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농구 슈퍼스타에서 ‘예능 대세’로 거듭난 서장훈

[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서장훈 “방송은 내 인생의 보너스…농구는 평생 아쉬워할 꿈”

서장훈(44)은 1990년대부터 한국 농구의 ‘슈퍼스타’였다. 2m7의 장신 센터이면서도 몸놀림이 유연했고, 먼 거리에서의 슈팅도 뛰어났다. “서장훈을 데리고 있는 팀은 용병을 하나 더 보유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정도였다. 그의 개인통산 1만3231득점은 쉽게 깨지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뛰어난 기량만큼 ‘안티팬’도 많았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심판에게 과격하게 항의하는 모습이나 상대팀 선수와의 충돌 등도 이유였다. 이 때문에 그가 2013년 은퇴 후 연예계로 발을 내디뎠을 때 ‘성공적 안착’을 예견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하지만 그는 2015년 SBS 연예대상 신인상부터 지난해 쇼토크부문 최우수상까지 3년 연속 상을 거머쥐며 승승장구, ‘예능 대세’가 됐다. 그 과정에서 과거의 안티세력 상당수가 지지자로 돌아섰다.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깔끔 떠는 모습이나 반전의 허당, 재치있는 입담, 그리고 절묘한 타이밍의 ‘입바른 소리’가 인기의 비결이다. 인터뷰를 쉽게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그를 지난 1일 경기 일산의 한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그는 SBS <동상이몽2-너는 내운명>과 <미운 우리새끼>, JTBC <아는 형님>, MBN <카트쇼> 등 4개 프로그램에 출연 중이다.

선수 때와 다른 ‘반전매력’?
늘 유쾌한 성격 변함 없어

- 2015년부터 거의 쉼없이 4~6편의 프로그램에 동시에 출연하는데, 선수 시절보다 더 바쁜 것은 아닌지요.

“프로팀에 소속된 선수가 더 바쁘죠. 아침부터 잠 잘 때까지 팀의 정해진 스케줄에 맞춰서 살아야 하거든요. 반면에 방송은 녹화를 하고 나면 나머지 시간은 제가 자유롭게 쓸 수 있어요.”

- 농구선수 서장훈과 방송인 서장훈의 이미지가 많이 달라요. ‘새로운 발견’이라며 과거 싫어했던 분들까지 호감을 갖게 됐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변한 것은 전혀 없어요. 제가 선수시절 가진 철학이 있어요. 스포츠는 버라이어티쇼가 아니라는 것이죠. 최고의 팬서비스는 전쟁하듯 치열하게 최선을 다해 시합에 임하는 것이라 믿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어요. 그러다보니 심판에게 항의도 하고 화도 내면서 과한 모습이 보여진 것이라 생각해요. 우리나라 대중 정서엔 안맞을 수 있어도 저는 그런 게 없는 스포츠는 가식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코트 밖에서는 인간 서장훈의 성격대로 늘 유쾌하고 재미있게 살았어요. 저를 잘 아는 농구관계자들은 방송 모습이 사석에서와 너무 똑같아서 당황스럽다고 할 정도예요.”

- 어렸을 때부터의 꿈이 한국에서 농구를 최고로 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고 알고 있어요. 2014년 1월 MBC <사남일녀>를 통해 예능MC로 본격 데뷔했으니 방송인으로 꼬박 4년을 살았네요. 새롭게 생긴 꿈이나 목표는 없나요.

“제 꿈은 단순히 최고가 아니라, ‘한국에서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는 독보적인 농구선수’가 되는 거였어요. 제가 그 꿈을 이뤘는지는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들이 평가할 문제이니까요. 저는 최선을 다했고 더 이상 뛸 수 없는 나이가 돼 은퇴했어요. 그러니 더 이상 그 꿈을 꿀 수도, 꿈을 향해 더 노력할 수도 없으니 꿈은 거기서 끝난 거죠. 그러다가 생각지도 못했는데 방송을 하게 됐고 여기까지 흘러왔어요. 방송은 제 인생에서 엄청 큰 보너스라고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고 있어요. 하지만 제 전문분야는 아니죠. 방송으로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오히려 더 안될 것을 알기 때문에 최선은 다하되 부담은 없어요.”

