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지역균형발전

2015.12.01 22:39 입력 2015.12.01 22:43 수정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소외된 지역 살리기” “노무현의 포퓰리즘”…법적 분쟁으로 비화

민주화 시대가 열린 이후 민주화 세력 출신의 정치가가 권력을 장악한 것은 세 번이었다. 김영삼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그들이다. 세 정부는 자신의 이름을 가졌는데,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가 그것이다. 군부의 정치 개입 금지를 이룬 김영삼 정부는 문민정부라는 이름과 어울리며, 외환위기를 극복한 김대중 정부는 국민의 정부라는 이름에 걸맞는다. 노무현 정부가 내건 참여정부의 ‘참여’라는 이름에 값하는 대표적인 정책은 지역균형발전이었다. 노무현 정부가 끝난 지 3년이 지난 2011년 5월 서울대 사회과학원이 주최한 학술대회 ‘노무현 정부의 실험: 미완의 개혁’에서 강현수(충남연구원 원장)는 노무현 정부 지역균형발전 정책의 특징을 지방 주도의 상향적 지역발전 체제를 주창했다는 데서 찾았다(‘참여정부의 지역균형발전 정책의 성과와 한계’). 앞선 정부들의 균형발전 정책은 중앙정부 주도의 하향식 방식이었던 반면에 노무현 정부는 지방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발전 전략을 기획·추진하는 새로운 지역 주도의 발전 패러다임을 모색했다는 게 강현수의 분석이었다. 이런 노무현 정부의 지역균형발전 정책은 임기 내내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b>“행정수도 이전 반대”</b> 2005년 2월27일 당시 한나라당 수도권 의원들이 국회 한나라당 원내대표실에서 행정수도 이전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행정수도 이전 반대” 2005년 2월27일 당시 한나라당 수도권 의원들이 국회 한나라당 원내대표실에서 행정수도 이전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참여정부 임기 내내 치열한 논쟁

노무현 정부가 내건 3대 국정 지표는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였다. 균형발전사회라는 국정 목표를 가장 잘 보여준 것이 지역균형발전 정책이었다. 강현수가 지적했듯,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노무현 정부는 대통령 직속의 ‘국가균형발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국가균형발전특별법’을 제정했다.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공공기관 이전, 혁신도시 건설과 같은 수도권 분산 정책을 모색한 동시에 지역혁신체계 구축과 같은 새로운 지역산업 정책을 추진했다. 가장 큰 관심을 모은 것은 행정수도 이전이었다. 행정수도 이전은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가 제시한 공약이었고, 이 연장선에서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이 2003년 12월 국회를 통과했다. 서울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행정수도를 이전한다는 이 법에 대해 국민적 관심은 서울이 갖는 역사·사회적 의미를 생각할 때 지대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논란 끝에 헌법재판소가 2004년 10월 이 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림으로써 논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위헌의 까닭은 수도가 서울이라는 게 불문헌법이며, 수도 이전은 헌법 개정 사안인데 국회가 이를 지키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이른바 ‘관습헌법’의 논리였다.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렸다고 해서 행정수도 이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관습헌법이라는 논리도 문제였지만, 행정수도 이전에는 국토 발전의 이상과 현실, 정치적 이해관계의 손익 계산 등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2005년 3월 ‘신행정수도 후속대책을 위한 연기·공주지역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행정수도 이전을 둘러싼 논쟁은 일단락됐다.

<b>“행정수도 이전 허용하라”</b> 2004년 10월28일 충청권 주민 5000여명이 대전역 광장에서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 위헌 결정을 내린 헌법재판관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행정수도 이전 허용하라” 2004년 10월28일 충청권 주민 5000여명이 대전역 광장에서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 위헌 결정을 내린 헌법재판관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지역균형발전 정책의 ‘빛과 그늘’

지역균형발전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대표적인 공개 토론으로는 2010년 사회통합위원회 등이 주최한 ‘균형발전 정책과 지방분권’에 관한 논쟁을 꼽을 수 있다. 김영정(전북대 교수·사회학)은 균형발전 정책을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지방을 살리려는 운동으로 이해했다. 그는 지방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일이 국가와 중앙정부의 의무임을 주장하고, 시장과 성장 중심의 논리로만 지방 문제를 바라볼 경우 해답이 없음을 강조했다. 지방분권의 최종 목표가 지방자치의 공고화와 실질 민주주의의 달성에 있다는 게 그의 핵심 논리였다.

