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열도로 건너간 고대 한민족…일본은 왜 신사에 새겼을까

2016.09.09 20:42 입력 2016.09.09 20:57 수정
글·사진 |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고구려와 신라

고구려가 멸망한 뒤 일본열도로 망명한 고구려인들을 일본 정부는 지금의 사이타마현 일대에서 살도록 했다. 13세기경 사이타마의 고구려인들은 남하해 지금의 히노시 일대를 장악하게 되는데, 이들이 다카하타 고려씨(高幡高麗氏)다. 사진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가 세운 고려신사의 비석.

고구려가 멸망한 뒤 일본열도로 망명한 고구려인들을 일본 정부는 지금의 사이타마현 일대에서 살도록 했다. 13세기경 사이타마의 고구려인들은 남하해 지금의 히노시 일대를 장악하게 되는데, 이들이 다카하타 고려씨(高幡高麗氏)다. 사진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가 세운 고려신사의 비석.

오늘은 고대 일본열도에 흔적을 남긴 고구려와 신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많은 독자분들이 예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내용일 것이다.

지난 회에 88영장 순례에 대해 알아보았다. 원래는 시코쿠 지역에 존재하는 88영장을 본떠, 일본 전국 그리고 식민지 조선에까지 소규모 88영장이 많이 조성되었다. 필자가 일본 유학 당시 살던 히노시(日野市)의 다카하타 후도(高幡不動)라는 절의 뒷산에도 88영장이 있었다.

히노시는 도쿄도(東京都) 중간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흔히 도쿄라고 하면 신주쿠, 긴자, 시나가와 같은 도심을 떠올리지만, 사실 도쿄는 서쪽으로는 험준한 산지를 접하고, 남쪽으로는 태평양의 섬까지 포괄하는 거대한 지역이다. 필자가 살던 아파트 창밖으로는 눈 쌓인 산맥과 후지산, 그리고 다마가와(多摩川)라고 하는 큰 강의 지류가 보였다. 그 풍경을 바라보면서 남산과 한강이 보이는 서울을 떠올리고는 했다.

언덕 위의 아파트에서 20분쯤 걸어 내려가면 다카하타 후도 절이 있다. 자각대사(慈覺大師) 엔닌(圓仁·794~864)이 창건했다고 하는 오래된 절에는 고즈넉한 분위기가 있었다. 이 절은 메이지유신에 대해 관심 있는 분이라면 들어보았을 무사조직 신센구미(新選組)의 부장(副長)이자 팀 최고의 미남으로 유명했던 히지카타 도시조(土方歲三)가 어렸을 때 놀던 곳이기도 하다. 신센구미 이야기는 이 연재에서 다시 하게 될 것이다.

다카하타 후도 절 경내에 있는 ‘분에이의 판비’. 고구려의 후손을 자칭한 다카하타 고마(高幡高麗) 일족의 활동을 전해주고 있다. 고려씨는 고대에서 중세에 걸쳐 간토의 넓은 지역을 장악했다.

다카하타 후도 절 경내에 있는 ‘분에이의 판비’. 고구려의 후손을 자칭한 다카하타 고마(高幡高麗) 일족의 활동을 전해주고 있다. 고려씨는 고대에서 중세에 걸쳐 간토의 넓은 지역을 장악했다.

다카하타 후도는 한반도와도 약간의 관련이 있다. 한때 쇠락했던 다카하타 후도를 부흥시킨 이들이 고구려의 후손을 자칭한 다카하타 고마(高幡高麗) 일족이다. 이들 일족의 활동을 전하는 유물이 있는데 ‘분에이의 판비(文永の板碑)’라는 돌비석이다. 판비란 일반적인 비석보다 좀 더 얇게 돌을 잘라서 세운 것으로, 주로 중세 일본 동부에서 유행했다. 이 비석에는 아미타여래를 상징하는 범자(梵字)와 ‘1271년 신미 11월 모일(文永八年辛未中冬日)’에 세웠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중세 동일본의 교통 요충지였던 지금의 히노시 일대를 지배하던 것은 다카하타씨(高幡氏)였다. 그러다가 13세기경, 고려신사(高麗神社)가 자리한 지금의 사이타마에서 남하한 고려씨(고마씨)가 이 지역을 장악한다. 이들을 다카하타 고려씨(高幡高麗氏)라고 부르는데 이 지역의 이름인 다이라(平)에서 따와 다이라씨(平氏)라고도 한다. 필자가 살던 아파트 옆집 가족의 성씨도 다이라씨였다. ‘분에이의 판비’를 세운 것은 고마 스케쓰나(高麗助綱)라는 사람이다. 14세기 중반에 태풍으로 넘어진 다카하타 후도 본존의 부동명왕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한다. 부처님 코가 빠졌다는 곳은 지금도 우물로 남아 있다.