- 선수시절 누구보다 승부욕이 강했잖아요. 기왕 시작한 방송, ‘천하장사’ 출신 강호동씨처럼 최정상의 예능MC가 되겠다는 포부는 정말 없나요.

“요즘 저처럼 운동을 하다가 방송으로 넘어온 사람이 많이 생겼어요. 그래서 호동 형님과 이들을 한 카테고리로 묶는 분들이 많은데 대단히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호동 형님은 은퇴 후 우연찮게 방송에 나와 이제 좀 방송을 하는 저와 같은 사람들과 같이 묶기엔 너무 큰 발자취를 남겼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어요. 26년간 방송했고 십수년간 최정상 예능MC 자리를 지켜온 분이잖아요. 저는 아무리 방송을 오래 한다고 해도, 죽었다가 깨어나도 호동 형님처럼 될 수 없어요. 스포테이너라고 해서 다 같은 범주에 넣는 것은 호동 형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에요.”

방송은 내 전문분야 아냐
최선을 다하되 부담 안 느껴

- 그럼 방송을 하는 이유는 뭔가요.

“은퇴 후 6개월 동안 아무것도 안 하면서 놀았어요. 평생을 규칙적인 생활을 하던 사람이 하는 일 없이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게 어렵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어요. 그러던 차에 방송을 하게 되면서,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고정적인 일을 갖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하나는 방송을 하면서 대중의 시선이 따뜻해진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에요. 저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줄면서 당분간은 이 일을 하면서 대중 앞에 저를 좀 더 솔직하게 알리면서 소통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요.”

시청자들이 방송을 통해 ‘반전’으로 느끼는 또 다른 부분은 평생 운동만 했을 것으로 짐작한 그가 박학다식한 면모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그는 운동을 하면서도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중2 때까지만 해도 언제 농구를 그만둘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운동선수는 공부를 못한다’는 이미지가 싫어서이기도 했다. 또 아버지 서기춘씨는 아들이 어릴 때부터 신문 1면부터 끝까지 다 읽도록 했다. 역사·인문·철학·소설 등 책 읽는 것도 좋아한다. 의식의 폭이 넓어질 수 있었던 이유다.

“부모님은 제가 운동에만 과몰입하는 것을 경계하셨어요. 교육적인 부분에 많은 신경을 쓰셨죠. 어렸을 때는 그게 피곤하고 힘들어서 싫었어요.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저 스스로 농구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또 거기에서 궁금증이 생기면 관련 책을 찾아서 읽는 습관이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신문은 원래 구독했었는데, 요즘엔 너무 시간이 없다보니 챙기지 못해 배달을 받지는 않아요. 하지만 요즘엔 다양한 경로로 보도를 접할 수 있잖아요.”

농구선수에서 방송인으로 변신한 서장훈씨가 지난 1일 경기 일산의 한 스튜디오 부근에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작위적인 포즈 요청에는 단호히 거부의사를 밝힌 그는 솔직하고 예민했다. 편한 운동복 차림이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청결함이 두드러졌다. 이상훈 선임기자

농구선수에서 방송인으로 변신한 서장훈씨가 지난 1일 경기 일산의 한 스튜디오 부근에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작위적인 포즈 요청에는 단호히 거부의사를 밝힌 그는 솔직하고 예민했다. 편한 운동복 차림이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청결함이 두드러졌다. 이상훈 선임기자

대중의 따뜻해진 시선 실감
당분간 더 소통하고 싶어

- <미운 우리새끼>는 나이 든 싱글남들, <동상이몽2>는 알콩달콩 사는 커플들의 이야기예요. 서장훈씨에겐 남 일 같지 않아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 것 같아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즐겁게 보고 즐겁게 진행할 뿐이죠.”

