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피분 송크람의 ‘타이 민족주의’…그 뒤엔 제국주의 일본이 있었다

2017.04.07 20:45 입력 2017.04.07 21:05 수정
글·사진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타일랜드와 일본

시암으로 불렸던 타일랜드 국민들의 민족주의를 자극해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피분 송크람.

시암으로 불렸던 타일랜드 국민들의 민족주의를 자극해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피분 송크람.

이제까지 세 차례에 걸쳐 ‘주사위놀이 대동아공영권 일주’ 놀이판을 돌아다니면서, 제국주의 시기 일본과 북동유라시아 각 지역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오늘은 놀이판 이야기의 마지막으로 타일랜드와 일본의 관계를 살핀다. 실은 주사위 놀이판을 통해 베트남·인도네시아·캄보디아·미얀마 등과 일본, 그리고 한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풀어내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이 연재에서 일본의 대외관계사만 다루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신문지상에서는 이 정도로 접기로 하고 남은 이야기는 이 연재를 단행본으로 펴낼 때 담으려 한다.

놀이판으로 돌아가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사이공을 거쳐 타이국으로 들어간 여행자는 버마에서 밀림을 헤매다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되돌아가게 되어 있다. 타이국이라고 적힌 원은 빗금으로 둘로 나뉘어 있다. 빗금 오른쪽 아래에는 방콕의 왓프라깨오 사원이 그려져 있다. 방콕의 왕궁 주변에 있는 이 사원은 타이에서 가장 영험하다고 일컬어지며, 에메랄드 부처를 모신 사원으로 유명하다. 이미 가 보신 분도 많겠다.

시암이 서구 열강에 떼어준 영토를 보여주는 지도.

시암이 서구 열강에 떼어준 영토를 보여주는 지도.

한편, 빗금의 왼쪽 위에는 ‘일본인 마을의 옛 흔적(日本人町舊趾)’이라는 표지판과 함께 ‘야마다 나가마사 진자(山田長政神社)’라는 글이 적혀 있다. 1592~98년 임진왜란과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쳐 일본의 지배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크리스트교를 앞세운 유럽 열강이 일본을 위협하는 것을 막기 위해 쇄국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일본에 있던 크리스트교도는 동남아시아로 추방되고, 동남아시아 각지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은 귀국이 금지되었다.

당시 마닐라·바타비아·호이안·아유타야 등지에는 수천에서 수만명의 일본인이 마을을 이루어 살면서 무역업자, 용병, 노예 등으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을 니혼진마치(日本人町)라고 한다. 아유타야 왕조의 수도였던 아유타야의 니혼진마치에는 1000명에서 1500명 정도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음이 프랑스와 네덜란드인 등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아유타야에 정착한 일본인 마을의 수령으로 세력을 떨쳤던 야마다 나가마사의 흉상.

아유타야에 정착한 일본인 마을의 수령으로 세력을 떨쳤던 야마다 나가마사의 흉상.

그리고 이들 아유타야 일본인 마을의 수령으로서 활동한 것이 야마다 나가마사였다. 시즈오카현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인 용병 대장으로서 아유타야 왕조의 왕위 계승 문제에 개입할 정도의 세력을 지녔다. 하지만 당시 왕국 내에 존재했던 한족 화교 세력의 견제를 받아 좌천되었다가, 전투 중 전사했다. 그의 사망과 함께 아유타야 일본인 마을도 철거되었다.

20세기 들어 타이에 진출한 일본 세력은 아유타야 일본인 마을의 옛터 부지를 구입하고 1935년에 야마다 나가마사 진자를 세웠다. 아유타야 왕위 계승에 개입할 정도로 세력을 떨친 야마다 나가마사를 일본 군부는 “해외로 웅비한 영웅”이라며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의 선구자로서 그를 선양했다. 소설 <침묵>의 작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는 당시의 이러한 움직임이 오늘날까지도 동남아시아 지역 주민들에게 일본인의 호전적 이미지를 남기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오와다 데쓰오 <史傳山田長政> 284~285쪽).

현대 한국에서는 19~20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독립을 지킨 타일랜드와 독립을 상실한 대한제국이 대비적으로 이야기되는 경우가 있다. 타일랜드는 상당한 넓이의 영토를 서양 열강에 떼어주면서도 독립을 지킨 데 반해, 그러한 식으로라도 독립을 유지하지 못한 대한제국을 아쉬워하는 논조다. 또 어떤 사람들은 타일랜드가 영토의 일부를 포기하면서 독립을 유지한 것처럼, 예를 들어 대한제국이 영토 일부를 제국주의 세력에 할양하면서 독립을 유지했다면 어떤 일이 펼쳐졌을지를 대체역사(alternative history) 풍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당시 섬라 즉 시암(Siam)이라 불리던 타일랜드가 선택한 길을 대한제국과 비교하고 모델로 삼으려는 움직임은 대한제국 당시에도 있었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노관범 교수에 따르면, 중국 상하이의 서양 선교사단체 광학회가 발행한 월간지 ‘만국공보’ 1899년 4월호에 실린 ‘섬라중흥기(暹羅中興記)’가 대한제국 내에서 적지 않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한 관심을 증명하는 사례가 독립신문 1899년(광무 3) 8월8일자 기사 ‘즁흥론’이다. 또 이인재(1870~1929)라는 학자도 <구경연의(九經衍義)>라는 저술에서 대한제국이 섬라를 본받아 자강(自强)을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타일랜드의 독립 모델을 소개한 독립신문 기사.

타일랜드의 독립 모델을 소개한 독립신문 기사.

