제시하는 원톄쥔 중국 런민대 교수

2014.06.09 21:51 입력 2014.06.09 21:55 수정
글 안희경 재미저널리스트·사진 안선영 사진작가

“중국은 서구 시스템 그대로 베끼지 않고 반드시 ‘중국화’ 노력”

“북한의 몰락은 이데올로기 문제 아닌 농업의 과도한 산업화”

‘문명, 그 길을 묻다’가 종반으로 달려간다. 그동안 서구 학자 9명과 대담했다. 서구 지성들과 이 시대의 문제, 그 속에서 자유롭지 않은 우리 한반도의 의제 등을 주고받았다. 그러면서 하나로 수렴되어 가는 지점을 살갗이 벗겨지듯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세계의 수많은 양심들이 외치는 “반세계화 저항”의 엄중함이다. 세계화의 물결이 얼마나 깊게 일부의 이익을 옹호하는지, 얼마나 은밀하게 다수의 희생을 만들어 왔는지 물밑의 거센 흐름이 다가왔다.

1990년대 우리 국민의 의식을 자극했던 공익광고가 하나 있다. 주부는 자기 경쟁 상대가 싱가포르 주부라고 했고, 노동자는 자신의 경쟁 상대가 일본 노동자임을 환하게 주장하였다. 그때는 시장의 규제를 풀어주는 작은 정부, 세계화,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는 메시지를 무한 반복해 재생하였다. 그 환상적 메시지의 속뜻은 20년이 지난 뒤에야 드러났다. 자본이 값싼 시간제 임금을 찾아 국경 없이 흘러가는 세계화 시대는 자긍심 높은 한국 선박 노동자의 경쟁 상대가 비숙련 필리핀 노동자라는 사실을 한국 공장의 구조조정과 함께 알려 주었다. 발랄한 주부의 미래 역시 공공시설이 갖춰지고 물가가 안정된 선진국의 주부가 아니라 장바구니 물가가 춤을 추고 학원비가 없어 자식의 미래를 불안해하는 중년으로 귀결됐다. 돈이 되는 곳이라면 어디든 향하는 재벌의 권력은 빵집, 학원, 정육점까지 갈래갈래 스며든다.

이에 서구의 지성들은 이 지면을 통해 자원을 고갈시키고 인간의 정을 메마르게 하는 세계화의 물결에 왜 우리가 저항해야 하는지 호소했다. 그래야 이 문명이 지속가능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번에는 아시아의 저항을 조직하며 세계화 속에서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원톄쥔(溫鐵軍) 런민(人民)대 교수를 만난다. 현재 문명의 중심 축이자 오랜 역사와 문화의 저력을 갖는 아시아의 입장에서 우리 시대를 살펴 보고자 한다. 미국과 더불어 ‘G2’로 부상하면서 우리의 관심을 받는 중국이지만, 과연 우리가 아는 중국은 어디까지인지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도 되리라 여긴다. 우리와 밀접한 문화를 가진 지역의 학자이기에 또 다른 상상력의 싹을 틔워주지 않을까 싶다. 원톄쥔 교수와의 대담은 지난달 22일 베이징 런민대 연구실에서 가졌다.

원톄쥔 교수는 1980년대 세계은행이 중국 경제 시스템을 신자유주의로 변화시키고자 할 때 중국 측 정책 담당자였다. 당시 그는 지역을 대상으로 새로운 변화를 실험한 결과 ‘서구 방식을 복제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원톄쥔 교수는 1980년대 세계은행이 중국 경제 시스템을 신자유주의로 변화시키고자 할 때 중국 측 정책 담당자였다. 당시 그는 지역을 대상으로 새로운 변화를 실험한 결과 ‘서구 방식을 복제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 80년대 세계은행, 중국 정치·금융서구식으로 바꾸려 했지만
중국 정부는 지역 상황에 맞는 실험 거쳐 ‘정책 현지화’ 이뤄
현재 주류 자본, 실험 없이 복제만

▲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가 아냐… 금융자본 이익집단 보호하는 것
금융자본은 국경을 없애려 해
‘세계화’라는 탈국가적 비전 우리가 누군지 잊게 만들어

안희경 = 중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요즘 반응이 “중국이 원래 강대국이었지”라는 것입니다.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고 그 다음은 중국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신자유주의의 첨예한 경쟁 속에서도 안정적인 성장을 이룬 배경이 무엇인지요?

