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말 한 마리를 수학 천재로 만든 인간과 동물의 무의식적 ‘교감’

2018.05.10 21:47 입력 2018.05.10 21:49 수정

인간과 동물은 다른 존재인가

20세기 초 독일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말 ‘영리한 한스’와 주인 빌헬름 폰 오스텐. 독일 중등학교 수학교사이자 아마추어 말 조련사였던 폰 오스텐은 한스에게 덧셈·뺄셈·곱셈·나눗셈 같은 간단한 수학과 음악 선율 구분법, 달력 읽기 및 독일어 읽기와 철자 등을 가르친 뒤 독일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한스의 능력은 독일 심리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인간이 동물의 행동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를 탐구하는 계기가 됐다. 출처 위키피디아

20세기 초 독일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말 ‘영리한 한스’와 주인 빌헬름 폰 오스텐. 독일 중등학교 수학교사이자 아마추어 말 조련사였던 폰 오스텐은 한스에게 덧셈·뺄셈·곱셈·나눗셈 같은 간단한 수학과 음악 선율 구분법, 달력 읽기 및 독일어 읽기와 철자 등을 가르친 뒤 독일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한스의 능력은 독일 심리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인간이 동물의 행동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를 탐구하는 계기가 됐다. 출처 위키피디아

보로로 역설

박사과정에 있을 때 강의 조교를 했던 수업 중 제목도 특이한 ‘도덕 의식: 어떤 인류학 개론’이란 수업이 있었다. 은퇴가 몇 년 남지 않은 노교수가 그 학교에서만 몇 십년 동안 가르쳐왔던 이 수업은 범상치 않은 제목답게 다루는 주제들과 강의 방식이 보통의 인류학 수업들과 다르면서도 마지막엔 항상 ‘인류학적 질문들’로 돌아오는 수업이었다. 이 수업에서 학생들은 인류학자들이 쓴 텍스트들 대신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니체의 <도덕의 계보>, 프리모 레비의 <아우슈비츠에서의 생존> 등을 읽었지만, 동시에 고전적 인류학적 주제인 ‘근대(인)와 타자’라고 하는 문제와 언제나 마주해야만 했다. 물론 수업은 학부생들에겐 매우 어려웠다. 아홉 명이나 되는 강의 조교들마저 강의 후, 그리고 각자의 분반에 들어가기 전, 매번 교수와 만나 서로 얼마만큼 이해하고 알아들었는지 점검하는 시간을 가질 정도였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수업은 매번 400명에 이르는 수강생들로 붐볐고, 이와 같은 인기 비결은 아마도 사람 좋은 옆집 할아버지 같은 노교수의 수십년간 갈고닦은 강의 내공과 대체불가능한 수업의 독특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어쩌다 세 번이나 이 수업의 조교를 하게 되었는데, 매 학기 내용들이 조금씩 달라졌던 이 수업은 언제나 브라질의 보로로 사람들 이야기로부터 시작했다. 보로로 사람들의 특이점은 그들의 삶에 새가 매우 중요한 존재이며, 심지어 “인간은 새”라고 말한다는 점이었다. 문제는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에 있었다. 근대적 사고에서 ‘인간’은 인간이고 ‘새’는 새일 뿐, 둘은 결코 같은 것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이 ‘인간은 새’라고 한다면, 분명 두 가지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즉 그들은 상징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단순히 ‘원시적’ 사고에 머물러 있거나 둘 중 하나다. 어떤 인류학자들은 전자를 택할 것이고, 또 어떤 인류학자들(즉 19세기의 인류학자들)은 후자를 택할 것이다. 하지만 둘 모두 그리 만족할 만한 대답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왜 보로로 사람들이 ‘인간은 새와 같다’고 하는 대신 ‘인간은 새이다’라고 하는지 여전히 설명할 수 없으며, 후자의 경우 단지 ‘문명과 야만’이라는 부차적(그리고 서구중심주의적) 틀을 가져와 설명하려 할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수업은 문제의 초점을 보로로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말을 수수께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근대적 사고 그 자체로 이동시켰다. 이제 우리의 질문은 ‘보로로 사람들의 수수께끼 같은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가 아닌, 서구의 사고에서 ‘인간은 새라는 발언이 왜 그토록 받아들이기 힘든 것일까’가 되었다. 그리고 이 역설을 이해하기 위해 수업에서 제공된 단서들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이원론’이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철학자 데카르트 ‘심신 이원론’

사회와 자연, 인간과 동물 등

근대 지식 토대된 이분법들 낳아

‘근대인인 적 없는 우리들’과 ‘반려종’

