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사부곡’ 부른 박지원 의원

박지원 의원은 성공한 재미 사업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해 DJ맨으로 살아왔다. ‘정치 9단’으로 불리는 그는 여든을 바라보는 지금도 방송 출연과 SNS 활동을 통해 혜안과 입담을 과시한다. 우철훈 선임기자

박지원 의원은 성공한 재미 사업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해 DJ맨으로 살아왔다. ‘정치 9단’으로 불리는 그는 여든을 바라보는 지금도 방송 출연과 SNS 활동을 통해 혜안과 입담을 과시한다. 우철훈 선임기자

 박지원 의원(77·민주평화당)이 지난해 10월 뇌종양으로 세상을 뜬 아내를 그리는 책을 펴냈다. ‘정치 9단’ 노정치인의 사부곡(思婦曲)이라니. 지난 4일 받아본 책 <고마워>(메디치)는 글 반, 사진 반이었다. 많지 않은 문장 속에 죽은 아내와의 옛 추억과 사랑 고백 그리고 뒤늦은 참회가 담겨 있었다.

 박 의원은 뛰어난 입담과 유머감각, 적확한 판단력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입’이었다. DJ 정부에서 요직을 두루 거치며 ‘부통령’ ‘대(代)통령’으로 불렸지만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대북송금 특검으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뚝이처럼 재기하며 끈질긴 정치생명력을 보여줬다. 박 의원은 지금도 일주일에 4~5개의 방송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고 SNS로 젊은층과 수시로 소통하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6일 서울 정동의 한 식당에서 박 의원을 만났다. 파란만장한 32년간의 정치인생. 낮잠을 자도 기자실에서 잘 정도로 누구보다 언론과 빈번하게 접촉한 그이지만, “개인사를 주제로 인터뷰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 부인을 떠나보낸 지 5개월이 되어갑니다.

 “아내가 떠난 후 큰딸 부부와 손자가 미국에서 들어와 같이 살고 있어요. 손자 보는 재미로 살지만 집에 들어설 때마다 아내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죠. 아내의 부재를 메꾸려고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거실 벽에 아내의 사진을 크게 걸어놨어요. 제 침대 옆에도 사진을 놓아두었고요. 그런데 새벽 2시면 잠이 깨요. 제가 잠버릇이 고약해 이불을 걷어차는 버릇이 있는데, 그간 아내가 덮어준 걸 몰랐던 거예요. 돌아보니 싸웠던 것도 사랑이더라고요.”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숨을 고른 그의 눈에 물기가 살짝 비쳤다가 사라졌다.

 - 생전에 많이 다퉜습니까.

 “많이는 아니지만 싸울 때도 있었죠. 친구들이 자기 마누라에게 이렇게 당했다고 이야기하면 요즘엔 그것도 부러워요. 제가 아내에게 잘못한 게 많다는 후회가 들어요.”

 - 부인과는 1960년 목포 문태고 졸업 후 재수학원에서 만나 7년간 연애했다고요.

 “제가 의대 진학 실패 후 재수를 위해 등록한 광주중앙입시학원에서였어요. 한눈에 반해 7년을 사귀고 1969년 결혼했죠. 대학 졸업 후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아내에게는 여러 좋은 혼처가 들어왔어요. 하지만 단식투쟁 끝에 저와의 결혼을 허락받았어요. 저도 재벌 사위가 될 뻔했지만 ‘그깟 재벌 사위? 차라리 내가 재벌이 되는 게 낫지’ 하고 거절했고요.”

젊은 시절의 박지원 의원과 부인 이선자씨의 단란했던 한때. 박지원 의원실 제공

젊은 시절의 박지원 의원과 부인 이선자씨의 단란했던 한때. 박지원 의원실 제공

 - 자각증세가 없어 2017년 11월 중순에서야 부인이 뇌종양 말기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죠. 당시 한두 달 생존 판정을 받았는데, 어떤 생각이 가장 먼저 들던가요.

