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수호자·친일파·투자가…수장가 삶 따라 문화재 운명도 제각각

2016.12.05 21:15 입력 2016.12.05 21:17 수정
유홍준 |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미술 애호가 열전 - 5. 근대의 수장가들

친일파 박영철이 위창 오세창의 지도를 받아 고서화를 수집해 꾸민 <근역화휘>에 실려 있는 겸재 정선의 ‘만폭동도’. 비단에 담채, 33.0×22.0㎝, 서울대박물관 소장.

친일파 박영철이 위창 오세창의 지도를 받아 고서화를 수집해 꾸민 <근역화휘>에 실려 있는 겸재 정선의 ‘만폭동도’. 비단에 담채, 33.0×22.0㎝, 서울대박물관 소장.

경향신문 창간 70돌 특집으로 기획된 ‘안목(眼目)’ 시리즈는 이번 회로 끝을 맺는다. 애호가 열전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현대 수장가로 이어지는데 그것은 개인의 안목이 아니라 미술관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으니 그 맥락이 전혀 다르다. 그래서 이번 회에는 근대 초기에 어떤 분들이 어떤 상황에서 미술품을 수집하였는지를 소개함으로써 마무리 짓고자 한다.

■근대 초기의 미술품 수장가들

개화기를 지나 근대로 들어서는 20세기 벽두에 일본인들의 광적인 고려청자 수집과 함께 일어난 골동계는 1910년대에는 분청사기와 조선백자로 번졌다. 그때 얘기로 표현하자면 ‘왕서방’에서 ‘이서방’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이왕가박물관과 총독부박물관이 설립되면서 박물관 전시를 위한 유물 구입으로 도자기뿐만 아니라 삼국시대 토기, 불상, 금속유물, 그리고 조선시대 고서화까지 고미술 전반으로 영역이 확대되었다.

이처럼 미술품 거래가 자못 활기를 띠게 되자 골동 시장이 형성되었다. 일본 상인들이 한반도로 진출하여 충무로에 점포를 내기 시작했고 도쿄의 호중거(壺中居) 같은 유명한 고미술상이 서울에 지점을 두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1922년이 되면 일본인 고미술상 10여곳이 연합하여 경성미술구락부라는 경매회사까지 차리게 되었다.

친일파 박영철의 그림첩 <근역화휘> 3권. 서울대박물관 소장

친일파 박영철의 그림첩 <근역화휘> 3권. 서울대박물관 소장

한국인 골동 가게도 등장하였다. 동창상회, 배성관상점 등이 만물상 비슷한 형태로 남대문, 소공동에서 문을 열었으며 1930년대엔 오봉빈이 조선미술관을 세워 ‘조선 명보(名寶) 전람회’ 등 뜻있는 전시회를 많이 기획하였고, 1940년대엔 문명상회 같은 거상도 등장하였다. 이것이 8·15해방 이전 미술시장 사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20년대부터 우리 미술애호가들이 등장하여 고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1930년대로 들어서면 일본인들과 경쟁하며 맹활약을 보였다. 간송 전형필이 관훈동 고서점인 한남서림을 인수한 것도 1932년이었다. 이렇게 등장한 미술품 수집가들은 대체로 세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재력이 풍부한 분들인데 당시에는 지주들이 많았다. 송은 이병직, 창랑 장택상, 간송 전형필 등은 모두 지주의 아들들이었으며 친일귀족인 한상억·박영철 등도 지방 대지주들이었다.

또 하나는 안정된 직업인으로 의사들이 많았다. 내과의사 수정 박병래, 치과의사 토선 함석태, 외과 전문의 청원 박창훈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세 번째 유형은 미술인들로 서화가인 위창 오세창, 소전 손재형, 무호 이한복, 구룡산인 김용진 등이다. 이외에도 수집가는 아니어도 애호가라고 할 수 있는 인사들이 적지 않으나 8·15 해방 전 본격적인 미술품 수장가의 면면은 대략 이와 같았다.

박영철이 조선시대 명현의 글씨를 거의 망라해 엮은 글씨 모음첩 <근역서휘>. 서울대박물관 소장

박영철이 조선시대 명현의 글씨를 거의 망라해 엮은 글씨 모음첩 <근역서휘>. 서울대박물관 소장

■장택상 사랑방의 동호인 모임

1930년대는 아직 미술시장 질서가 확립된 것이 아니어서 안목 싸움이 치열했다. 이 작품 수준이 어느 정도 것이고 값은 어느 정도가 합당한가에 대한 예술적, 상품적 가치판단을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참고하고 의지할 논문이나 책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오직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눈밖에 없었다.