즉 수업은 보로로 역설에서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으로 이어졌다. 잘 알려져 있듯이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유명한 계몽주의 사상가였다. 이 명제는 그의 <방법서설>의 중심을 이루는 내용으로, 여기서 그는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생각의 주체로서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지금의 우리들에게는 다소 뚱딴지같아 보이는 데카르트의 이 ‘발견’은 근대(성)의 시작이 된 계몽주의로 이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마음, 정신과 몸, 물질의 세계를 분리된 영역으로 사고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와 같은 심신이원론은 생각하는 자아로서의 ‘주체’와 전자와 분리된 채 그만의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대상’ 사이의 철저한 분리를 기반으로 하는 근대 과학을 탄생시킨다. 포스트모더니즘 등 수많은 ‘포스트 ~주의’들이 범람하는 현재에도 종종 사람들은 주관성과 객관성이라는 근대적 이분법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곤 하는데, 이는 그만큼 우리가 데카르트와 근대의 유산 속에서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신과 신체의 분리를 주장하는 심신이원론은 수많은 이분법들, 즉 주체-대상(객체), 주관성-객관성 외에도 문화/사회-자연, 인간-동물의 이분법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인문·사회와 자연과학의 분리를 바탕으로 하는 근대 지식 체계의 뼈대를 구성하였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근대적 이분법은 많은 비판을 받아왔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과학과 과학자들을 연구해온 일군의 학자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자체가 근대적 범주들로 설명될 수 없음을 주장해왔다.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인 프랑스의 과학기술학자 브뤼노 라투르는 심지어 우리가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음’을 역설하기도 한다. 즉 정신과 신체, 주체와 객체, 사회와 자연, 더 나아가 인간과 동물 등의 구분은 해체되어야 할 범주들일 뿐 인간을 포함한 사물의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 주장의 특이점은 근대적 사고 또는 종래의 사회과학 논의에서 보통 제외되었던 사물, 동물, 자연현상 등 ‘비인간’ 존재들 또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주요 행위자들로 포함시킨다는 데 있다. 인간 행위자를 넘어선 다른 행위자들의 역할을 고려한다는 의미에서 이들의 논의는 종종 ‘탈인간(중심)주의’ 또는 ‘포스트휴머니즘’이란 말로 분류되기도 한다.

20세기 들어 이분법 비판 시각

비인간 또한 주요 행위자에 포함

상호작용하며 서로 생성해나가는

인간·동식물은 각각의 ‘반려종

이 분야의 또 다른 인물인 미국의 도나 해러웨이는 동물학, 생물학, 과학사, 철학, 인류학, 페미니즘 등 다양한 분야들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면서 동물-인간 관계에 관한 종래의 사고방식들을 뒤엎는 새로운 관점들을 제시해왔다. 해러웨이의 논의에서는 인간 대 동물이라는 구분은 물론 ‘인간’ ‘동물’이라는 범주들 자체가 불확실한 것이 된다. 그는 대신 인간, 동물, 식물, 미생물, 기계, 사물 등을 뚜렷이 구분되는 주체와 객체, 또는 행위자와 대상이 아닌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서로를 생성해 나가는 ‘반려종’들로 재명명하며, 인간이건 비인간이건 모든 존재의 ‘~되기’는 사실상 ‘함께 ~되기’임을 주장한다. 해러웨이의 ‘반려종’이 의미하는 바는 얼핏 비슷해 보이는 ‘반려동물’이란 개념과 비교했을 때 더 분명해진다. 최근 한국에서 ‘애완동물’이란 말 대신 쓰기 시작한 반려동물이란 말은 동물, 특히 펫으로서의 동물을 인간의 단순한 소유물 또는 대상이 아닌 인간과 같은 주체(또는 인간에 준하는 ‘반주체’)로서 인정하자는 뜻을 포함한다. 여기서 반려동물이란 개념은 동물을 소유물 또는 대상으로 대하지 말 것을 주장하지만, 그 주장이 전제하는 인간-동물, 주체-객체라는 종래의 범주들과 이분법들 자체를 폐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와 달리 ‘반려종’이란 개념은 그와 같은 범주들을 넘어선 관계성과 연결됨을 이야기한다.

1900년대 초, 4세된 말 ‘한스’

