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증거 없어도…정황·간접증거로 충분하다

2018.08.12 21:37 입력 2018.08.12 21:38 수정

화차를 탄 용의자 X

인간이라면 도저히 저지를 수 없을 것 같은 잔혹하고 끔찍한, 한마디로 ‘비인간적’인 사건들이 잊을 만하면 벌어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인간의 악의성마저 떠올리게 하는 ‘짐승만도 못한 짓’의 사건도 직접적인 증거가 없는 경우 무죄가 선고되기도 한다. 사진은 다른 사람으로 위장해 자신의 인생을 지우려던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화차>의 한 장면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인간이라면 도저히 저지를 수 없을 것 같은 잔혹하고 끔찍한, 한마디로 ‘비인간적’인 사건들이 잊을 만하면 벌어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인간의 악의성마저 떠올리게 하는 ‘짐승만도 못한 짓’의 사건도 직접적인 증거가 없는 경우 무죄가 선고되기도 한다. 사진은 다른 사람으로 위장해 자신의 인생을 지우려던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화차>의 한 장면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아래 글에는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와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다. 이런 말을 미리 해둬야 할 만큼 오늘 사건은 추리소설을 방불케 하는 면모가 있다. 그것도 걸작 두 권을 합친 만큼이다.

죽은 오자영의 보험금 30억원을
받으려던 살아있는 오자영 체포

2010년 6월17일 밤 부산의 한 병원 응급실에 한 여성이 실려 왔다. 그녀를 데리고 온 송재희(가명)는 환자를 오자영(가명), 41세라고 밝혔다. 오자영은 이미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모친이 달려와 얼굴을 보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시신은 곧 화장되고 재는 바다에 뿌려졌다. 의사가 작성한 사체검안서에는 사인이 심근경색으로 추정된다고 적혔다. 두 달 후 보험회사 사무실에 송재희가 등장했다. 죽은 오자영의 보험금을 대리 수령하러 온 것이었다. 오자영은 30억원의 사망보험에 가입해 있었다. 그런데, 돌연 형사들이 나타나 그녀를 에워쌌다. 송재희가 날선 목소리로 항의했지만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송재희가 아니라 오자영으로서였다. 어떻게 된 일일까. 이 여자가 오자영이라면 죽은 사람이 자신의 보험금을 받으러 왔단 얘기다. 그렇다면 죽은 여성은 누구란 말인가?

보험에 가입한 사람이 죽었는데
그가 보험금을 받으러 온 상황
오자영은 송재희의 시신을 이용해
자신의 사망보험금을 타내려 했다

이 사건은 보험회사의 신고로 시작됐다. 오자영은 수입이 전혀 없는데 30억원의 사망보험에 가입해 있었다. 보험금만 매달 300만원에 달했다. 오자영의 사망보험금을 찾으러 온 송재희라는 여성은 아무래도 수상했다. 보험회사 직원이 지문을 확인해보려 일부러 펜을 빌려줬을 때, 이 여성은 펜을 쓴 후 수건으로 싹싹 문지른 다음 돌려주었다. 빈틈이 없었다. 하지만 보험금 수령서에 쓴 필적과 보험 가입서 필적이 동일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사진도 흡사했다. 보험에 가입한 사람은 죽었는데, 그 여자가 보험금을 받으러 온 괴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경악한 보험사 직원은 경찰에 알렸고, 송재희 행세를 하던 오자영은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죽은 사람은 오자영이 아니라 송재희였다. 시신을 병원에 싣고 온 사람이 오자영이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바뀌었고, 오자영의 모친도 짜고서 우는 연기를 했다. 말하자면 오자영은 송재희의 시신을 이용, 자신이 죽은 것처럼 위장해 사망보험금을 타내려 했던 것이다. 41세의 오자영은 얼핏 보면 20대로 보일 만큼 동안이었다. 그래서 26세의 송재희 역할이 가능했다.

오자영은 송재희를 자살사이트에서 만났다고 했다. 메일로 연락해 그날 공원 벤치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이미 자살한 뒤였다. 병원으로 급히 싣고 갔고, 그러다가 자신이 거액의 생명보험에 가입된 사실이 떠올라 사람을 뒤바꾸려는 발상을 했다는 것이다. 즉 보험사기는 인정하지만 송재희의 사망과는 전혀 관계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렇다면 죽은 송재희는 어디에 살던 누구인가? 경찰은 추적에 나섰다. 주소지는 대구였다. 찾아가보니 노숙인 쉼터였다. 송재희는 4년 전에 이 시설에 들어와 생활하고 있었다. 오자영은 사건 3개월 전 쉼터 측에 메일을 보냈다.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는데, 여성 노숙인과 일하고 싶다면서 “그곳에 30대 여성들도 있나요”라고 문의했다. 부모가 없거나 찾아오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오자영은 6월16일 노숙인 쉼터를 직접 찾아갔다. 자신이 운영하는 어린이집의 보모로 고용하겠다며 송재희를 데리고 나갔다. 송재희는 천진난만하게 들떠서 오자영을 따라나섰다. 그날 밤 송재희가 죽었다.