공산주의 운동가이자 한국문학 연구자였던 김태준(1905~49)은 <조선소설사>에서, 1908년(융희 2)에 나폴레옹 전기를 비롯해 로마·스위스·미국 등의 건국을 다룬 소설이 일제히 출판되었음을 지적한다. 물론 동시에 폴란드와 월남의 망국사도 출간되었지만, 한반도 주민이 독립 상실 직전까지도 망국의 역사뿐 아니라 ‘섬라중흥기’를 비롯해서 독립을 지키고 건국에 성공한 나라들의 역사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러한 열망이 대한제국 멸망 이후 숱한 임시정부를 탄생시키고, 이윽고 민주공화정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암 즉 타일랜드가 독립을 지키기 위해 영토의 상당 부분을 포기했다는 주장은 현재 세계적으로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통설에 대해 학계 일각에서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즉, 시암이 포기했다고 주장하는 영토가 사실은 시암이 실질적으로 지배하지 않은 지역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어느 한 나라의 지배 영역을 선으로 그어 표시한다는 사고방식이 당시 타이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베네딕트 앤더슨은 유명한 <상상의 공동체>에서 언급한 바 있다.

또, 일본의 근대 타이사 연구자 다카하시 마사키(高橋正樹)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컨대 시암이 실제로 지배하고 있던 땅을 열강에 할양한 것이 아니라, 열강과의 충돌 과정에서 영토를 상실했다는 피해의식에서 발현된 시암 국민들의 상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한국이 모르는 일본] (14) 피분 송크람의 ‘타이 민족주의’…그 뒤엔 제국주의 일본이 있었다

아유타야에 정착한 일본인 마을의 수령으로 세력을 떨쳤던 야마다 나가마사의 흉상(왼쪽 위). 주사위놀이판 ‘대동아공영권 일주’에 그려진 태국 방콕의 왓프라깨오 사원. 이 사원에는 유명한 에메랄드 불상이 있다.

아유타야에 정착한 일본인 마을의 수령으로 세력을 떨쳤던 야마다 나가마사의 흉상(왼쪽 위). 주사위놀이판 ‘대동아공영권 일주’에 그려진 태국 방콕의 왓프라깨오 사원. 이 사원에는 유명한 에메랄드 불상이 있다.

“동남아시아 근대 국가 이전 정치질서에는 영역적 지배가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실지(失地) 회복이란 빼앗긴 예전의 자국 영토를 되찾는다는 의미인데, 근대화 이전의 동남아시아 국가는 영역적 지배라기보다는 오히려 속인적(屬人的) 지배 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 영역 자체는 명확한 면적 넓이가 아니라, 권력자간의 주종관계에 의한 네트워크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타이 국가는 ‘실지회복’으로서 요구하는 영토를 식민지화 이전에 주권적으로(배타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것이 아니다… 타이의 실지는 식민지 체제와의 상호작용에 의한 주권적, 영토적, 민족적 근대국가 구축 과정에서 ‘발견’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アジア主義は何を語るのか>, 536~537쪽) 이리하여 탄생한 영토 상실의 신화는 시암 국민들의 민족주의를 자극했다. 이런 민족주의적 열망을 이용한 것이 군부였다. 1932년 6월23일에 쿠데타가 일어나 시암은 입헌군주제로 바뀌었다. 하지만 실제 권력은 군부에 있었고, 1938년에 집권한 군부의 핵심 피분 송크람은 이 열망을 이용하여 군부 독재를 정당화했다.

우선, 그는 1939년에 시암이라는 국명을 타이 즉 타일랜드로 바꾸었다. 이는 중화민국 윈난, 라오스, 버마 등에서 타이인과 같은 계통의 언어를 쓰는 집단을 모두 포괄하겠다는 대외 팽창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팽창주의를 대(大)타이주의 또는 범타이주의(pan-Thaism)라고 한다. 이 주장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상 윈난 지역에 존재했던 남조국(南詔國)을 세운 것은 타이 민족이며, 이후 몽골 세력에 밀린 타이 민족이 동남아시아로 이동해서 오늘날과 같이 분포하게 된 것이라는 학설이 등장했다. 현재 학계에서 이러한 주장은 통설적으로 부정되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정면의 <남조국의 세계와 사람들>에서 상세히 다루어지고 있다.

이처럼 명확하지 않은 논리에서 구축된 범타이주의에 입각해서, 피분 송크람의 타일랜드 정부는 타이어족이 거주하는 모든 영토를 무력으로 합병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러한 타이 민족주의에 힘을 빌려준 것이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운영하던 일본이었다. 중일전쟁 당시 국민당 정권이 윈난 지역을 거점으로 삼던 것을 눈엣가시로 여긴 일본군은, 타이어족에 속하는 다이족을 중국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준다는 명목으로 십송판나(Sipsong Panna, 西雙版納)를 폭격한다. 국립대만대학의 시에 시춘(謝世忠, HsiChun Hsie) 교수의 논문 ‘십송판나 다이족의 민족-정치적 적응과 민족적 변화’에 따르면, 특히 1942년에 일본군은 징훙·멍하이·멍지에·다루오·멍롱 등지를 폭격했다. 그리고 폭탄과 함께 범타이주의를 주장하는 팸플릿을 살포했다. 이를 받아본 십송판나의 다이족은 민족 통일의 열망이 생기기는커녕, 일본이라는 외세를 등에 업고 무력으로 민족 통일을 하겠다는 타일랜드 측에 강한 적대감을 품게 되었다. 더욱이 타일랜드의 타이인이 형님 격이고 윈난의 다이족은 아우 격이라는 타일랜드의 범타이주의는 다이족에게 혐오감을 주었다. 한반도의 분단과 내전과 통일 문제를 생각할 때 많은 시사점을 주는 사건이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시에 시춘 교수의 논문을 입수하는 데 도움을 주신 홍콩대학교 로레타 김과 레이던 대학 하비에르 차, 두 분 교수께 감사의 뜻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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