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좌·우 이념 넘어 ‘균형 있는 언론’ 틀 잡은 경향의 첫 얼굴

2016.01.08 22:01 입력 2016.01.08 22:05 수정
한윤정 선임기자

초대 편집국장 염상섭

1946년 10월6일 경향신문 창간은 당대를 주름잡던 문인들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편집국장 염상섭, 주필 정지용, 문화부장 김동리, 문화부 기자 박영준 등이 가톨릭 신부인 양기섭 사장과의 협의 아래 신문을 만들었다. 초대 편집국장 염상섭(1897~1963)은 1947년 가을까지 재직하며 해방 직후 극심한 좌우대립의 와중에서 경향신문의 공명정대한 입장을 정리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창간 당시 50세였던 그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두루 경험한 원숙한 소설가이자 언론인이었기에 가능했다.

경향신문 초대 편집국장을 지낸 직후인 1948년 서울 돈암동 집 앞에 서 있는 염상섭 작가.

경향신문 초대 편집국장을 지낸 직후인 1948년 서울 돈암동 집 앞에 서 있는 염상섭 작가.

당시 서울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좌·우파 분열과 더불어 정치테러가 빈발했다. 염상섭은 1946년 11월28일자와 29일자에 나눠 실은 ‘폭력행위를 절멸하자’라는 사설에서 ‘테러는 정치활동을 저해하고 정치인에게 함구령을 하(下)한 형태이며 민중을 정치면에서 철벽으로 격리하여 놓은 결과를 재래(齎來)하였다 하겠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미 대표작 <삼대>(1931)를 발표한 문단의 존경받는 작가였던 그는 문화부장 김동리의 소설집 <무녀도>에 대한 서평도 경향신문(1947년 8월10일자)에 실었다.

1946년 10월6일 경향신문 창간호를 내고, 서울 소공동 사옥 앞에서 염상섭 편집국장(앞줄 왼쪽에서 네번째) 등 사원들이 기념 촬영을 하는 모습

1946년 10월6일 경향신문 창간호를 내고, 서울 소공동 사옥 앞에서 염상섭 편집국장(앞줄 왼쪽에서 네번째) 등 사원들이 기념 촬영을 하는 모습

안타깝게도 염상섭은 1년 만에 경향신문을 떠난다. 이는 평생 기자와 소설가라는 직분을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한 그의 삶의 결과로 보인다. 타계 직전인 1962년 11월 ‘사상계’에 기고한 ‘횡보 문단회상기’라는 글에서 그는 ‘작가가 되려거든 기자생활을 집어치우든지, 기자가 되려거든 작가는 아예 단념하여 버려야 하겠거늘, 붓 한자루로 되는 일이라 해서 그런지, 쌍수집병(雙手執餠)으로 두 갈래 물결에 쓸려 내려왔던 것이 나의 과거의 문필생활이었다’고 회상했다.

염상섭은 한일병합, 3·1운동, 8·15해방, 6·25전쟁 등 20세기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온몸으로 겪은 작가였다. 1897년생인 그는 중추원 의관을 지낸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우다가 11세 때 관립 사범보통학교에 입학한다. 보성중학교를 거쳐 1911년(15세) 일본 유학을 떠난다. 게이오대 문과 예과에 입학했다가 1학기 만에 병으로 자퇴하는데 1919년(23세) 오사카에서 3·1운동 소식을 듣고 ‘재대판(在大阪) 조선노동자일동 대표 염상섭’의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가 검거돼 3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1920년(24세) 창간된 동아일보 기자로 채용돼 귀국한 그는 남궁벽·황석우·김억·오상순 등과 함께 ‘폐허’ 동인을 결성한다. 3개월 만에 동아일보를 퇴사하고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하며 이듬해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개벽’지에 발표한다. 다시 잡지 ‘동명’ 기자, 시대일보 사회부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1924년(28세) 첫 소설집 <견우화>와 중편 <만세전>을 출간한다. 신문 연재작가로 주가를 높이던 그는 장편 <사랑과 죄> <이심> <광분>에 이어 <삼대>를 발표한다. 또 1929년(33세) 숙명여전 출신인 김영옥과 결혼해 안정을 찾는다. 당시 염상섭의 적수는 김동인이었는데 그의 단편 ‘발가락이 닮았다’의 모델이 염상섭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두 사람은 신문지상에서 설전을 벌이기도 한다. 술을 좋아했던 그가 ‘횡보’란 별명을 얻은 것도 이 무렵이다.

그후 <무화과> <백구> <모란꽃 필 때> 등을 발표한 염상섭은 1936년 만주의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한 한글신문인 만선일보 편집국장이 돼 만주로 떠난다. 3년간 재직 뒤엔 안동(지금의 단둥) 대동항건설주식회사 홍보담당이 돼 해방될 때까지 일한다. 2남2녀를 거느린 가장 염상섭에게 이 기간이 가장 안정된 시기였으나 작품은 만선일보 연재소설인 <개동> 한 편을 쓰는데 그쳤고, 그나마 귀국하다가 신문 스크랩을 잃어버려 영원히 사장됐다.