원톄쥔 = 1980년대에 세계은행은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로 중국 시스템을 바꾸려 했습니다. 그때 제가 시스템 변화를 주도하는 중국 측 담당자 중 한 명이었는데, 5년 동안 아주 많은 요구에 부응하려고 많은 토론을 했죠. 서구 정책을 그대로 이식하려면 중앙 권력을 지역으로 넘겨야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고 중국적인 방식을 시도했습니다. 미국의 정책과 제도, 미국의 생각까지 도입할 계획이었는데 우리는 이를 지역에서 선택하도록 하자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역에 나가 실험하고 기록하며 결론을 찾았죠. ‘서구 방식을 복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은 매우 큰 대륙에 각기 다른 민족들이 살아요. 무엇이 되었든 단일한 사상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단계로는 어떤 제도를 마련할지 지역에서 실험하며 5년을 더 보냈습니다.

안 = 무슨 시도를 했나요?

원 = 세계은행이 요구하는 모든 시도였어요. 서구 금융 시스템을 도입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2억4000만가구를 감당할 상업은행이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시장 시스템을 복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유시장이죠. 2억4000만가구는 대부분 소자산에다 다양한 품목을 생산하는데 단일하게 표준화된 시장 시스템이 감당할 수 있을까요? 시장도 실패했습니다. 그 다음 정치 시스템을 베끼라고 했어요. 자유선거 민주주의 시스템입니다. 이도 80%나 실패했습니다.

안 = 민주주의 선거 시스템이 실패했다니 부정선거라도 있었나요?

원 = 중국은 많은 촌락에 대가족이 모여 삽니다. 그곳에 자유선거 같은 권리를 주면 민주주의가 될까요? 한 집안이 모든 권리를 독점할 겁니다. 그렇게 300만 촌락이 있습니다. 아주 많은 시도를 하며 1986년부터 1997년까지 11년 동안 길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냈죠. 미국과 세계은행이 요구하는 방식은 이뤄질 수 없는 거라구요. 세계은행은 많은 우수한 학자들을 동원해서 밀어붙이고 싶어했습니다만, 데이터를 놓고 토론하자 그들이 방식을 수정했습니다. 세계은행 대출 사례 가운데 중국이 가장 성공적일 겁니다.

안 = 무엇을 선택했나요?

원 = 지역 상황을 더 고려하며 지원했습니다. 1990년대에는 도시보다 농촌을 많이 지원했어요. 국유화가 아닌 집단소유로 마을이 이익을 얻고 이를 주민들이 다시 나눠가졌죠.

안 =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에서 산업화는 곧 도시화로 이어졌습니다. 농촌에서 이주해온 다수의 노동력이 발전의 동력이 됐죠. 중국도 대규모 공업단지로부터 성장한 것 아닌가요?

원 = 그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현재 중국의 주류 자본그룹은 이전과 달리 어떤 실험도 하지 않으며 신자유주의를 복제하려 하죠. 그들은 이익집단입니다. 1980년대부터 있었지만 그때는 세력이 분명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대부분 사원 전체의 공동소유로 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당신이 은행 대표거나 자동차회사 대표라 해도 그리 분명하게 대표성을 갖는 것이 아니었어요. 소유권이 모든 이에게 있으니까요. 그 뒤 복합소유제로 전환되었습니다. 어떤 종류의 이익집단은 금융자본을 갖고, 또 대표성도 갖게 됐죠. 그들은 고위 공무원, 정치인, 금융자본 이익집단을 대표합니다. 지금은 이 이익집단이 전보다 많이 정책에 영향을 끼치고 있어서 중국은 중앙부터 일종의 재조정이 필요해요. 정치국은 어떤 이익집단에 대해 입장을 확실히 취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중국 시스템입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중국은 무엇을 택하든지 이를 지역 상황에 반드시 적용시켜야 했다는 겁니다. 그것이 중국식입니다. 그래서 중국이 신자유주의의 한 축을 이루면서도, 지역을 들여다보면 신자유주의라고 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지역도 똑같은 곳이 없죠. 많은 부분을 중국식으로 바꿔냈어요.