 “다른 생각은 안 나고, ‘살기만 하라’는 생각만 했어요. 저는 이전까지 어떤 경우에도 아내가 먼저 죽는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어요.”

 - 그래도 수술 후 지난해 10월 중순 세상을 떠났으니 1년 가까이 더 함께한 시간이 있었어요. 지역구(목포)를 챙기면서 병간호하기가 쉽지 않았겠습니다.

 “두 딸이 부랴부랴 미국에서 들어왔지만 아내는 제가 떠먹여줄 때만 잘 먹었어요. 그래서 삼시세끼와 운동은 제가 꼭 챙겼어요. 다만 금요일에는 지역구인 목포에 내려갔다가 월요일 아침에 돌아오는 금귀월래를 반복했지요.”

 - 박 의원이 출판사에 먼저 출간을 의뢰했다고 들었습니다.

 “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를 사랑하는 모습을 제가 보고 배운 적이 없어요. 장모님도 우리 부부의 결혼 직후 돌아가시는 바람에 장모님 사랑도 받아본 적 없고요. 우리 사위들과 손자도 미국에서 살아서 장모·외할머니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했죠. 두 딸과 사위, 손주들에게 엄마, 장모, 외할머니의 추억을 남겨주고 싶어 책을 낸 거예요.”

젊은 시절 아내 속 많이 태워 책 부제로 ‘미안했고 잘못했고 사랑해’ 속죄

 - 책의 부제가 ‘미안했고 잘못했고 사랑해’예요. 많은 함의가 있는 표현 같은데, 혹시 젊은 시절 여자 문제로 부인 속을 많이 태운 것에 대한 미안함은 아닙니까.

 “(빙그레 웃으며) 사실 그게 제일 크죠. 지금 세대와 달리 우리 때만 해도 여성이면 인내해야 한다는 교육을 부모님으로부터 많이 받아서인지 아내는 모든 걸 참아줬어요. 요즘도 우리 딸들이 ‘아빠가 속 썩여서 엄마가 빨리 가셨다’며 저를 공격할 때면 할 말 없는 제가 입을 꾹 다물어요.”

 - 부인 속을 꽤 썩였나 봅니다.

 “그건 뭐, 얘기 안 하는 게, 하하하…. 저는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지만 아내는 상처가 많았을 거예요. 인내하며 표현하지 않아 제가 잘 몰랐을 뿐이죠. 대신 아내는 저더러 술집에는 다녀도 절대 단골집을 만들지 말라고 당부했어요. 제가 집착이 강해 식당이든 뭐든 어떤 하나에 빠지면 그 길로만 가거든요. 과거 술집엔 여성들이 있으니까 아내가 걱정했던 것 같아요.”

 - 정치하느라 가정을 돌보기 어려웠겠지요.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아침회의를 할 때도 저는 가족과 친구하고 식사하는 사람은 정치할 자격이 없다고 말했어요. 삼시세끼를 언론계 사람과 먹으라고 강조했고 실제로 제가 그랬어요. 매일 새벽에 나와 자정이 넘어 술에 취해 귀가했죠. 그러다보니 신혼여행 빼고 우리 부부가 단둘이 휴가를 간 게 2017년 여름 화엄사로 4박5일 다녀온 것뿐이었어요.”

 박 의원 부부의 휴가는 수십년간 DJ 내외와 함께였다. 모시는 입장인 만큼 맘껏 즐길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부인 이씨의 부재에 이희호 여사의 상실감도 크겠다는 말에 박 의원은 “이 여사님은 제 아내가 사망한 것을 모르신다”고 답했다. 아내를 찾으면 “어디 갔다”고 둘러댄다고 했다.

 - 정치한다고 매일 만취해 자정 넘어 귀가했다면 부인이 화가 날 듯도 한데요.