- 김구라씨와 ‘톰과 제리’처럼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설정인가요.

“에이, 설정으로 그렇게 되겠어요?”

그는 농구보다 야구를 먼저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OB베어스의 박철순 선수를 좋아해서 야구부에 들어갔다. 농구선수로 전향한 것은 선린중에서 휘문중으로 전학 갔을 때 야구부에 자리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차선책이었다. 하지만 그는 농구를 잘하지 못했다. 다른 애들이 전술과 공격, 수비 연습을 할 때, 혼자 체육관 벽에 붙은 골대 앞에서 슛연습만 해야 했다. 그런 그가 주목 받기 시작한 시기는 중3 때다. 고관절이 빠지는 부상으로 석달간 쉬는 동안 키가 무려 15㎝나 자라 1m97이 됐고 여기에 줄기차게 해온 슛연습 효과가 더해지면서 득점률이 놀랍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중3 때 나간 첫 대회에서 그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새로운 유망주가 탄생하자 농구계는 흥분했다.

- 선수시절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원이 유명하던데요. 방송인 아들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으시나요.

“부모님은 저보다 더 ‘농구선수 서장훈’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하세요. 지금도 제가 다른 일을 안 하고 있어 방송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죠. 방송에 나오면 재미있게는 보세요.”

그는 방송에서 유난한 ‘결벽’으로 자주 놀림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가 방송에서도 밝혔듯이 그러한 성격은 선수 시절 시합에서 이기려는 강박에서 갖게 된 징크스에서 비롯됐다.

- 선수생활을 그만뒀으니, 결벽으로부터 좀 자유로워져도 되지 않을까요.

“저는 전혀 불편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징크스와 루틴과 관련된 것이 있기 때문인데, 선수시절보다는 조금 더 편해진 것은 사실이에요.”

현주엽과 함께 휘문고를 전국 최고의 농구팀으로 이끈 서장훈은 1993년 연세대에 입학한 후 대한민국 농구역사에 새로운 기록을 남겼다. 1993~1994시즌 연세대가 대학팀으로는 처음으로 실업팀을 누르고 농구대잔치 우승을 차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요즘으로 치면, 최고의 아이돌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더 큰 무대에서 뛰고 싶어 대학 2학년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1년 만에 돌아온 일도 있었다. 1998년부터 2013년 은퇴 때까지 5개 프로팀을 거쳤고, ‘괴물’ 같은 실력으로 득점, 리바운드 등 기록을 쉼없이 갈아치웠다. 당시 코트에서 같이 뛴 현주엽(LG), 이상민(삼성), 문경은(SK), 조동현(KT)은 현재 모두 프로팀 감독을 맡고 있다.

- 농구 지도자가 될 생각은 없습니까.

“물론 저도 제가 가진 철학으로 감독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어요? 당연히 있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선수가 똑같은 길을 가야 하는 것은 아니에요. 제 인생의 유일한 목표이자 꿈은 이미 지나갔어요. 그 뒤에 지도자를 하든, 뭘 하든 그건 제가 목표한 꿈이 아니기 때문에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죠. 그리고 지도자로 돌아갈 것이냐에 대해선 지금 제가 답할 수도 없어요. 제가 뜬금없이 감독으로 가겠다고 하면, 해당 팀에서 저를 받아주나요? 프로농구팀 10개 구단에서 저를 감독으로 쓰겠다고 얘기한 적도 없잖아요.”

- 그 말은 감독 제안을 받으면 생각해보겠다는 뜻인가요.

“지금은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얘기예요. 제가 방송을 이렇게 많이 하게 될 줄은 저도 몰랐던 일이에요. 제 인생이 어떻게 변할지 저도 모르는데 앞날에 대해 뭘 어떻게 규정할 수 있겠어요?”