안 = 하지만 자본은 빠르게 세계 구석구석을 돌고 있습니다. 이윤을 얻는다면 어디라도 가죠. 중국 안에서도 임금이 낮은 곳으로 옮겨 다닐 텐데요.

원 = 그래요. 그것이 신자유주의죠.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가 아니라 특정한 금융자본 이익집단을 보호하는 겁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다 내주도록 만듭니다. 금융그룹을 만들어 우리 천연자원에서 나온 이익까지 싹 쓸어가려 하죠. 노동력 자원까지도요. 제가 공장에서 신발을 만든다면 어떻게 영향을 받을까요? 스마일 곡선이라고 있습니다.

안 = 스마일 곡선 하면 애플사가 떠오릅니다. 상품에 대한 아이디어와 기술이 뛰어난 애플이 제조는 팍스콘에 맡기고 마케팅은 직접 담당하면서 팍스콘은 이윤이 적고 변동이 없지만, 애플은 영업 이익이 급격히 늘었죠. 그래서 초기 상품 아이디어 디자인이나 후기 마케팅 분야를 담당해야 돈을 번다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원 = 네, 스마일 모양의 곡선에서 오른쪽 제일 꼭대기에는 금융 분야가 있어요. 반대쪽에는 가스나 원유 같은 천연자원이 있지요. 그리고 금융 자본은 초국가 기업을 갖고 있습니다. 금융 자본이 초국가 기업에 투자해 석유가 됐든 광산이 됐든 관장하도록 밀어줍니다. 세계의 자원 80% 이상이 초국가 기업에 의해 관리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매우 싼 금융 자본을 미국, EU, 일본으로부터 얻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이든 중국이든 외국의 투자를 허락하면 땅, 공기, 물 할 것 없이 초국가 기업을 통해 빠져나가게 돼있어요. 이것이 스마일 곡선입니다. 초국가 기업은 자신들이 관리하는 천연자원의 값을 올릴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신발 공장을 한다면 거기에 필요한 석유를 비싸게 사와야 하죠. 그러면 스마일 곡선 바닥에 있는 제조업은 수입이 줄고 초국가 기업은 이윤이 늘면서 그 돈은 다시 금융 자본에 넘어갑니다. 이 곡선에서 나라별 위치가 다른데 미국이 최고 위치에 있고 다음이 러시아입니다. 러시아가 엄청난 양의 가스와 석유, 천연자원을 관장하는 주권을 갖고 있기 때문인데 푸틴이 70% 주민의 지지를 받는 것도 그 주권을 다시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스마일 곡선 바닥에 있습니다. 게다가 제조업체는 100% 가운데 5%나 가질까말까 해요. 금융과 자원 쪽이 나머지를 소유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위험한 정책은 탈국가주의 개념입니다.

농사는 단순 비즈니스가 아니라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는 매개이자 삶의 보루라는 원톄쥔 교수의 생각은 농민·농업·농촌을 중시하는 ‘삼농주의’를 낳았다. 지난달 중국 허난 지역에서 한 농부가 밀의 작황을 점검하고 있다. | 신화연합뉴스

농사는 단순 비즈니스가 아니라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는 매개이자 삶의 보루라는 원톄쥔 교수의 생각은 농민·농업·농촌을 중시하는 ‘삼농주의’를 낳았다. 지난달 중국 허난 지역에서 한 농부가 밀의 작황을 점검하고 있다. | 신화연합뉴스

▲ 1991년 소비에트 연방 무너지고
석유공급 막히자 북 농기계 멈춰도
시인들 농촌으로 보내 손농사

▲ 현장 속에 들어가서 진실 만나면
무슨 ‘주의’라는 것은 헛웃음 거리
지역문제, 그 답은 현장서 찾아야

안 = 한국 정부나 언론에서 국민들에게 반복적으로 전달한 메시지가 ‘세계화’라는 탈국가적 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IMF 관리체제 이후 외국 자본으로 넘어가는 수많은 기업과 기관을 보며 가치관의 혼돈이 일었죠.

