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자본주의 문명의 한계 성찰한 생태학, 과거에서 답을 찾다

2016.11.01 20:47 입력 2016.11.02 18:55 수정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

스웨덴 출신의 언어학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라다크의 전통사회가 서구문명에 의해 파괴되는 과정을 16년간 목격하고 실천적 생태환경운동가로 변신했다. 그는 10년여 전부터 생산과 소비의 거리를 줄이기 위한 지역화 운동을 펼치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스웨덴 출신의 언어학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라다크의 전통사회가 서구문명에 의해 파괴되는 과정을 16년간 목격하고 실천적 생태환경운동가로 변신했다. 그는 10년여 전부터 생산과 소비의 거리를 줄이기 위한 지역화 운동을 펼치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전후 서구 사상의 역사에서 문명에 대한 성찰은 중요한 주제의 하나를 이뤄 왔다. 서구사회의 근대 문명은 곧 자본주의 문명이다. 전후 자본주의 문명의 특징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유기적 결합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자본주의 문명은 물질만능주의를 널리 유포시켰고, 이 물질만능주의는 인간의 소유 욕망을 절대시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이 자본주의 문명의 지속가능성에 있었다. 자본주의 문명에 내재한 한계와 그늘을 성찰해온 사상이 다름 아닌 생태학이었다.

생태학은 본래 생물들이 서로 환경을 형성하고 결합하면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다루는 생물학의 한 분야로 출발했다. 이후 생태학은 자연과학을 넘어 인문·사회과학에서 다양한 담론들을 주조했다. 심층생태학, 사회생태학, 정치생태학 등이 그것들이었다. 이러한 생태학적 상상력과 통찰에 큰 영향을 미친 저작의 하나가 스웨덴 출신의 언어학자이자 작가이며 사회운동가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Helena Norberg-Hodge·1946~ )가 1992년에 발표한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우다>(Ancient Futures: Learning from Ladakh)였다.

<오래된 미래>는 서구화·발전·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인간에게 행복한 삶이란 어떤 것일까. 물질적으로 빈곤하더라도 인간과 자연의 공존, 인간과 인간의 연대가 존재하는 삶이 더 행복한 것은 아닐까. <오래된 미래>가 반복해 읽혀온 까닭은 생태학적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삶의 본질적 의미를 구한다는 데 있다. 길지 않은, 그러나 심오한 메시지를 담은 이 저작은 지난 20여년 동안 결코 적지 않은 이들의 삶과 생각을 뒤흔들어 왔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대표저작 <오래된 미래>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대표저작 <오래된 미래>

■라다크, 오래된 미래

“과거에는 더 나빴던가? 아니면 더 좋았던가? 티베트 고원 위의 오래된 문화의 지방 라다크에서 얻은 16년 이상의 경험이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을 극적으로 바꾸어놓았다. 나는 우리의 산업문화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됐다.”

<오래된 미래>의 ‘프롤로그: 라다크로부터 배운다’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이 책은 언어학을 전공하는 노르베리-호지가 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방문한 북인도의 라다크에서 발견하고 관찰하며 실천해온 것들을 담은 저작이다. 책은 라다크의 전통, 라다크의 변화, 라다크의 미래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노르베리-호지가 라다크에 도착해 발견한 것은 건강하고 평화로운 공동체 생활과 문화였다. 라다크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빈곤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라다크에 불어 닥친 서구식 개발의 바람은 이러한 공동체를 파괴해 갔다.

라다크 사람들은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하고 돈을 중시할 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친밀감과 배려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라다크는 서구식 제도들을 도입하면서 자본주의의 그늘인 경쟁과 소외의 사회로 변화됐다.

이러한 라다크의 변화에 맞선 대안적 실천들이 책의 후반부에서 다뤄진다. 노르베리-호지가 제시하는 ‘반개발(counter-development)’은 이러한 대안 모색의 핵심을 이루는 개념이다. 반개발이란 기존의 개발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산업적 생산방식이 치러야 하는 대가를 폭로하며, 그 대신 자연과 공존하고 타인과 연대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인류가 소망하는 미래는 다가올 시간에서뿐만 아니라 지나간 시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노르베리-호지는 ‘에필로그: 오래된 미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적인 규모의 삶과 보다 여성적이고 영성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새로운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다. (…) 이러한 추세는 흔히 ‘새로운’이라는 딱지가 붙여지고 있지만, 라다크가 보여준 것처럼 그러한 추세는 중요한 의미에서 아주 오래된 것이다.” 요컨대, 라다크는 ‘오래된 미래’인 셈이다.