반면 신도철(숙명여대 교수·경제학)은 노무현 정부의 균형발전 정책이 광복 이후 최대의 포퓰리즘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충청권의 표를 의식한 수도 이전과 그로 인한 다른 지역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공공기관 지방 이전이 재정 낭비, 지역 간 갈등 조장, 국민의 불평등 증대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지구지역화(glocalization) 시대를 맞아 광역자치단체의 통폐합을 우선적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한 걸음 물러서서 볼 때 노무현 정부의 지역균형발전 정책에는 ‘빛과 그늘’이 공존했다. 행정수도 이전과 공공기관 이전에서 볼 수 있듯이, 균형발전 정책은 기존의 국토 발전 노선을 일대 수정하려는 획기적인 전략이었다. 이 균형발전 정책은 무엇보다 지역주의를 극복하려고 했던 노무현 대통령 자신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었고, 국정 과제였던 만큼 정치적 탄력을 받았다. 산업화 과정에서 진행돼온 중앙 대 지방, 지방 대 지방의 불균형 발전을 돌아볼 때 균형발전과 지방분권은 규범적 측면에서 타당한 정책적 방향이었다.

하지만 균형발전 정책이 추진된 일련의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균형발전이 수도권의 퇴행적 발전을 낳고, 결국 국가경쟁력을 약화시킨다는 반대 논리가 제시됐으며, 정치적 논쟁은 물론 법적 논란을 야기했다. 국토 균형발전이 정권적 과제를 넘어선 국가적 과제라는 점에서 행정수도 이전 논란 등의 이슈들이 과잉 정치화되고 제동이 걸린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2000년대 초반 우리 사회에 이념 구도는 물론 각종 이해관계들이 이미 견고하게 뿌리내려 있던 셈이다.

균형발전과 지방분권에 헌신해온 김형기(경북대 교수·경제학)는 대한민국이 ‘서울공화국과 그 식민지’란 말이 과장이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다. 고수익 사업 기회와 좋은 일자리는 대부분 수도권에 집중돼 있는 반면, 비수도권 주민은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이 한층 적다고 그는 지적했다. 산업화 40년과 민주화 30년을 돌아볼 때 김형기의 주장은 공감할 수 있는 견해다. 김형기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하게’ 할 것을 규정한 헌법 전문과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을 유지해야’ 할 것을 규정한 헌법 제119조 2항을 주목하고, 균형발전을 위한 지방분권형 개헌 운동을 벌여 왔다.

지방분권을 위한 개헌이 이뤄지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헌법에 명기된 균형발전의 정신이 구현돼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생태학자들이 즐겨 쓰는 말 가운데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하라’는 언명이 있다. 그 어디에서 살아가든 삶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지역적 실천을 위해서라도 균형발전이 여전한 시대적 과제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명박 “세종시를 교육도시로” 수정안 선거 앞둔 박근혜·민주당 반대로 폐기

정치가로서의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의 생각을 비교할 수 있는 대표적인 정책 사안은 세종시 문제였다. 2010년 1월 이명박 정부는 행정부처 이전 계획을 전면 백지화하고 세종시를 행정중심 복합도시에서 교육중심 경제도시로 전환하려는 ‘세종시 수정안’을 발표했다. 정운찬 국무총리가 주도한 이 수정안은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 내 박근혜계와 야당인 민주당으로부터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세종시 이전을 둘러싼 논란에는 세 시각이 공존했다. 첫 번째 시각은 국토 균형발전을 중시한 노무현 대통령의 관점이다. 균형발전을 위해 수도권 집중은 완화돼야 하고, 이를 위해 행정부처 이전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두 번째 시각은 국정의 효율성을 중시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관점이다. 9부2처2청을 옮길 경우 정부 행정의 효율성이 감소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세 번째 시각은 원칙과 신뢰를 중시하는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의 관점이다. 2005년 국회에서 숱한 논란 끝에 여야가 함께 결정한 만큼 국민과의 신뢰가 우선시돼야 한다는 논리였다.

2010년 당시 세종시 이전 논란이 정치적으로 주목을 받았던 까닭은 ‘과거 권력’ ‘현재 권력’ ‘미래 권력’ 간의 갈등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또 지역 발전에 큰 관심을 가졌던 충청권 민심은 이 논란에 매우 예민하게 대응했다. 세종시 이전 문제는 그해 6월에 치러질 지방선거는 물론 2012년 총선과 대선에 결코 작지 않은 영향을 미칠 사안이었다. 선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당시 박근혜 전 대표와 민주당으로서는 현실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정책이었다.

세종시 수정안은 결국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폐기됐다. 현재 권력에 맞서 과거 권력과 미래 권력이 연대한 우리 정치사에서 매우 드문 사례였다. 세종시 수정 문제는 정치권에 진출하려 했던 정운찬 총리에게는 중대한 정치적 시험대이기도 했다. 수정안이 폐기되면서 정운찬 총리는 힘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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