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87년체제냐 97년체제냐

2015.10.27 22:22 입력 2015.10.27 22:25 수정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우리 삶을 지배하는 것 ‘민주화의 시간이냐, 세계화의 시간이냐’

우리 사회의 ‘현재적 기원’은 어디서 시작하는 것일까. 시대정신에 따라 1960년대 이후 우리 현대사를 산업화시대와 민주화시대로 구분한다면, 그 현재적 기원은 1987년 6월항쟁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발전전략에 따라 1960년대 이후 근대화를 발전국가 시대와 신자유주의 시대로 구분한다면, 그 현재적 기원은 1997년 외환위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정치·사회적 측면에서 6월항쟁이 현재의 우리 사회에 결정적 영향을 줬다면, 경제적 측면에선 외환위기가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문제를 중심으로 진행된 논쟁이 ‘87년체제냐, 97년체제냐 논쟁’이다. ‘87년체제’란 말을 선구적으로 쓴 이는 박형준(국회 사무총장)이다. 박형준은 2003년 중앙일보에 기고한 ‘1987년체제를 넘어라’라는 칼럼을 통해 87년체제라는 개념을 선보였다. 특정한 역사적 시기를 체제(regime)로 파악한 대표 사례로는 보수 주도 정치체제를 지칭한 일본의 ‘55년체제’가 있다. 55년체제에서 착상을 빌려온 듯한 87년체제의 특징을 박형준은 ‘전태일·광주·박종철’을 딛고 자유와 참여, 시민사회를 연 민주화 체제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97년 12월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왼쪽)와 당시 임창열 재정경제원 장관(가운데)이 구제금융 협정문에 서명하고 있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성립한 97년체제는 한국 사회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7년 12월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왼쪽)와 당시 임창열 재정경제원 장관(가운데)이 구제금융 협정문에 서명하고 있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성립한 97년체제는 한국 사회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후 87년체제라는 개념이 학계 안에서 쓰이기 시작했고, ‘48년체제’ ‘61년체제’ ‘97년체제’라는 개념 또한 제시됐다. 민주화시대와 87년체제에 대한 학계의 연구들은 김종엽(한신대 교수·사회학)에 의해 <87년체제론: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의 인식과 새 전망>(2009)으로 편집돼 출간됐다. 이 책에는 87년체제와 97년체제에 대한 김종엽, 조희연(서울시교육감), 김호기(연세대 교수·사회학), 박상훈(정치발전연구소 학교장) 등의 분석을 담은 논문들이 실려 있다.

■87년체제와 97년체제

87년체제와 97년체제 가운데 87년체제를 주장한 대표적인 이들은 김종엽과 조희연이다. 김종엽은 1987년이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일대 전환점을 이루고, 그 전환의 형태가 구조형성적인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에 6월항쟁 이후의 한국사회를 87년체제로 파악할 것을 제안한다. 현재 우리 사회의 직접적 뿌리가 1987년에 닿아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조희연은 87년체제 개념의 유용성을 인정하면서 그 하위체제로 97년체제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97년체제는 1997년 외환위기와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두 사건에 의해 형성된 새로운 단계라는 것이다.

87년체제보다 97년체제를 선호하는 대표적인 이들은 정일준(고려대 교수·사회학), 김호기, 손호철(서강대 교수·정치학)이다. 정일준은 ‘87년체제는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 사회에서 체제는 발전국가 체제인 61년체제와 신자유주의 체제인 97년체제가 존재할 뿐 87년체제는 부재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김호기는 1987년에 열린 민주화시대에 대응하는 경제체제가 모호하기 때문에 신자유주의가 도입되고 공고화되는 97년체제가 87년체제보다 개념적 적실성이 높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손호철은 87년체제론이 정치체제를 특권화하는 정치주의의 위험을, 97년체제론이 경제체제를 우위에 두는 경제주의의 위험을 안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개발독재 체제인 61년체제는 이 체제가 갖는 억압적 정치체제의 성격을 해체한 87년체제를 거쳐 신자유주의 체제인 97년체제로 변화됐다. 손호철은 87년체제론이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의미를 희석화시키는 문제를 내포한다고 비판하고, 신자유주의의 등장을 주목하는 97년체제론에 상대적 우위성을 부여한다.

이렇듯 학계에선 두 개념을 둘러싼 논쟁이 진행돼 왔지만, 공론장을 포함한 시민사회에선 87년체제라는 개념이 더 많이 사용돼 왔다. 그 까닭은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볼 때 민주화시대에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게 87년체제였기 때문이다. 박명림(연세대 교수·정치학)이 사용한 ‘87년 헌정체제’나 노중기(한신대 교수·사회학)가 사용한 ‘87년 노동체제’, 박상훈이 사용한 ‘87년 정당체제’에서 볼 수 있듯, 정치사회에서 시민사회에 이르는 영역에서 87년체제는 진행 중이며, 따라서 87년체제론은 여전히 설득력이 높은 담론으로 볼 수 있다.