 “곤드레가 되어 현관문을 열 때마다 미안한 마음에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불렀어요.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 하리라~’ 하고요. 그러면 아내는 제가 부축받고 온 것만 아니면 ‘나와!’ 해요. 제 어머니가 신혼 때 아내에게 ‘남편 운동시켜라. 안 그러면 우리집 가족력 때문에 빨리 죽는다’고 했거든요. 아버님, 둘째형, 여동생도 일찍 사망했고, 집안 사람들이 혈압·당뇨·심근경색이 많았어요. 비틀거리며 아내 따라 1시간 반 동안 걸으면 술도 깨고 땀도 나고 잠도 푹 잤어요(웃음).”

 - 부인의 남편 챙김이 극진했군요.

 “그런 저를 흉내내다 국회부의장을 한 선배 정치인 한 분은 혼쭐이 났다고 하더라고요. 술 마신 날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이 노래를 불렀는데, 사모님이 ‘이 미친 영감쟁이가 어디서 무슨 짓 하고…’ 하며 쫓아냈다는 거예요. 운전기사는 이미 가버려 어쩔 수 없이 아파트 층계 복도에서 아침까지 잤대요.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너는 어떻게 그렇게 기술적으로 노래를 부르며 집에 들어갈 수 있느냐’(웃음).”

 - 건강 면에서 집안 내력이 있다면 박 의원의 건강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습니까.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고3 때까지 늑막염을 7번이나 앓았어요. 우리 때는 늑막염에 걸리면 죽는 경우가 많았고 저 역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어요.”

젊은 시절 박지원 의원과 부인 이선자씨. 박지원 의원실 제공

젊은 시절 박지원 의원과 부인 이선자씨. 박지원 의원실 제공

‘가족·친구하고만 밥 먹는 사람은 정치할 자격 없어…언론인과 먹으라’고 말해

 박 의원은 1942년 전남 진도 출생이다. 정치권에 들어서기 전의 이력에 대해선 그 스스로 언론에 자세히 말한 적이 없다. 1972년 미국으로 건너가 가발사업으로 큰돈을 벌었고, 1980년 뉴욕한인회장에 당선됐으며 1983년 당시 미국 망명 중이던 DJ와의 만남을 계기로 국내 정치권에 발을 내디뎠다는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 부친(박종식)이 독립운동 유공자인데, 일각에서는 빨치산이었다고 공격합니다.

 “아버님은 목포상고 다닐 때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해 유죄판결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어요. 6·25 발발 2년 전에 돌아가셨죠. 그런데 1987년 대선 때 진도 선거대책위원장, 이듬해 평민당 공천 과정에서 제 아버님이 빨치산이었고 인민군 대장으로 6·25 때 전남지구 사령관으로 근무했다는 음해 문건이 나돌았어요. 저를 시기하는 세력들이 만든 것인데 당시 이 음해소문을 듣고 DJ까지 저를 못 만나겠다고 했을 정도예요. 이러한 일로 지금도 가짜뉴스가 돌아다니는 겁니다.”

 - 초등학생일 때 책상 앞에 장래 희망으로 ‘야당 원내총무’를 써붙여놨다고요. 개념조차 알기 힘든 나이인데, 과장 아닙니까.

 “아버지의 사망 후 우리 가족은 할머니 댁으로 들어갔어요. 진도 최초로 작은아버지를 일본에 유학 보냈을 정도로 조부모님의 경제사정은 괜찮은 편이었어요. 자유당 시절 우리 집안 사람들 중에는 민주당 국회의원으로 출마해 당선·탈락된 분들이 꽤 있었고 집에서는 신문을 봤어요. 저항의 반골 분위기 속에서 살다 보니 어린 저도 야당 원내총무를 꿈꾼 거죠. 돌이켜 보면 YS(김영삼)처럼 대통령이라고 적었으면 더 좋았을 뻔 했습니다(웃음).”