수학 문제 풀고 달력 읽어 화제

질문자의 몸 움직임 감지한 말

인간도 정답 찍는 ‘발굽’에 반응

‘몸’ 상호학습이 만들어낸 결과

영리한 한스 이야기

여기서 잠시 20세기 초 베를린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영리한 한스’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아직 네 살밖에 안된 한스는 간단한 수학 문제를 풀고 달력을 읽었으며, 음악 선율을 구분할 줄 알았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한스가 사람이 아닌 말이라는 사실이다. 1904년 9월 심리학자인 슈툼프 박사가 이끄는 조사단이 한스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베를린의 그리베노프가에 모였다. 이날 모인 열세 명의 전문가들은 한스에게 여러 가지 문제를 냈으며, 한스는 열성을 다해 대부분의 문제를 맞혔다고 한다. 한스는 오른 발굽을 침으로써 정답을 맞혔고, 조사단은 이 과정에서 어떠한 트릭도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몇 년 후 조사 자료는 슈툼프의 제자이며, 또 다른 심리학자인 풍스트 박사에게 넘겨졌다. 그리고 한스와 관련된 미스터리는 이후 그에 의해 완전히 밝혀지게 되었다고 회자된다. 풍스트는 한스가 사람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 문제들을 ‘푼 것’은 아니었으며, 대신에 질문자들로부터 전해진 시그널들을 감지하는 능력이 뛰어난 말이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즉 질문자들은 그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미약한 몸의 움직임들을 만들어냈는데, 한스는 그 차이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스 이야기는 이후 인간이 동물의 행동에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인간이 의도도, 심지어 인지도 하지 못한 몸의 시그널들이 동물들에게 감지된다는 풍스트의 발견은 그야말로 혁신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풍스트가 이와 같은 결론을 내린 지 100년이 지난 후 벨기에의 철학자 데스프레는 풍스트의 프레임에 문제를 제기하며 또 다른 해석을 시도한다. 그에 따르면 풍스트의 연구에서 원인과 결과, 또는 주체와 객체는 각각 인간과 동물로 고정되어 있으며, 이는 다시 인간이 동물에게 행사하는 영향력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데스프레는 이 프레임에서 간과되고 있는 것을 다음과 같이 상기시킨다. 질문자들이 그들 자신도 모른 채 한스에게 미세한 몸의 시그널들을 준 것과 같이 한스 또한 그들에게 비슷한 무언가를 몸을 통해 전달했던 것이 아닐까. 즉 질문자들은 질문을 던지는 동안 한스가 어떤 시그널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그들의 ‘몸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학습했다. 따라서 한스가 오른 발굽을 내리치면서 정답에 반응할 수 있었던 것은 질문과 답이 오가는 사이에 질문자들의 몸들과 한스의 몸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상호학습한 결과였던 것이다. 데스프레는 이 이야기를 통해 주체와 객체, 주체성과 객체성을 다른 방식으로 재사고하며, 특히 이성이 아닌 ‘몸’의 역할을 재발견한다. 즉 데카르트적 사고에서는 단순한 대상으로 머물러 있던 몸, 정확히 ‘몸들’은 한스의 기적을 가능케 하는 행위자들 그 자체가 된다. 따라서 데스프레식으로 다시 보면 ‘영리한 한스’의 이야기는 ‘영리한 몸들’의 이야기로 재명명될 수 있으며, 여기서 우리는 원인-결과, 마음-몸, 주체-객체의 이원론을 넘어선 관계성을 보게 된다.

식탁의 다리 하나

이번 봄 나는 예고없이 갑작스레 찾아온 죽음과 마주해야 했다. 어느 평범한 아침, 같이 살던 고양이가 베란다 창가에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고, 이미 심장이 멎은 후였다. 바로 그 전날 밤에도 신나게 뛰어놀던 세 살도 안된 아이였다. 말도 안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허망한 상태에서 비슷한 일을 겪은 적 있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인은 자신의 반려견이 떠난 후 ‘마치 식탁의 다리 하나가 없어진 느낌’이었다고 했다. 이 말은 내가 갑자기 다가온 상실감과 마주하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식탁의 다리 하나가 빠져버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물론 그 식탁은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된다. 다리가 없어진 식탁이 제대로 서 있을 수 없듯이, 공생하던 한 존재가 사라지면 다른 존재들은 주저앉게 된다. 우리가 다른 존재들과 만나 관계 맺고 살아가는 것은 각각 다른 다리들과 상판이 서로 만나 하나의 식탁을 만들고, 또 쓰이는 것과 같다. 또는 다리들과 상판이 서로 만나 또 다른 존재인 식탁이 되듯이, 우리는 수많은 존재들과 상호작용하면서 다른 존재가 되기를 멈추지 않는다. 마치 해러웨이의 반려종들과 데스프레의 몸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공진화(coevolution)하듯이 말이다.

소중한 존재의 떠남은 ‘되기’를 멈추는 대신 그 방향을 바꾼다. 반듯이 서 있을 수 없는 식탁은 더 이상 식탁이라 불릴 수 없을지는 몰라도 존재가 아닌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근본적 경험론에 관한 시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짜로 존재하는 것은 만들어진 것들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있는 것들”이라고.

▶필자 전의령

[전문가의 세계 - 전의령의 동물이야기] (4) 말 한 마리를 수학 천재로 만든 인간과 동물의 무의식적 ‘교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채플힐) 인류학과에서 한국의 시민사회가 이주와 다문화에 대해 담론화하는 방식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신)자유주의 통치성, 반다문화와 우익 포퓰리즘, 동물과 생정치에 관한 논문들을 써왔으며,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연결되어 있다는 인류학적 믿음 하나로 다양한 연구 주제를 밀어붙이고 있다. 현재 전북대학교 고고문화인류학과 조교수로 강의와 연구를 병행 중이며, 전주와 파주를 오가며 세 마리의 고양이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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