이런 사실들이 확인되자, 오자영은 인정했다. 자살사이트에서 만난 게 아니라 자신이 노숙인 쉼터에서 데리고 나온 것이 맞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과는 여전히 관계없다고 일관했다. 6월16일 아침 7시에 쉼터에서 데리고 나와 자신의 차로 부산까지 왔다. 그날 밤 11시30분 공원 벤치에서 캔맥주를 마시며 이야기했다. 맥주를 더 사서 벤치로 돌아와 보니 송재희가 쓰러져 있었다. 송재희는 “이제 계획대로 되었다, 마음이 편하다”는 말을 했고 상태가 이상해 보여 차에 태운 후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결국 송재희의 죽음은 살인이 아니라 자살이나 돌연사라는 주장이었다. 오자영의 말에 몇 가지 모순점은 있었다. 공원에서 3㎞나 떨어진 곳에서 송재희 휴대전화의 발신 흔적이 나왔다. 또 공원에서 차로 병원까지는 겨우 5분 거리인데, 시신은 이미 식어 있었다는 간호사의 진술도 있었다.

오자영의 실체가 더 밝혀졌다. 그녀는 대학 동창과 동거하다 아이를 출산했는데, 동창 명의로 계약서를 위조해 ‘차치기’라는 사기행각을 벌이다가 구속됐고, 동창과는 헤어졌다. 오자영은 원래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씀씀이가 크고 사치가 심해 늘 돈에 쪼들렸던 것으로 밝혀졌다. 병원 입원확인서를 위조해 보험금을, 창업자금 명목으로 대출금을 편취하기도 했다. 졸업증명서와 임대차계약서도 위조해 범행에 사용했다.

송재희가 죽던 날은 오자영이 법정에 출석하는 날이었다. 사기사건으로 피소되어 있었는데, 보험회사와 합의를 못하면 구속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 절박함이 범행의 한 동기가 되었을 것으로 검찰은 추측했다. 오자영은 범행 당일 법정에 나가는 대신 보험회사에 ‘이 편지를 받을 때쯤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요…’라는 글을 보내기도 했다. 동기는 또 있었다. 오자영은 13세 연하의 애인에게 깊이 빠져 있었다. 그 남자를 붙잡으려 자산가의 딸 행세를 하며 돈을 물 쓰듯 했다. “20억원을 물려받았으니 결혼해 해외로 나가 살자”고 유혹했다. 그러다 결혼경력과 아이의 존재가 들통나 결별을 통보받자, 인터넷에서 태아의 사진을 내려받아 남자의 새 여자친구에게 전송해 결국 둘이 헤어지도록 만들었다. 이 정도의 집착을 보인 만큼 애인과의 새 출발을 위해서라도 많은 돈이 필요했을 터였다.

1심에선 무죄, 2심은 달리 판단
결국에는 유죄, 무기징역 확정

검찰은 오자영을 살인 혐의로 기소했다. 1심도 오자영을 유죄로 인정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시신이 화장되고 없어 직접 증거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정황과 간접증거로 충분히 범행이 인정된다고 보았다. 송재희가 자연사하거나 자살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했다.

오자영은 항소했고, 기사회생한다. 2심 재판부는 달리 판단했다. 오자영이 계획적으로 살인했다고 의심은 되지만, 송재희가 돌연사하거나 자살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송재희가 노숙인 쉼터에서 주변 사람들과 잘 어울렸고, 오자영을 따라나서면서 들뜬 상태였던 건 인정했다. 하지만, 애당초 가정문제로 쉼터에 입소했고, 남자친구하고 다투고 헤어지기를 반복했으며, 직장생활에 적응 못해 괴로워한 점,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태, 수면 중 가위눌림 등도 겪어, 우발적·충동적으로 자살을 결행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했다. 송재희는 잦은 음주로 간이 좋지 않았고, 불우한 환경과 남자친구와의 갈등으로 우울증을 앓았으며, 여러 종류의 치료약을 복용해왔다. 이런 점들을 봤을 때 급성간성혼수나 심근경색 같은 원인으로 돌연사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판단의 배경에는 물론 ‘시신이 없다’는 사실이 자리하고 있다. 병원에 실려 왔을 당시 시신에는 약물이나 구토 같은 흔적도 없었다. 그래서 타살이라고 확신하기 애매했다. 재판부는 사망원인으로만 본다면 ‘원인불명’이며, 목격자도 물증도 없는 이런 사건에서 ‘자세히 알려지지 않은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살해하였다’는 모호한 공소사실을 덜컥 유죄로 인정하기는 곤란하다고 밝혔다. 아마도 재판부의 판단을 흔든 원인 중 하나는 의사가 사체검안서에 ‘심근경색’이라고 적었다는 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이 역시 오자영이 만들어낸 거나 다름없다. 오자영은 송재희를 데리고 가면서 미리 병원에 전화로 ‘심장질환자가 있다’고 알렸다. 간호사는 심장환자 차트를 만들어놓고 기다렸고, 의사는 그 차트를 보고 심장질환자로 취급했던 것이다.