 - 어쨌든 결국 꿈을 이뤘어요.

 “야당 원내대표를 3번이나 했으니 꿈을 세 번 이룬 거죠(웃음).”

 - 대통령 꿈은 안 꿔봤습니까.

 “정치하면서 왜 안 꿨겠어요. 지금도 꾸고 있습니다.”

 - 결혼 이듬해인 1970년 럭키금성사(반도상사)에 입사했던데, 1972년에 미국 이민은 왜 가게 된 건가요.

 “미국에서 자리 잡은 큰형님이 오라고 해서 갔어요. 형님이 마련해준 종잣돈을 밑천 삼아 가죽소재 의류 수입상에 뛰어들었는데 두 번이나 실패했어요. 밑천 다 까먹고 좌절이 컸죠. 그러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가발을 한국에서 수입해 미국에 팔았는데 성공적이었어요. 재외동포 최초로 수출유공자상도 받았고, 맨해튼에 제 소유의 빌딩도 몇 개 있었어요.”

 - 뉴욕한인회장에 나서 1980년 당선됐는데, 정치인생을 위한 포석이었나요.

 “돈이 벌리니까 훗날 정치를 하려면 공공서비스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른여섯살 때인 1978년 뉴욕한인회장을 찾아갔어요. ‘내가 한인회 이사를 하겠다, 돈도 많이 내겠다’고 하니 청년대표를 시켜주더라고요. 2년 후 뉴욕한인회장이 됐고 이듬해 미주지역총연합회장이 됐어요. 뉴욕평통자문위원회 회장이기도 했고요.”

 - 그 시절 전두환 전 대통령의 취임을 축하하고 방미환영위원장을 맡았었죠. 1982년 KBS와의 인터뷰에선 “한국에는 전두환 대통령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며, 12·12와 5·18은 영웅적 결단이었다”고 했고요. 미국에서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씨와 어울렸다는 얘기는 사실인가요.

 “제가 지인의 소개로 전경환과 친한 적이 있고 전두환을 칭송한 것은 사실이에요. 전경환이 제게 전국구 의원직을 제안했지만 전두환이 해외교포는 주지 않는다고 해서 국회의원이 안된 것도 사실이고요. 당시 전경환이 미안하니까 제게 굉장히 큰 사업이권을 제안했어요. 강남의 터미널 인근 부지를 헐값에 사라는 거였어요. 계약하러 귀국했지만 정치를 하면 이 일이 족쇄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계약을 안 하면서 전경환과 사이가 나빠졌어요.”

 - 1982년 미국으로 망명한 DJ와는 어떻게 인연이 맺어졌나요.

 “저는 전두환·전경환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미국교포 중에 돈도 많고 제일 잘나갔어요. DJ도 저를 만나야 경제적 문제가 해결되죠. 게다가 호남사람이니 당연히 찾아와야 할 놈이잖아요. DJ가 여러 사람 통해 메시지를 전했지만 안 갔어요. 전두환·전경환에게 깊숙이 빠져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뉴욕에서 ‘독립신문’을 창간한 김경재에게 제가 사무실도 내주고 지원을 많이 했어요. 결국 그의 권유로 1983년 DJ를 만났고, 2시간 반 만에 DJ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쏟았어요.”

 - 어떤 이야기를 나눴길래요.

 “역사와 역사의식, 민주주의, 인권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제 과거가 부끄러워 눈물이 쏟아졌어요. 무릎 꿇고 과거를 반성하며 선생님과 함께 가겠다고 했어요. DJ는 제가 전두환이 아니라 대한민국 대통령을 환영한 것이니 잘못한 게 없다고 하시면서 무엇보다 한국 물건을 많이 수입해 팔았으니 우리 노동자를 위해 기여한 거라고 하셨어요. 독립신문에 도움을 준 것도 공로라고 하셨고요.”

 - 이후 어떤 역할을 했나요.