그것은 장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5원짜리를 1000원에 살 수도 있고, 반대인 경우도 있으며, ‘가이다시(賣出)’라고 불린 고미술품 장사꾼들이 지방에서 거두어온 부대 자루에서 뜻밖의 횡재를 할 수도 있었다. 이를 호리다시(掘出)라고 했다. 이 때문에 당시 미술품 수집가들에게는 사금을 캐내는 듯한 익사이팅한 면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가짜에 속을 수도 있었다.

이에 애호가들이 서로 정보를 교환하면서 작품을 품평하는 동호인 모임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성모병원 원장이었던 수정 박병래는 퇴근 후 명동, 충무로, 소공동 일대 열 두어 골동상을 한 바퀴 돌고 나면 으레 애호가들이 수표교 근처에 있는 창랑 장택상의 사랑방에 모여들었다며 당시를 이렇게 회상하였다.

“30년대 초, 창랑 사랑방에는 언제나 면면한 인사들이 모여들어 골동 얘기로 세월을 보냈다. 집주인 창랑은 물론이고 윤치영(초대 내무부 장관), 함석태, 이한복, 이만규(배화여중 교장) 등이 자주 만나곤 했다. 나도 손재형, 도상봉(화가), 이여성(화가) 등과 거기에 끼었는데, 하는 얘기란 처음부터 끝까지 골동에 관한 것뿐이었다. 저녁때가 되면 그날 손에 넣은 골동을 품평한 다음 제일 성적이 좋은 사람에게 상을 주고 늦으면 설렁탕을 시켜 먹거나 단팥죽도 시켜 놓고 종횡무진한 얘기를 늘어놓다 헤어지는 게 일과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술품 수장가들의 공통된 특징을 보면 미술에 대한 사랑이 취미를 넘어 벽(癖)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거의 미치는 것이다. 좋은 것을 보면 안 사고 못 배긴다. 재력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분수에 넘치는 것을 곧잘 넘보곤 한다. 그래서 골동에 빠지면 집안이 거덜난다고 하는 것이다.

창랑 장택상의 소장품이었던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 국보 제107호, 18세기, 높이 53.3㎝. 이대 박물관 소장.

창랑 장택상의 소장품이었던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 국보 제107호, 18세기, 높이 53.3㎝. 이대 박물관 소장.

1930년대에 활동한 초기 미술품 수장가들은 민족문화를 지킨다는 의미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존경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1937년 ‘조광(朝光)’ 3월호는 수장가 5명(한상억, 장택상, 이병직, 이한복, 황오의)의 집을 방문하는 ‘진품 수집가 비장실 역방기(珍品 蒐集家 秘藏室 歷訪記)’라는 특집을 싣고 있는데, 기자의 시각은 일본인들이 재력을 앞세워 우리 미술품을 마구 사갈 때 우리 수장가들이 나서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는 기사로 마무리되어 있다. 이 때문에 기자는 그동안 수집하는 데 얼마나 들었냐고 ‘타산적으로’ 물어보고 수장가는 ‘일이천 만원은 족히 되지요’라고 당당히 대답하곤 한다.

그렇다고 해서 수장가를 마냥 좋게만 본 것은 아니었다. 매사에 돈과 관계되고 잇속이 따르는 것은 인품을 해치기 쉬운 것이다. 더욱이 친일귀족, 대지주들이 도자기 하나를 쌀 몇백 섬과 바꾼다는 것을 일반 대중이 고운 시각으로 볼 리 만무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있는 사람이 자기 돈을 어디에 쓰든 일반인은 알 필요도 없고 또 다 알 수도 없다. 그러나 미술품의 소유권은 개인에게 있지만 그 정신적, 문화적 가치는 민족의 공유자산이기 때문에 누가 무엇을 갖고 있느냐에 관심을 갖는 것이며 그 작품의 이동과정을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토선 함석태의 소장품이었던 ‘백자 진사 금강산형 연적’ 18세기, 높이 16.8㎝. 평양 중앙력사박물관 소장.

토선 함석태의 소장품이었던 ‘백자 진사 금강산형 연적’ 18세기, 높이 16.8㎝. 평양 중앙력사박물관 소장.

■소장품의 최후는 다 달랐다

미술품 소장가들은 모두 작은 박물관을 갖고 싶어 하지만 박물관은 세우는 것보다 그것을 운영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에 튼튼한 재단법인을 설립하기 전에는 엄두를 낼 수 없는 것이다. 20세기 100년이 지나는 동안 미술관다운 미술관을 세운 곳은 간송, 호암, 호림, 한빛 등 몇몇 곳만을 꼽을 정도이다.

