⑮“친일파의 악행을 고발한다”

2018.07.08 21:33 입력 2018.07.08 21:34 수정

친일부역자, ‘청년단’ 동원…중립 인사·우익세력까지 마구잡이 테러

해방 후 이승만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조직하고 친일파를 허용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자 일제에 협력했던 친일 인사들은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서북청년단 같은 극우 세력을 불러들였다. 충청도 청산 지방에서는 서북청년단과 태극폭력단이 선량한 주민들을 무차별 폭행해 사망자가 발생했다. 친일파는 이렇게 좌익 척결이라는 미명 아래 계몽운동을 벌이는 지식인까지 테러 대상으로 삼았다. 사진은 1948년 서북청년단 단원들이 맥아더 장군 환영대회를 열고 있는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해방 후 이승만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조직하고 친일파를 허용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자 일제에 협력했던 친일 인사들은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서북청년단 같은 극우 세력을 불러들였다. 충청도 청산 지방에서는 서북청년단과 태극폭력단이 선량한 주민들을 무차별 폭행해 사망자가 발생했다. 친일파는 이렇게 좌익 척결이라는 미명 아래 계몽운동을 벌이는 지식인까지 테러 대상으로 삼았다. 사진은 1948년 서북청년단 단원들이 맥아더 장군 환영대회를 열고 있는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1947년 한국독립당으로부터 민주한국독립당이 분리되어 나왔다. 한국독립당은 김구를 지도자로 하는 정당이었지만, 그 안에 있었던 중도 우파 세력들이 분당해 나온 것이다. 이들은 강력한 반탁운동에 반대하면서, 좌우 합작을 강조하는 세력으로 그중 핵심 인사는 권태석이었다. 일제강점기 신간회에 참여했던 그는 해방 이후에는 한국독립당의 조사부장을 역임했고,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던 중 해주에서 사망했다.

[박태균의 버치 보고서]⑮“친일파의 악행을 고발한다”

권태석이 1947년 9월 버치에게 건의서를 올렸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충청도에서 벌어졌고, 이를 해결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사건은 앞서 서북청년단 관련 문건에도 나오는, 당시에 널리 알려져 있었던 테러 사건이었다. 사건의 배경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충청도 옥천의 친일 지주 원씨
해방 후 청년·농민에 압박 받다
이승만 ‘친일파 용허’에 날개

원씨, 사설테러단 등 불러들여
학교 교장·교회 장로·농민 등
마구잡이 구타·구금·살인까지

“종래 조선 농촌지방 대부분이 일제 지배과정에 있어서는 친일파들의 강압적 영도하에 있었던 것이 일반적인 사실이었다. 그러나 청산지방은 일제지배 후 종래부터 사회적 지위와 명망에 있고 경제적 기초를 가진 조만하, 조준하(미국 오하이오주 오벌린 대학 졸업), 이세영, 김윤중, 안주철, 박희태 등 다수의 반일 애국지사들이 은거생활을 하고 있었던 관계로 청산지방 농민들은 일제강점기에 있어서나 또는 8·15 해방 전후를 통하여 일부 극좌적 청년들을 제외하고는 전면적으로 그들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아왔다. 그 영향력으로 인해 악독한 일제까지도 그들의 양해를 구함이 없이는 농민들을 마음대로 사역하기 곤란하였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청산지방에 있어서의 유일한 전 일제주구인 원○○는 해방 이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었다. 원○○는 일제강점기에 있어서는 항상 일제세력을 배경으로 하야 조, 이, 전, 안, 박 등 다수의 애국지사들과 대립하였을 뿐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무고(誣告)하여 그들의 평화적 생활을 박해 또는 위협하였고 해방 후는 친일파로서 출입조차 못하였을 뿐 아니라 농민들 앞에 나서지 못하였다. 그러한 제 관계는 원○○가 해방 전후를 일관하여 그의 사감(私感)에 의한 청산지방의 평화적 질서를 파괴하는 악랄한 행동을 감행하게 된 것이며 그것은 청산지방 인사들의 정치적 중립태도와 농민들의 자연발생적인 좌익추수(추종) 경향이란 부작용을 가져왔다.”

청산 지역의 경우는 해방 직후 많은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었던 친일부역자와 지식 청년들, 그리고 농민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일제의 강압 때문에 서울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지식인들은 농촌에 내려가 다양한 형태의 계몽 운동을 했다. 소비조합도 만들고, 농민조합도 만들면서 식민지 권력을 등에 업고 있었던 지주들로부터 농민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노력을 했다. 그리고 이들은 해방 이후 해당 지역 건국준비위원회와 자치위원회의 주도 세력이 되었다.