 “DJ는 제가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당신과 가깝다는 말을 일절 하지 말고 서울을 오가며 메신저 역할을 해달라고 했어요. 한국에 들어가 플라자호텔 스위트룸에 방을 잡아놓고 DJ의 지시가 담긴 편지를 한국의 야당 및 민주화진영 인사에게 전달하고, 답장을 다시 미국의 DJ에게 전달했어요. 당시만 해도 공항 출입 시 저는 프리패스였거든요. 어느 해는 제가 한국에 11번이나 나왔더라고요.”

민주당 대변인 시절 박지원 의원과 부인 이선자씨 그리고 두 딸.  박지원 의원 제공

민주당 대변인 시절 박지원 의원과 부인 이선자씨 그리고 두 딸. 박지원 의원 제공

 그는 1987년 10월 DJ가 만든 평민당에 입당했고 1992년 14대 전국구 의원(민주당)이 돼 DJ의 ‘입’으로 급부상했다. 1998년 DJ 정권이 출범하자 청와대 공보수석, 문화관광부 장관을 역임했고 2001년 다시 청와대로 들어와 정책기획수석·비서실장을 지내며 대통령과 임기를 함께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이 이뤄질 당시에는 막후에서 대북밀사·특사로 남북의 의견을 조율해 회담을 성공시켰다. 생전 DJ는 박 의원을 한마디로 “지칠 줄 모르는 성실함, 놀라운 정치적 순발력”이라고 표현했다.

남·북·미 정상에 ‘김정은 오판 말라, 트럼프 정치적 욕심 버려라, 문 대통령 나서라’

 - 1992년 평민당 수석부대변인을 시작으로 민주당과 새정치국민회의에서 ‘명대변인’으로 이름을 날리며 대변인을 4번이나 했어요.

 “대변인이 되고 저의 첫 일성은 ‘기자 여러분은 개찰의 법칙을 적용해달라’는 거였어요. 저는 개떡같이 이야기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기사를 써달라는 주문이었죠. 대신 성심성의껏 노력해서 모든 뉴스는 DJ로부터 나오게 하겠다고 했어요. 저는 새벽에 모든 신문을 읽은 후 오전 6시30분이면 동교동에 가서 DJ께 보고드리며 대안도 제시했어요. DJ와 간단한 토론을 거쳐 기자들에게 브리핑했죠.”

 - 주요 언론사를 출근도장 찍듯 매일 드나들며 인사하고, 허구한 날 기자들과 밥·술을 먹고, 심지어 낮잠까지 기자실에서 잔 것으로 알아요. 그래서 우호적 기사가 늘었습니까.

 “그럼요. 아침 브리핑부터 시작해 스트레이트 기사, 박스 기사, 가십까지 나와야 하는데, 어떨 때는 가십거리가 없어요. 그러면 JP(김종필)를 조지면 반드시 기사화가 됐어요. 일종의 전략이었죠(웃음). JP는 엄청 싫어해 나중에 롯데호텔 식당에서 DJP연합 할 때 웃으면서 박지원 대변인에게는 사과받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사과도 하고 노래도 했어요.”

 - 참여정부 들어서자마자 대북송금 특검으로 구속(2003년)됐어요. 수감돼 있을 때 눈 때문에 고생이 심했던 것으로 아는데, 왼쪽 눈은 어쩌다 의안(義眼)을 하게 된 건가요.

 “미국에서 살 때 왼쪽 눈에 유전성 녹내장이 와 실명을 해서 수술 후 의안을 했어요. 한쪽 눈에 녹내장이 오면 다른 쪽 눈으로 전이될 가능성이 커 매년 정기적으로 전이 여부를 검진해야 하는데, 비서실장을 하던 국민의정부 마지막 2~3년 동안 미국에 못 갔어요. 구속 후 오른쪽 눈에도 녹내장이 전이된 것을 알았죠. 항소심 재판장에게 하나 남은 눈을 잃지 않도록 입원치료 기회를 달라 했지만 재판장이 녹내장을 백내장으로 잘못 읽고 허락하지 않았어요.”