소전 손재형은 그렇게 뛰어난 컬렉션을 자랑했지만 정계에 투신하는 바람에 다 매각하고 정치하는 데 소진하였다. 나름대로는 생각이 있고 뜻한 바 인생을 살았겠지만 애호가로서 그 소장품을 지켰다면 그 명성이 지금 정도에 머물지 않았을 것이다.

창랑 장택상은 고서화, 도자기 모두에서 당대의 안목으로 이름 높았고 지식도 상당했다. 국보 제107호 ‘백자철화 포도문 항아리’(이대 박물관 소장), 추사 김정희의 ‘부작란(不作蘭)’(개인소장)이 창랑 구장품이었다. 그는 대단한 정략가답게 미술품 구입에서도 계산이 빨라 좋은 작품을 싼값에 구하는 솜씨를 발휘하여 그 잇속 때문에 많은 구설을 받기도 했다. 창랑 역시 정계에 투신하여 그 화려했던 컬렉션을 다 처분하였다. 그나마 유족들이 마지막까지 소장했던 작품들을 영남대박물관에 기증함으로써 수장가로서 자취만은 남겼다.

송은 이병직은 미술애호가로 평생을 살다가 마지막에는 전 수장품을 경매에 부쳐 모은 돈으로 육영사업에 기부하고 떠났다. 항문외과 의사였던 청원(靑園) 박창훈(朴昌薰·1897~1951)은 그 뛰어난 서화 컬렉션을 1940·41년 경성미술구락부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박창훈박사 소장품 경매회’를 열고 어디론지 떠났다. 이때 조선미술관의 오봉빈은 그의 행태를 아쉬워하면서 비판하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디론가 떠났다.

사람에게 팔자가 있듯이 유물에도 팔자가 있다고나 해야 할까. 우리나라 치과의사 제1호였던 토선(土禪) 함석태(咸錫泰·1889~?)는 1935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15권(조선시대 도자)에 조선 사람으로는 가장 많은 15점의 소장품이 수록된 수장가였다. 특히 그는 도자기 소품을 많이 모아 오봉빈이 ‘소물 진품 대왕(小物眞品大王)’이라 했다. 함석태는 일제강점기 말인 1944년 10월 일제의 소개령에 따라 자신의 소장품을 세 대의 차에 싣고 고향인 평안북도 영변으로 귀향한 이후 소식을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소장품으로 알려진 것이 지금 평양의 중앙력사박물관에 일부 소장되어 있다.

그런 중 다산(多山) 박영철(朴榮喆·1879~1939)은 인생행로와 애호가로서의 모습이 극과 극을 달리는 이중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전주의 대지주 아들로 일본육사 15기로 졸업한 뒤 친일 군인으로 활동하다 강원도 함경도 지사를 지낸 뒤 삼남은행장,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 등을 역임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임명된 전형적인 친일귀족이었다. 밀정 배정자의 세번째 남자이기도 했던 그는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박찬승 교수는 <친일파 99인>(돌베개)에서 그를 “전방위 활약을 보인 친일파”라고 했다.

유홍준 |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유홍준 |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그런 박영철이건만 미술품 수집에서는 가히 모범을 보였다. 소격동 144번지, 옛 경기고등학교 앞 지금의 선재미술관 자리에 저택을 짓고 살면서 위창 오세창의 지도를 받으며 뿔뿔이 흩어져 있는 고서화를 수집하여 역대 명화를 모은 <근역화휘>(천지인) 세 책과 조선시대 명현의 글씨를 거의 다 망라한 <근역서휘> 35책을 꾸며 불후의 문화유산으로 가꾸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 전 이를 모두 경성제국대학에 기증하였다. 박영철 기증품을 전시하기 위해 건립된 것이 오늘날 서울대학교 박물관의 전신인 경성제대 박물관이었다.

그런가 하면 박영철은 필사본으로만 전해지던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포함한 시문집을 집대성하여 1932년 활자본 <연암집>(전6책)을 간행하였다. 지금도 국학 연구자들은 이 책을 ‘다산본 <연암집>’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3·1만세운동을 망동이라고 비판하고 욱일중수장이라는 일본 훈장을 받은 박영철 인생에서 <근역화휘> <근역서휘> <연암집>이라는 민족문화 창달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 점에서 진실로 민족유산을 지킨다는 자세로 미술품을 수집한 분은 위창 오세창, 수정 박병래, 간송 전형필 정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분들이야말로 문화보국을 위한 애국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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