원 = 탈국가는 우리가 누구인지 점점 더 잊게 만듭니다. 한국사람인데 그게 아니라 글로벌 국민이라는 거죠. 모두들 세계는 하나이고 국가적 권리를 내세우는 것보다 인류애를 내세우는 것이 더 고상한 가치라고 믿어요. 좋습니다. 하지만 이 내용 속에는 이데올로기가 침투해 있습니다. 국가적인 주권을 포기하도록 만듭니다. 요즘 세계 대부분의 대학들이 월스트리트로부터 지원을 받아요. 금융 자본들이 국경을 없애려고 합니다. 그들은 뭔가 국가보다 더 높은 가치가 있다고 말하죠. 그렇게 우리 머릿속의 국가적 개념을 해체하는데 이것이 탈국가이자 탈정치화입니다.

안 = 정치라는 것은 일을 결정하는 권한인데요. 탈정치화 속에서 자유무역협정이 자본의 논리대로 체결되어 왔습니다. 식량주권의 경우 한국은 2013년 곡물자급률이 23%입니다. 여기에 FTA 이후 수입 쿼터까지 있어 식량자급률이 높아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원 = 식량 주권을 위해서는 가족농을 지원해야 합니다. 브라질의 경우 세계 최대의 농장을 갖고 있지만 모두 초국가 기업이 관할하죠. 농산물을 충분히 생산해도 국제시장에 내다 파는 것이라 농부들은 오히려 기아에 허덕입니다. 농사를 시장에서 벌어지는 비즈니스로 대해서는 안됩니다. 산업화 대상이 아니에요. 농부는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식량 주권을 담당합니다. 식량 주권은 자립에서 나오고요. 그렇지 않으면 북한처럼 됩니다. 북한은 너무 빨리 과도하게 농업을 산업화시켜 몰락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미 오래전 농장을 거대 규모로 재배치했고 70%가 넘는 인구가 도시로 몰려가서 그 자리를 기계로 메웠죠. 1980년대까지는 아무 문제 없이 충분한 식량을 공급했습니다. 그러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고 석유 공급이 차단되자 비축 식량은 곧 바닥이 났어요. 그때 제가 농업 전문가로 국제연합개발계획(UNDP)의 요청을 받아 북한에 갔습니다. 북한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밝혀달라는 요청이었는데 제가 발견한 답은 과도한 농업 생산 현대화였습니다. 이데올로기 문제가 아니었어요. 기름이 없어 기계는 멈춘 상태에서 정부는 도시인들을 농촌으로 보내 손으로 농사를 지으라고 한 거죠. 불평이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안 = 선생의 책 <백년의 급진>을 보고 제가 가장 놀란 부분이 탈북자는 북한을 탈출한 것이 아니라 북한의 농촌을 탈출한 것이라는 대목이었습니다. 쟁기질, 호미질을 해야 하는데 이미 그 방식을 잃어버린 자들이 만들어내는 저생산, 고통스러운 삶이 미련없이 떠나도록 했다는 거죠. 이 이야기를 미국의 대표적인 농업 운동가인 웬델 베리에게 했더니 단숨에 지적하더군요. 문화를 잃었기 때문에 몰락했다고요.

원 = 경제학자로서 대한민국에 조언하고 싶은 점은 농업에서 산업화, 기계화, 현대화를 추구하면 북한처럼 될 거라는 겁니다. 생각해 봅시다. 시골에 있는 30%가 나머지 70%의 도시인들을 먹여살릴 수 있을까요? 쉬운 산수입니다. 그러니까 단 3명이 농사를 지어 10명을 먹이는 겁니다. 그것이 북한이었어요.