 - 결국 그 다음달 결심공판이 끝난 후에야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됐죠. 차 안에서 펑펑 울음을 쏟았다던데, 구치소에서는 어떻게 견뎠나요.

 “일주일간 ‘다이아막스’ 등 7가지 안압 강하 및 녹내장 치료약과 심장병·디스크 치료제 등 18가지 약을 복용했어요. 다이아막스는 절대 사흘 이상 복용하면 안되는 약이에요. 결국 그 후유증으로 쓸개에 결석이 생겨 2004년 가을에 떼어내는 수술까지 받았죠.”

 박 의원은 “저는 일목요연(一目瞭然)은 되는데, 와신상담(臥薪嘗膽)은 안되는 사람”이라며 크게 웃었다. 평생의 핸디캡이었을 의안에 이어 쓸개를 제거한 것까지 사자성어에 빗대 유머감각을 발휘한 것이다.

다시 태어나도 정치인으로 살고파…손혜원 목포 출마한다면? 이길 자신 있어

 - 누구보다 부인이 옥바라지하느라 고생이 컸겠군요.

 “매일 면회를 왔지만 매일 또 우편으로 편지를 보내왔어요. 저도 매일 아내에게 편지를 써보냈고요. 나중에 알았지만 아내는 제가 감옥에 있는 동안 에어컨도, 히터도 한번 안 켜고 살았더라고요. 저와 똑같이 겪겠다면서.”

박지원 의원이 지난 6일 서울 정동의 한 식당에서 지난해 세상을 떠난 아내 이선자씨와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박지원 의원이 지난 6일 서울 정동의 한 식당에서 지난해 세상을 떠난 아내 이선자씨와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 그런 시련을 겪고도 오뚝이처럼 재기했는데, 끈질긴 정치생명력의 비결이 뭔가요.

 “늘 뉴스와 함께 살고, 현장 속에 있는 거죠. 저는 지금도 아침 5시30분에 일어나 13개 신문을 읽어요. 누구는 그러더라고요. 젊은 말진 기자들을 항상 만나기 때문이 아니냐고요. 예전에는 부장, 국장, 주필, 사장을 만났는데, 요즘은 언론사가 많아져서인지 출입기자들이 말진들이에요. ‘아이 러브 말진’입니다(웃음).”

 - 일주일에 방송 고정출연을 4~5개씩 하고, 중독으로 보일 만큼 SNS 활동도 실시간으로 하는데, 이제는 좀 쉬엄쉬엄해도 되지 않습니까.

 “할 일이 남았기 때문이에요. 어떠한 경우에도 문재인 대통령이 성공해서 진보개혁세력이 재집권해야 DJ가 말한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관계가 살고 또 호남이 사니까요. 저는 진보개혁세력의 정권재창출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갈 겁니다.”

 - 2000년 대북밀사·특사로 활약했는데,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이 시점에서 남·북·미 세 정상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 뭔가요.

 “김정은 위원장에게는 오판하지 말라,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정치적 욕심을 버려라,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나서라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 다음 생에 태어나도 직업정치인으로 살고 싶습니까.

 “만고풍상을 겪었지만 발전하는 역사 속에서 제가 생산적인 일에 동참할 수 있어 행복했다고 생각해요. 만족도가 아주 높아요. 그러니 다시 태어나도 정치인으로 살고 싶습니다. 하하하….”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다소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 투기 논란에 휩싸인 손혜원 의원(무소속)과 설전을 벌였는데, 내년 총선에서 손 의원이 박 의원 지역구인 목포로 출마한다면 어떨 것 같으냐고. 돌발 질문에 박 의원은 5초쯤 머뭇거리다가 “나올까요? 나오면 좋죠. 이길 자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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