- 체력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나요.

“운동은 아무것도 안 해요. 챙겨 먹는 보양식도 없고요. 27년간 좋은 것 많이 먹었으면 됐죠. 선수시절보다 살이 5~6㎏ 쪘는데 식사량을 조금 줄인 것 외에는 특별히 건강관리하는 게 없어요. 시간이 지나면 운동도 좀 해야죠.”

[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서장훈 “방송은 내 인생의 보너스…농구는 평생 아쉬워할 꿈”

'건물주'로 희화화되지만
청춘 걸고 얻은 보상이죠
다양한 기부활동 계속할 것

‘서장훈’ 하면 연상되는 단어 중 하나는 ‘건물주’다. 방송에서 동료들이 자주 언급하며 놀리는 소재이기도 하다. 그는 양재동에 230억원대, 흑석동에 어머니와 공동명의인 100억원대 상당의 건물을 보유하고 있다. 양재동 건물의 경우, IMF 외환위기 직후인 2000년 28억원에 매수한 후 지하철 개통 등의 호재가 맞물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8배 이상 시세가 상승했다.

- 건물 소유는 선수 때 받은 거액 연봉을 아버지가 투자한 덕으로 알고 있어요.

“방송에선 건물주라는 게 희화화되고 있지만 제 청춘과 인생을 걸고 얻은 보상,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해요.”

- 재산은 누가 관리하나요.

“선수 시절부터 아버지가 관리해주시고, 관련해서 그 일을 맡아주는 사무실이 있어요.”

- 돈은 많지만 쓸 시간도 없을 텐데….

“저 나름대로 시간을 효율적으로 잘 쓰려고 해요. 저는 쇼핑을 좋아하지 않아요. 주로 지출하는 돈은 밥값 아니면 술값 정도죠. 시간은…,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이 더 힘들어요.”

- 돈을 향후 어떻게 운용하겠다, 하는 계획이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는 뭣하지만 좀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 좀 더 바르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어요.”

그는 1억원 이상 고액 기부자의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다. 선수생활 중에도 모교인 연세대에 저소득층 자녀 장학금으로 2억원을 내놓았고, 심장병 어린이 수술비 지원, 소년소녀 가장 장학금 지원 등 다양한 방법의 기부활동을 해왔다. 그가 말하는 ‘좋은 사람’은 ‘베풀고 나누는 삶’을 말하는 것으로 들렸다.

- 기부활동을 계속해왔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어릴 적부터 부모님으로부터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저도 유명한 선수가 되고부터 그렇게 사는 게 의무라고 생각했어요. 농구할 때도, 지금 방송활동을 하면서도 제 능력보다 과분하게 받았어요. 그런 만큼 사회 전반에 많은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해요.”

- 소개팅이 많이 들어올 것 같아요.

“많이 들어오지도 않지만 누가 제안을 해도, 하지 않아요. 시대도 많이 바뀌어서 (이혼이나 결혼에 대해)재미있게 이야기하고 다른 분이 놀려도 편하게 받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사적인 부분이 굉장히 조심스러워요. 앞날은 모르지만 지금은 혼자 있는 게 편하고 좋아요.”

‘한국에서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선수’가 되고자 했던 꿈을 이루고 그가 농구인생 1막을 마감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이제는 방송인으로서 탄탄한 입지를 구축한 그에게 ‘성취의 이면에 드는 아쉬움은 없는가’ 하고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돌아온 답은 그가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간에 ‘영원한 농구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사랑이든, 운동이든 지독하게 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답변이었다.

“은퇴할 때도 이야기했지만 지금도 더 훌륭한 선수가 되지 못한 게 늘 후회되고 안타까워요. 더 노력해서 더 좋은 성적을 거뒀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어느 시간, 어느 공간에서도 꼬리를 물면서 마음 한구석 깊숙이 크게 남아있거든요. 아마 죽는 날까지 생각할 것 같아요.”

<박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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