안 = 그 비율은 지금 한국의 경우도 같습니다. 최근에는 도시 집중 인구가 80%에 다다랐다는 발표인데, 식량보급률이 23%라는 것은 대한민국 사람을 먹여살리는 농사는 한반도가 아니라 다른 대륙에서 짓는다는 거죠. 기후 이변이 잦아지는 요즘 교역으로 식량을 사와야 한다는 것은 갈수록 위험 부담이 큽니다. 이 또한 탈국가, 세계화 속에서 잃어버린 주권이지 않나 싶습니다.

원 = 중국의 주류도 바보 같은 욕심을 부립니다. 미련한 공무원들이 미국에 다녀와서는 기업형 농장을 하자고 주장합니다. 중국은 아직 70%가 가족농입니다. 지난 10년간 최고의 수확을 거뒀고 식량자급을 한 지 수 십 년이 되었죠. 미국 시민들이 웰빙에 대해 자각하면서 가장 통탄하는 부분이 가족농이 해체되고 대규모 기업농이 되어 농토가 무너지고 식량 안전망이 깨진 점입니다. 다행히 오늘날 다수 중국사람들의 마음이 변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운동의 물결이 커다랗게 굽이치려 합니다. 중류계층 시민들이 주축이 돼 자신만의 식량 안전 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나섰어요. 나이든 어르신, 여성들도 참여하여 농촌과 도시를 잇는 다리를 놓고 있습니다. 주말 농사, 직거래, 어린이 교육 등을 통해 농촌으로 모입니다. 이들은 농업을 비즈니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농업을 역사라고 생각해요. 농업은 문화이고 교육입니다. 농업은 또한 사회입니다. 수 천 가정이 함께합니다. 중국 인구의 10%라도 이는 한국 인구의 네다섯 배가 될 겁니다. 우리는 주류와 논쟁하지 않습니다. 이미 주류들이 달려가서 만든 위기를 보았기 때문에 그들도 곧 깨어나겠거니 놔둡니다. 다만 나 스스로 변화하는 겁니다. 내가 변화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 변화에 동참할 것이기에 대안적인 사회는 이뤄질 거라 믿어요.

안 = 선생님께서는 학자일 뿐 아니라 중국 정책의 주요 제안자이기도 한데 이윤보다는 제3의 길을 제시해왔습니다. 오래도록 소신을 지킬 수 있는 잊지 못할 경험이 있으신지요. 농민들과 현장에서 생활해온 시간도 긴 걸로 알고 있습니다.

원 = 30년 전에 중국 서부를 여행했습니다. 돈 한 푼 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저 멀리 티베트 고원에서 출발해 황허를 따라 하류 끝까지 달렸죠. 1만㎞도 더 달렸어요. 그때 저를 압도한 기운이 있었습니다. 다 쓸려 나가고 딱 한 가지 깨우침만 올라오더군요. “나는 아주 미세한 모래 알갱이구나”라는 것이었어요. “아니, 있다고 할 수도 없는 그저 바람 속 먼지구나”라고 느꼈죠. 처음 발견한 ‘나’였습니다. 중국이 얼마나 광활한지도 알았어요. 그 속에 얼마나 다양한 삶의 방식들이 지형과 기후에 적응하고 있는지도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인민이 어떻게 이뤄져 있는지 가슴 저리게 배웠죠. 그 때가 서른 네 살이었어요. 그 여행에서 베이징으로 돌아왔지만, 저는 결코 거대한 현대 도시의 시민으로 되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도시의 방식을 온 중국에 밀어붙이는 일이 얼마나 잔혹한 건지 알았거든요. 그리고 얼마 후 소련의 붕괴를 맞았습니다. 그때 연구원으로 미국에 있었는데 빠듯했지만 주머니를 털어 배낭을 메고 동유럽으로 갔습니다. 돈 없이, 소개 편지 한 장 없이 7개국을 40일 동안 다녔어요. 그들은 영어를 하지 못하더군요. 말은 안 통했지만 뜻은 주고 받았어요. 그 사람들이 먼저 다가와 제 손을 잡았습니다. 왜냐하면 도대체 자기네가 맞닥트린 일이 뭔지 영문을 알고 싶었던 거죠. 자기 집으로 불러 재워주고 먹여주고 이웃 나라로 안내하며 속마음을 털어 놓았습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속에 있는 그들을 보며 그 무슨 ‘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헛헛한 껍데기인지 뼈저리게 느꼈어요.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와 싸우는 곳에서도 크로아티아 할아버지가 날 재워주고 전선까지 안내해주면, 그 다음엔 어느새 유고 주민이 다가와 피란민 수용소 안에라도 잠자리를 만들어줬습니다. 지역의 공장 관리자, 행정담당자, 농부 등 누구나 아주 많은 이야기를 해줬어요. 저는 이런 경험 때문에 서구의 제도를, 그 어떤 새 정책을 무조건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곳의 삶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안 = 황허를 내달리던 이야기를 할 때 선생님의 젖어드는 눈동자와 붉어지는 눈시울을 보았습니다. 제게도 그 진심이 전해졌어요. 먼저 선생님의 에고를 다 비웠기에 진실된 소통을 하지 않았을까 감히 짚어봅니다. 머릿속 관념이 녹아야 가슴의 열정이 그 자리를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나라의 골 깊은 진영 논리도 겸허해질 때만 녹겠구나 생각해 봅니다.