이러한 조직들은 친일 지주들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지역의 청년과 농민들은 해방 이후 친일 지주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지주들의 땅을 몰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편파적인 지주 소작 관계를 청산하고자 했다. 미군정이 시행한 3.7제 소작료도 철저하게 시행하고자 했다. 소작료도 마음대로 하고 비료값마저 소작인에게 전가하면서 이들을 머슴같이 부리던 지주들로서는 이러한 상황이 결코 편안할 수 없었다.

이 건의서에 나오는 원○○라는 사람은 해방 직후 자치위원회의 활동을 고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자치회 청년으로부터 매를 맞는 사건이 발생했다. 얼마나 모욕스러웠겠는가? 이 지역 최고의 갑부이자 유지인데, 새파란 젊은 것들에게 매를 맞다니. 그러던 그에게 최고의 선물이 날아왔다.

“이승만 박사가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조직하고 친일파를 용허한다는 선언을 하자 원○○는 곧 재빠르게 독립촉성국민회 청산지부를 조직하야 자칭 지부장이 되어 국민회를 확대 강화하려 하였으나 원○○가 중심이 된 관계로 지방인사들의 불참가는 물론이며 농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이것이 다음과 같은 원○○의 반감적인 평화질서파괴 행위를 불러왔다.

(1)1946년 4월17, 18, 19일 3일간 계속적으로 영동으로부터 태극폭력단을 인입하야 야간 주택침입구타(김갑룡) 등 사실을 감행하였고 계속하여 관내에 있는 사설테러단인 백골단 주먹 동맹 등을 청산에 불러들여 지방 신사들과 농민들을 위협하였다.

(2)1946년 7월에 해방 직후 청년들이 자신을 징계한 사실과 관련, 옥천경찰서에 해방 직후의 자치위원회에 대한 고소를 제기하였으나 거절을 당하였고, 오병우 서장의 내임을 기회로 새로이 재차해 사실을 고소하야 김윤중, 안주철, 박희태, 송행순 외 20여명 지방유지를 구금 40일간 취조케 한 후 오 서장과의 합의로 검사국으로 송치한 사실.(그러나 곧 전부 석방되었다.)”


친일 지주는 지역을 장악하기 위하여 청년단을 불러들였다. 서북청년단과 광복청년단이었다. 이들은 그 지역 출신이 아니었다. 조용했던 마을은 삽시간에 전쟁터로 변하기 시작했다.

“1946년 9월2일 제1차 사건의 진상

(1)9월2일 오후 5시경 테러단 약 40여명은 트럭으로 옥천군 청성을 경유하여 청산에 들어와서 청산경찰서 앞에서 내리는 즉시로 3대로 편성하여 1대는 지서에 대기, 1대는 초등학교로, 1대는 교평리로 분산되어 테러를 감행했으나 동민들의 자위적 대항에 의하여 실패하였다.

(가)초등학교에 파견된 테러대는 그들의 고성 소리에 놀라서 도망한 교직원 외 아직 도망하지 못한 송득현 교장을 체포하여 의식불명에 이르기까지 구타한 후 사체와 같은 중상을 입혀 교외로 나갈 즈음에 교평리로 파견된 테러대는 다수 동민들의 대항에 의한 충돌 중에 2명이 죽는 불상사가 일어나고 기타는 분산적으로 지서로 도피하였다.

(나)이에 테러단을 뒤따라 간 동민들은 송 교장 타살이란 소식을 듣고 학교로 가서 송 교장의 참상을 발견 구호하였으며 테러단이 지서로 결집되는 것을 본 다수 동민들이 지서에 모였다.

(다)이때 테러단들은 격분되어 있는 동민들에 욕설을 하여 서(署)로 들어오라는 등으로 조롱하였다. 이에 동민들은 경찰에게 테러단의 인도를 요구하였고 경찰이 불응하자 일부 동민은 테러단을 향하야 약간의 투석이 있었고 다른 일부 동민들은 서로 들어가려 하였다. 경찰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총을 발사하였으며 동민 중 문규창 1명이 좌흉부에 관통상을 당하고 일시 수습되어 곽정식 지서장 교시(금번사건은 외부 테러단의 폭행에 원인이 되었다는)에 의하여 동민들은 해산되었다.”


권태석이 작성한 건의서 원문.

권태석이 작성한 건의서 원문.

사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1년 후 더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다.

“1947년 9월2일 하오 9시경 옥천으로부터 기동부대가 청산에 도착하여 농민들은 평상 상태로 회복하라고 선포한 후 총검거는 총소리와 아울러 개시되었다.