87년체제의 한 특징을 이뤄 온 지역주의 정당체제는 현재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중대한 정치적 과제의 하나이기도 하다.

■민주화의 시간과 세계화의 시간

87년체제와 97년체제라는 두 개념이 모두 타당하다는 양시론의 입장에서 보면,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성립한 97년체제가 지난 20년 가까이 우리 사회에 미쳐 온 영향은 심원하다. 구체적으로 그 영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김영삼 정부의 시장개방과 세계화 전략에서 어느 정도 가시화된 신자유주의 발전전략은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가 주도한 구조조정, 규제완화, 노동시장 유연화 등을 통해 빠르게 공고화돼 왔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처방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우리 사회를 외환위기로부터 비교적 단시간에 벗어나게 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국제 금융자본의 영향력 증대, 고용 없는 성장의 가시화, 비정규직의 확대, 사회 양극화의 강화 등 새로운 문제들을 낳아 왔다.

둘째, 정치사회의 경우 군부 권위주의가 1987년 민주화 운동을 통해 권위주의와 자유주의가 공존하는 이른바 ‘3김 정치’를 경유해 노무현 정부에 와서 탈권위주의적 자유주의로 변화됐다. 셋째, 시민사회의 경우 무정형의 시민사회에서 조직화된 시민사회로의 변화가 이뤄졌고, 넷째, 문화의 경우 공동체주의 문화에서 개인주의 문화로 변화돼 왔다. 요컨대 97년체제는 우리 사회에서 세계화시대가 본격화됐음을 보여준다.

2015년 현재 시점에서 돌아보면, 지난 민주화시대에 우리 사회에선 1987년의 ‘민주화의 시간’과 1997년의 ‘세계화의 시간’이라는 두 개의 시간이 동시에 흘러왔다. 1987년 이후 우리 사회는 민주화라는 새로운 변화를 갈망해 왔지만, 그 변화는 어느덧 우리 손아귀에서 벗어나 세계화라는 타율적 변화를 강제해 왔다. 민주화의 시간을 특징지어 온 사회개혁의 구심력이 세계화의 시간을 특징지어 온 구조적 강제라는 원심력에 의해 서서히 압도돼 온 게 1997년 이후 우리 사회의 풍경이었다.

1997년의 세계화의 시간을 특징짓는 사회현상은 불안이다. 10대의 대학입시, 20대의 청년실업, 30대의 주거불안, 40대의 퇴출 공포, 50대 이후의 노후빈곤은 불안의 구체적인 실체를 이뤄 왔다. 이 불안은 불만을 낳고, 불만은 분노를 강화시킴으로써 우리 사회를 불안사회이자 분노사회로 만들어 왔다. 이런 불안과 분노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더욱 강화돼 왔다. 이렇듯 1997년 외환위기와 그로부터 비롯된 일련의 사회변동이 2015년 불안의 한국사회의 현재적 기원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이런 불안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최대의 과제다.


재벌·은행 외자 차입 ‘내우’…글로벌 금융자본 공세 ‘외환’

1997년 외환위기를 낳은 원인에 대해 다양한 분석과 시각이 제시되고 있다. 큰 틀에서 외인(外因)론과 내인(內因)론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외인론은 세계화의 진전이 가져온 금융자본의 세계화에 주목한다. 초국적 금융자본은 각종 규제 철폐에 따른 세계화시대의 ‘국경 없는 경제’의 대표주자다. 국내에선 한스 피터 마르틴과 하랄트 슈만이 초국적 금융자본에 대해 쓴 <세계화의 덫>(강수돌 옮김)이 많이 읽혔다. 당시 세계 무역거래의 50배에 달하는 규모의 금융거래를 주도하고 있던 초국적 금융자본은 세계적 연결망과 전략적 제휴관계를 통해 국민경제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외환위기 이후 직장을 잃은 한 노동자가 최저생계비 보장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외환위기 이후 직장을 잃은 한 노동자가 최저생계비 보장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렇다면 동북아 국가들 가운데 왜 한국만 외환위기를 크게 겪을 수밖에 없었을까. 이에 대해선 1990년대 한국 자본주의의 축적전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90년대 초반 불황을 넘긴 한국 대기업들은 1994~1995년의 호황 속에서 신규 투자를 위한 대규모 신용창출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에 김영삼 정부는 1995년부터 종합금융사 설립을 허용했고,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과 함께 국제적 자본이동을 신속하게 자유화시켰다.

재벌·은행·종금사가 외국 자본을 공격적으로 차입한 결과, 1994년과 1997년 사이에 대외채무가 약 600억달러에서 1200억달러로 증가했다. 1995년 이후 반도체로 대표되는 수출시장의 수요 감소, 경상수지 적자폭 증가, 재벌대기업의 잇단 부도, 동남아시아 외환위기가 가져온 유동성 위기가 중첩되고 결합돼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외환위기는 외인과 내인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