■자본주의 문명의 성찰

<오래된 미래>에서 제시된 노르베리-호지의 생태사상을 좀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저작이 <진보의 미래>(1992)였다. 이 책은 노르베리-호지도 참여하는 국제생태문화협회(ISEC) 등이 주최한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모은 것이다. 이 책의 메시지는 생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개발의 진행 방향, 다시 말해 동일한 방식의 확산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데 있다. 노르베리-호지를 포함해 반다나 시바, 에드워드 골드스미스, 마틴 코르, 피터 고어링 등은 동일성의 강요에 맞선 다양성의 활성화를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한다.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20세기 후반 이후 지구적 차원에서 발전의 의미를 재검토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노르베리-호지와 고어링이 주장하듯, 현대적 생활방식이 바람직한 것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지구의 자원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유지하기 위해선 턱없이 부족하다. 대안적인 발전모델과 생활양식을 마련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생태위기는 극복될 수 없다. 생태친화적인 기술 개발과 다양한 지역 문화의 보존은 이러한 위기에 맞서는 구체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게 노르베리-호지와 고어링의 주장이다.

오늘날 생태학적 대안의 실현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갖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생태학적 대안이 실현불가능한 유토피아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환경이 우리 세대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의 자산이며, 무한경쟁의 삶의 방식이 과연 행복한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 노르베리-호지의 생태학이 갖는 의미는 지구의 지속가능성은 물론 행복한 삶을 위한 조건에 대해 하나의 주목할 답변을 제시한다는 데 있다. <오래된 미래>는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이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임에 분명하다.

■한국어판 저작은

<오래된 미래>는 녹색평론사 번역본(김종철·김태언 옮김)과 중앙북스 번역본(양희승 옮김)이 있다. 두 판본 모두 달라이 라마의 추천사를 담고 있다. 녹색평론사 번역본에 있는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의 ‘옮긴이의 말’은 이 책의 메시지를 잘 전달한다.

■안승준의 ‘국가에서 공동체로’ - 붕괴된 한국의 공동체 회복시킬 사회생태학적 대안 모색

서구사회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있다면, 한국사회에는 안승준이 있다. 안승준은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1년 미국에서 사망한 젊은 생태학자였다. 그가 남긴 <국가에서 공동체로(From State to Community, 1994)>는 사회생태학의 시각에서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 대한 거시적 비판과 새로운 대안 모색을 다뤘다.

안승준에 따르면, 한국의 성공적인 근대화는 고도로 중앙 집중화된 국가가 강력한 통제를 행사함으로써 달성된 것이었다. 이 산업화는 가시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세계시장에의 의존 심화, 경제적 집중과 소득 불평등, 농민계층의 희생 등과 같은 구조적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김호기의 세상을 뒤흔든 사상 70년] (32)자본주의 문명의 한계 성찰한 생태학, 과거에서 답을 찾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들 가운데 안승준은 생태 위기에 주목했다. 한국 산업화의 역사는 국가에의 예속과 자율적 공동체 붕괴의 역사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생태 위기의 원인의 하나로 식민지 시대의 근대 국가 형성을 부각시켰다. 근대 국가의 형성은 자치적인 마을공동체를 무력화하는 동시에 파괴했고, 이러한 과정은 196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와 함께 가속화됐다.

일방적인 자연 지배와 중앙집권적 국가관료제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대안으로 안승준이 주목한 것은 머레이 북친의 사회생태학적 구상이었다. 생산자를 생산과정에서 분리시키는 게 근대 국가 형성의 핵심을 이뤘다면, 이를 극복하는 것은 그 생산과정에 생산자의 새로운 참여를 모색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다는 게 안승준의 주장이었다.

안승준은 ‘공동체 토지 신탁’을 구체적인 방법으로 제시했다. 공동체 토지 신탁은 토지를 사용하는 개인들이 투자한 가치는 보유할 수 있되 그 토지 자체는 공동체가 관리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이 전략은 고유한 문화와 상호결속에 의해 형성되는 지역 공동체의 활성화를 겨냥하고, 나아가 그 공동체 속에서 인간이 자연과 공존하는 삶을 실현해 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렇듯 이 책은 한국사회에서 공동체의 중요성을 계몽하고 생태학적 대안을 모색한 선구적인 저작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날카롭고 진지했던 안승준이 불의의 사고로 스물다섯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점이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한국사회 생태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을 게 분명하다. 영어로 발표된 <국가에서 공동체로>를 우리말로 옮긴 안창식은 안승준의 아버지다.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는 마음 시린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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