[한국이 모르는 일본] (8) 열도로 건너간 고대 한민족…일본은 왜 신사에 새겼을까

고구려가 멸망한 뒤 일본열도로 망명한 고구려인들을, 당시 일본 정부는 동쪽 국경지대인 지금의 사이타마현 일대에 배치했다. 이민족인 고구려인을 이용하여 이민족인 에미시(지금의 아이누족)를 통제하려는 이이제이 전략이었다. 그러나 고려씨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비옥한 평야지대 타마까지 세력을 떨치기에 이른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주로 사이타마현의 고려신사가 알려져 있지만, ‘분에이의 판비’가 상징하는 것처럼, 고대에서 중세에 걸쳐 고려씨는 간토의 넓은 지역을 장악했다.

일본 고대의 역사서인 <속일본기(續日本紀)> 703년 기사에 따르면, 일본으로 망명한 고구려인이 고려왕(高麗王)이라는 성씨를 받아 고려왕 약광(高麗王若光·고마오 작코)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백제 멸망 후 망명한 왕족의 후손도 백제왕(百濟王)이라는 성씨를 받아 백제왕 선광(百濟王善光·구다라오 젠코)이라 불렸다. 학계의 통설에 따르면, 이러한 정책의 목적은 “여러 나라의 왕들을 아래에 두는 황제적 위상의 덴노(天皇)”라는 허구적 세계질서를 수립하기 위해서였다. 고구려를 비롯해 당시의 중국 주변 국가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스즈키 마사노부(鈴木正信) 선생의 최근 논문(<武藏國高麗郡の建郡と大神朝臣麻呂>)에 따르면, 이 시기 일본에는 최소한 두 개의 유력한 고려씨가 존재했던 것 같다. 한 집안은 일본 중앙 정계에서 활동했고, 또 하나의 고려씨는 이곳 사이타마의 고려신사 일대에서 활동했다.

이 두 고려씨 간의 관계는 잘 알 수 없다고 한다.

한편, 백제왕 집안은 고려씨보다 좀 더 먼 국경지역인 도호쿠(東北)로 보내졌다. 미치노쿠(陸奧) 지역에 발령받은 백제왕 경복(百濟王敬福·구다라오 게이후쿠)이 749년에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황금을 발견했다. 시인 오토모노 야카모치(大伴家持)가 이를 축하하여 읊었다는 시가 고대 일본의 시집 <만요슈(萬葉集)>에 전한다(<만요슈>를 고대 한국어로 읽을 수 있다는 식의 근거 없는 주장은 무시하기로 하자).

“임금님의 치세를 축하하기 위해, 동쪽 미치노쿠의 산에 황금꽃이 핀다.”(권18, 4097번)

한편, 친일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간주되는 조중응(趙重應·1860~1919)이 쓴 고려신사 본전의 편액은 흥미롭다. 잘 보면, ‘고려신사’의 ‘고(高)’자와 ‘려(麗)’자 사이에 ‘구(句)’자가 작게 놓여 있다. 고려신사의 편액을 썼다고 해서 그가 위대한 한민족을 꿈꾸었다거나, 조선왕조의 부흥을 꾀했다고 할 수는 없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이던 시기에 고려신사는 이른바 내선일체의 상징으로 선전되었기 때문이다.

고려신사의 도리이(鳥居·신사 입구 등에 세우는 일본의 전통적인 문) 옆에는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세운 비석이 놓여 있다. 메이지 시대 이후에 이 지역 출신으로서 성공한 인물이 많다 보니, 오늘날 지역 주민들은 고려신사를 한·일관계 속의 그 무엇이라기보다는, 기원하면 출세시켜주는 영험한 신사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신사 건물에는 배용준씨가 주연으로 나온 <태왕사신기> 포스터가 붙어 있고, 신사 앞에서는 김치를 팔고 있었다.