1946년 만주에서 돌아온 염상섭은 경향신문 초대 편집국장으로 일한 뒤 다시 창작에 전념해 <만세전>과 <삼대>를 개작해 출간하며 단편집 <해방의 아들>을 발표한다. 전시인 1952년(56세) <취우>를 집필하고, 같은 해 서라벌예술대학 학장이 되지만, 실제로는 명의만 제공했을 뿐 두문불출한 채 집필로 생계를 이어간다. 1957년(61세) 예술원 공로상을 받은 그는 마지막 단편집 <일대의 유업>(1960년)을 발표하며, 1963년 성북동 자택에서 67세를 일기로 별세한다.

염상섭은 한국 근대문학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앞 세대로 이광수(1892~1950)가 있지만, 춘원의 계몽적 민족주의는 친일로 귀결됐다. 동료 김동인(1900~1951)이 단편과 역사소설에 몰두한 데 비해 횡보는 당대 현실을 긴 호흡으로 담아낸 17편의 장편을 남겼다. 근대 도시와 자본주의적 일상의 감각을 소설에 담은 최초의 작가이자 1920년대 경성에서 1960년대 서울까지 동시대인의 삶을 세밀히 관찰하고 시대의 본질을 꿰뚫어본 지식인이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았던 그의 정치적 입장을 두고 과거 국문학계는 ‘중간파’ ‘절충주의’라고 설명했으나 최근에는 염상섭 문학에서 아나키즘, 제3의 대안을 읽어내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원로 문학평론가 염무웅씨는 염상섭 문학을 이렇게 설명한다. ‘길게 늘어지는 복문은 대상을 바로 공략하는 게 아니라 그 주위를 끊임없이 맴돌고 망설임으로써 독자를 소설 속으로 끌고 들어가기보다 바깥으로 밀어낸다. 대상에 대한 과도한 충실성이 도리어 대상의 통일적 영상을 파괴하는 미학적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이처럼 불투명한 문체는 말과 행동에 대한 의문과 반성, 내적 균열에서 비롯됐다. 근대문학의 개척자인 염상섭은 자신의 문학이 스스로의 전통이 아닌 외래문학에서 비롯됐다는 상처를 지녔으며 식민지 시기의 비관적인 현실 속에서 미결정, 미확정의 태도를 체득했다. 그럼에도 현실의 염상섭은 식민지 시기의 좌우합작이나 해방 이후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지지한 민족통합론자였다. 병석에서 맞이한 4·19혁명에 대해서도 지지 입장을 밝혔다.

작가는 우리 곁에 있다. 문화체육부(현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학의 해’이던 1996년 한국 근대문학에 끼친 작가의 업적을 기려 출생지인 서울 종로구에 세운 작가의 동상은 종묘 복원사업으로 인해 삼청공원으로 이전했다가 지난해 다시 광화문 교보생명빌딩 앞으로 옮겨왔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문구 아래 벤치에 앉아 사색하는 모습의 작가는 거리를 오가는 시민들에게 문학과 사상의 가치를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중산층·지식인 아우른 ‘근대소설 개척자’…‘전집’ 속속 출간

서울 광화문  교보생명빌딩 앞 ‘횡보 염상섭의 상’

서울 광화문 교보생명빌딩 앞 ‘횡보 염상섭의 상’

최근 국문학계에서는 염상섭 연구가 활발하다. 염상섭은 이광수·김동인·현진건 등과 더불어 근대소설의 개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러나 도시와 중산층, 지식인의 감각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다른 작가들과 뚜렷이 구분된다. 또 경향신문 초대 편집국장을 맡는 등 소설과 신문을 오간 언론인이기도 하다. 염상섭은 워낙 많은 작품과 글을 남겨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웠는데, 그의 비문학 및 문학 전집이 정리돼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해 완간된 <염상섭 문장 전집>(한기형·이혜령 엮음, 소명출판)은 염상섭의 글 가운데 소설을 제외한 비평, 평론, 수필, 기사, 칼럼 등 모든 글을 모았다. 편자인 한기형·이혜령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는 “염상섭의 비소설 전체를 장르 구분 없이 ‘문장’으로 통칭한 것은 표면적 형식과 무관하게 그의 사상 전체를 드러내기 위함”이라며 “그가 남긴 수많은 글은 형식이나 시기, 맥락에 구애되지 않는 사유의 긴밀한 내적 소통 속에서 씌어졌다”고 밝혔다.

한편 김재용 원광대 교수는 올해부터 10년 계획으로 글누림 출판사와 함께 염상섭 소설 전집을 펴내기로 했다. 1987년 민음사에서 12권짜리 염상섭 전집(사실상 선집)이 나왔으나 절판된 상태여서 연구자 및 독자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1차분으로 <효풍> <채석장의 소년> <난류> 등 장편 3권이 나왔다.

이 중 <채석장의 소년>은 횡보가 남긴 유일한 아동문학 작품이다. 1950년 1월부터 아동잡지 ‘소학생’에 연재되다 전쟁으로 중단됐으며 1952년 6월 평범사에서 출간됐지만 횡보 연구자들도 실체를 확인하지 못했다. 이 소설을 발굴한 김 교수는 “1948년 남한에서 국가보안법이 제정되고 보도연맹이 만들어지는 등 냉전적 반공주의가 지배하는 엄혹한 상황에서 횡보가 소년소설이라는 우회적 방식으로 현실에 대해 발언하려는 의도에서 쓴 작품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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