2심이 부여한 오자영의 해방은 잠시였다. 대법원은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했고, 이어 고등법원에서 재차 유죄가 되고 무기징역이 최종 확정됐다. 아무래도 시신이라는 물증, 그리고 직접증거가 없다는 점만으로 벗어나기에는 반대편의 정황이 너무 많은 사건이었다. 오자영은 인터넷을 통해 ‘메소밀’ ‘그라목손’ ‘살인방법’ ‘사망신고절차’ ‘살충제’ ‘질식사’ ‘사망보험금’ 등을 검색했다. 메소밀과 그라목손은 맹독성 농약이다. 메소밀은 술에 섞으면 알아채기 어려운 반면 효과가 증대된다. 오자영은 자살하려고 찾아본 검색어라고 항변했다. 그런데, 그녀가 그토록 붙잡으려 했던 남자친구가 결정적 증언을 했다. 사건이 일어난 지 2주 후, 헤어지자고 했더니 메소밀을 꺼내 자살하겠다고 소동을 피웠다는 거였다. 메소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게 밝혀지자, 오자영은 사건 이후에 산 거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혐의를 지우지 못했다.

이 사건은 서두에 말한 <화차>를 떠올리게 한다. 다른 사람으로 위장해 자신의 인생을 지우려던 여자의 이야기다. 단지 범죄의 재료로 삼기위해 노숙인을 죽였다는 점은 <용의자 X의 헌신>을 떠올리게도 한다. 두 소설 다 사건 전에 국내에 번역된 책이다. 혹시 오자영은 이 소설들에서 범죄의 영감을 얻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직접증거가 없는 경우, 대중이 거의 확신에 가까운 유죄에의 믿음을 가진 사건에도 종종 무죄가 선고돼 공분을 사는 일이 많다. 이 연재에서 다루었던 사건만도 듀스 김성재 살인사건, 낙지살인사건, 한국판 아만다녹스 사건, 동두천 대처승 아내 살인, 캄보디아 아내 보험 살인 의혹 사건이 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는 중간에 한 번의 무죄 판결이 있긴 했지만 대체로 어렵지 않게 유죄가 확정되었다. 심지어 시신이 화장돼 없음에도 그랬다.

무죄를 받은 위 사건들과 다른 결과를 빚은 근본적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내 나름의 견해는 있지만 더 이상 쓰지 않으려 한다. 이유는 이 무서운 이야기 자체가 앞서 말했듯 왠지 너무나 소설을 방불케 해서다. 범죄분석이 오히려 완전범죄의 계시와 유혹을 주는 게 아닌지 우려도 든다. (법원에서 나오면 어떤 이야기든 막힘없이 쓸 것 같았다. 하지만 논픽션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 연재는 끝나지만, 차마 쓰지 못한 나머지 이야기들은 소설로 전하고자 한다).

만약 오자영이 보험사에 안 갔다면
완전범죄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자만이 부른 실수로 악행 드러나

이 사건도 자칫 묻힐 수 있었다. 만약 오자영 자신이 직접 보험회사에 등장하지 않고 법적 수령권자인 모친을 보냈더라면 완전범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모친을 믿지 못했을까, 남자친구 때문에 성급했던 걸까, 아니면 자신의 범죄에 취했던 걸까. 모름지기 자만은 화를 부른다. 아무튼 그 실수 덕에 악행이 드러났다.

인간의 악의가 이쯤에 이르고 보면 만화 <기생수>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우주생물체가 숙주인 주인공에게 말한다. “‘악마’라는 것을 책에서 찾아봤는데, 그것에 가장 가까운 생물은 역시 인간인 것 같아.” <시리즈 끝>

■ 필자 도진기

[도진기 변호사의 판결의 재구성]직접증거 없어도…정황·간접증거로 충분하다

1994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관이 되었고, 2010년 단편소설 ‘선택’으로 한국추리작가협회 미스터리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이후 8년 동안 주중에는 판사로, 주말에는 소설을 쓰는 작가로 살면서 10여권의 책을 썼다. 2017년 2월 공직을 떠나 변호사가 됐다. 작품으로는 <정신자살>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순서의 문제> <모래 바람> 등이 있고, 2014년 <유다의 별>로 한국추리작가협회 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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