원 = 우리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진실로 만나야 합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만나는 그 지점에 서 보면 진영논리, ‘주의’ 모두 헛웃음 거리에 불과해요. 실용적으로 실질적으로 그 현장을 겪어야지, 밖에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서양 언어로 이야기합니다. 우리들의 언어가 사라졌어요. 지역의 문제는 지역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장에 그 답이 있습니다.

■ 원톄쥔 교수는
농민·농업·농촌 ‘삼농’을 중국 아젠다로 확립


안희경씨(왼쪽)가 지난달 22일 런민대 연구실에서 원톄쥔 교수와 인터뷰하고 있다.

안희경씨(왼쪽)가 지난달 22일 런민대 연구실에서 원톄쥔 교수와 인터뷰하고 있다.

원톄쥔(溫鐵軍·63)은 중국 런민(人民)대 교수이며 ‘농업 및 농촌발전대학’ 학장이다. 중국 경제개혁회 사무차장과 중국 거시경제연구재단 사무차장, 제임스 옌 농촌재건기관 대표로도 활동한다.

1983년 런민대 신문학과를 졸업하고 중앙군사위원회 총정치부 연구실, 국무원 농촌발전연구센터, 농업부 농촌경제연구센터, 중국경제체제개혁연구회 등에서 일했으며 1999년에 중국눙예(農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8년 지역으로 파견된 후 11년 동안 노동자, 농민, 군인으로 일했다. 20년 넘게 여러 중앙 정책 싱크탱크에서 연구했으며 30여개 국가의 국제 조직, 학술집단에 자문해 왔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이른바 ‘삼농(三農) 문제’를 처음 제기하여 중국의 최우선 아젠다로 확립했다. 그 덕분에 농민, 농업, 농촌과 관련한 문제들이 2000년대 들어 중국 공산당과 정부의 핵심 정책과제가 되었다. 2003년 CCTV가 선정하는 경제부문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었으며 2004년 두룬성 재단 최고의 논문상을 수상했다. 현재 중국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가장 주목받는 지식인으로서 개발도상국의 경제 발전 문제에도 조예가 깊다. 국내에 소개된 저서로는 <백년의 급진>이 있다.

원톄쥔은 국제적으로도 열정 어린 활동을 한다. 소탈하며 실용성을 중시하는 듯하다. 인터뷰에 앞서 중국어 통역을 제안했는데 굳이 시간을 더 쓸 필요도, 소통에 격식을 갖추느라 번거롭게 할 필요도 없이 즉각적인 소통을 하자며 영어 인터뷰를 제안했고, 열정적으로 대화에 몰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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