(가)가옥 내외를 불문하고 남자는 발견되는 대로 무조건 검거하여 옥천서로의 압송이 개시되어 다수한 농민들이 산중 기타 각지로 도망 또는 피신하였고

(나)하서리 부근에서는 14세 정도의 목동이 소를 몰고 가다가 공포로 도망하는 중 무참히 총탄에 절명되어 사망하였다.”


4일 후 청년단이 재차 들어왔다.

“1947년 9월6일 하오 5시경 테러단은 청주로부터 또다시 청산에 들어왔다. 그들은 즉시 수대로 분산하여 하오 8시경까지는 구민회(區民會) 완장 없는 사람이면 보는 대로 또는 부락 가호를 침입하야 테러를 가하였고 하오 8시 후는 가옥 가구의 파괴와 구타를 병행하였다.

1. 가옥파괴 및 구타의 진상

(1)이기만(기독교 장로이며 명망이 있는 교역자) 가옥을 파괴하며 의식 불명에 이르기까지 구타하였고

(2)김범중 상점은 파괴하며 상품은 전부 없이 하였고 이세영, 조준하, 조만하 가옥은 전부 파괴되였고 김윤중은 가옥의 파괴뿐만 아니라 시계, 라디오, 미싱, 양복장, 식기, 농구, 가구 일체를 파괴하고 그중 팔목시계 한 개, 와이셔츠, 레인 코트 기타 사상 정치와 관계없는 문서 등이 없어지고 이능종은 가옥의 파괴와 토지문서를 압수하여 갔고 김영환은 가옥과 금고를 파괴한 후 현금 만원을 가져갔고 기타 김영환, 김갑룡의 가옥과 송 교장 관사 등은 일부만을 파괴하는 등 일대 수라장으로 변하였다. 이 사건에 있어 특히 주목하여야 할 것은 인도자가 (독촉)국민회원인 것이었다.

2. 익 7일은 아침 일찍부터 국민회원의 강제모집과 이세영씨의 국민회의 지도에 대한 강제승낙을 받은 후 면장의 참석 강요하에 독촉국민회의를 개최하야 이능종 부인 권영순씨에 대하여 테러단들이 무수한 모욕과 난행을 가한 후 삭발이란 조선여성에 대한 최대의 모욕을 가하였다.

3. 이러한 상황을 남기고 테러단은 국민회의의 간단한 송별연이 있은 후 원○○의 여송을 받으며 옥천으로 돌아갔다.”


권태석이 건의서를 올렸다는 메모와 권태석의 명함.

권태석이 건의서를 올렸다는 메모와 권태석의 명함.

사건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4일 후 또 발생했다. 3차 사건이 이어진 것이다.

“1947년 9월11일 또다시 테러단은 옥천으로 입청하야 20일까지 하면리 지전리 등 수부락에 대한 가옥파괴와 구금을 감행하여 농민들은 전전긍긍하고 있는 중 30일에는 유지 이세영, 김원중, 권영식, 원영희 등 제씨(중립적인 신사)를 옥천서로 압송하였다.”

민주한국독립당 권태석 건의서
“좌익 아닌 우익에 의한 테러로
원씨, 반감적 평화질서 파괴 행위
지역 인사 ‘좌익 옹호’ 상황 초래”

전쟁 통해 강화된 ‘반공’ 권력
‘좌익 척결’ 내세워 영향력 키워
‘12년간 권좌’ 이승만 당선 동력

건의서를 작성한 권태석은 테러는 좌익이 아니라 우익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우익이나 중립적인 사람들, 그리고 기독교 장로까지도 테러 대상이 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친일 지주가 청년단을 통해 테러를 자행하는 것에 경찰의 지원 혹은 묵인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좌익 척결이라는 명분하에 자신의 사적 이익과 감정하에서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체포, 박해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농민들이 좌익을 옹호하도록 만드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마치 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아마도 해방 직후 대부분 지역에서 이런 갈등과 테러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일제에 부역했던 사람들이 다시 권력을 잡아갔다. 좌익을 척결한다는 명분하에 중도적인 인사들,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지역에서 계몽사업을 했던 지식인들이 모두 테러 대상이 되었다. 한국전쟁을 통해 강화된 ‘반공’ 권력은 ‘부역자 청산’이라는 미명하에서 이들의 영향력을 공고히 만들었고, 이는 결국 이승만이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간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가장 기본적인 동력이 되었다.

필자 박태균 교수

‘버치 보고서’를 발굴한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현대사 전문가다. 1966년생으로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을 지냈다. KBS <인물현대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자문을 맡고, CBS 라디오 <박태균의 한국사>를 진행했다. 2015년에는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에서 40회에 걸쳐 해방 이후 한국 사회 주요 담론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국전쟁>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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