한편, ‘신라’라는 이름도 일본 역사에서 기묘한 형태로 명맥을 유지한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장보고의 신라방에서 모셔온 신라명신(新羅明神)과 적산명신(赤山明神)이다. 교토 동북쪽의 히에이잔(比叡山)에 자리한 절 엔랴쿠지(延曆寺)의 별원(別院)에는, 앞서 언급한 자각대사 엔닌이 모셔온 적산명신이 있다. 그리고 엔랴쿠지와 비와코(琵琶湖) 호수 사이에 자리한 절 미이데라(三井寺) 근처에는, 지증대사(智大師) 엔친(圓珍)이 모셔온 신라명신이 있다. 이들 스님은 장보고가 관리하던 산둥반도의 신라방(新羅房)에서 신라인의 도움을 받아 구법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기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렇게 신라의 신을 모셔왔다고 한다.

신라명신을 모신 신라선신당 앞에서 성인식을 치른 요시미쓰 후예들의 이동 흔적을 보여주는 하치노헤 신라 신사.

신라명신을 모신 신라선신당 앞에서 성인식을 치른 요시미쓰 후예들의 이동 흔적을 보여주는 하치노헤 신라 신사.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고대 헤이안 시대에 무사가문으로서 두각을 드러내던 미나모토 가문(源氏)의 일족 가운데 미나모토노 요시미쓰(源義光·1045~1127)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신라명신을 모신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 앞에서 성인식(元服)을 치렀기에 신라 사부로(新羅三郞) 요시미쓰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는 악기를 잘 연주한 것으로 유명하다.

홋카이도 최남단 지역을 지배했던 마쓰마에 가문의 거점인 마쓰마에성.

홋카이도 최남단 지역을 지배했던 마쓰마에 가문의 거점인 마쓰마에성.

신라 사부로 요시미쓰의 후예는 일본열도의 동쪽으로 진출했다. 아오모리현 동남쪽의 하치노헤(八戶)에 자리한 신라신사가 이들의 이동 흔적을 남기고 있다. 나아가 이들은 바다 건너 아이누 땅 홋카이도의 최남단 마쓰마에(松前)라는 곳에 도달해 거점을 마련했다. 이 지역을 지배한 마쓰마에 가문은 자신들의 역사서를 ‘신라의 기록(新羅之記錄·신라노키로쿠)’이라고 불렀다. 물론 이것은 한반도 동남쪽 신라국의 기록이 아니라, 신라 사부로 요시미쓰의 후손인 마쓰마에 가문의 기록이라는 뜻이다. 이들의 거점인 마쓰마에성(松前城)은 메이지유신 시기의 내전인 무진전쟁(戊辰戰爭) 당시 히노시 출신의 신센구미 부장 히지카타 도시조의 공격을 받았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전근대 일본의 역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언뜻언뜻 모습을 보였다가는 또다시 망각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일찍이 소설가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는 고구려, 백제, 신라 세력이 일본열도로 대량 이주했으며, 중세 막부 정권의 성립에 앞서 미나모토씨(源氏)와 다이라씨(平氏)가 정면충돌한 겐페이전쟁(源平合戰·1180~1185)은 이들 한반도 출신 세력 간의 충돌이었다고 주장했다(<安吾の新日本地理: 高麗神社の祭の笛―武藏野の卷―> 등).

필자도 여기서부터 무한히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는 있다. 하지만, 정말로 사카구치 안고나 한국의 수많은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역사가 일본열도에서 전개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이다. 한반도 세력이 일본열도에 식민지를 만들었다거나, 기마민족이 대규모로 이주했다거나, 또는 1만년 전에 ‘위대한 한민족’의 국가가 전 세계를 지배했다거나 하는 주장을 자주 듣는다.

이들 주장은 근거가 없는 상상이거나, 신빙성이 부족한 자료에 근거한 추론이다. 근거가 부족한 주장을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이미 종교의 영역이다. 자고로 종교와 정치는 대화의 소재로 삼으면 안된다고 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진정한 탐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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