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충동’ 내 마음부터 살펴보자

2014.01.02 19:06
강용혁 | 분당 마음자리한의원장

댓글을 달고 싶은 충동이 이는 순간. 바로 자신을 돌아볼 절호의 기회다. 인터넷이든 신문기사든 내 콤플렉스가 건드려져 외부로 투사된 결과물이 바로 ‘댓글’이기 때문이다.

댓글은 때론 합리적 주장과 사회참여로 포장된다. 하지만 그 이면의 동력은 콤플렉스다. 평소 무의식 지하창고에서 꿈틀거리다 취중진담처럼 올라온다.

과연 우리를 열폭하게 만드는 실체가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일까. 아니면, 내 안에 이미 존재하던 폭발 직전의 콤플렉스가 그들을 건수로 잡은 것일까. 왜 특정 내용을 접하면 그냥 넘기지 못하고 댓글을 달고 싶을까.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댓글도 오만가지 세상사 중에서 정확히 내 콤플렉스와 마주칠 때의 결과물이다. 댓글은 외부로 ‘투사’하고픈 충동과 상통한다. ‘투사’란 나의 어두운 그림자를 외부로 던져버리는 것이다. 그 속엔 ‘갖고 싶었으나 갖지 못했던’ 좌절된 욕구가 꿈틀댄다. 집단적 투사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경제난을 두고 남한과 미국을 탓하며 폭발 직전의 민심을 달랜다. 진보나 보수가, 여당과 야당이, 다양한 이익집단이 서로를 탓하는 과정도 비슷하다. 인터넷과 신문은 투사와 콤플렉스 배설의 장이 된다.

그럼 투사는 나쁜 것일까. 길 가던 꼬마가 넘어졌을 때 애꿎은 돌멩이를 탓하면 빨리 울음을 그친다. 이처럼 투사는 태생적이며 본능적인 자기방어 수단이다. 문제는 투사가 일상화되는 것이다. 당장에는 톡 쏘는 탄산음료가 시원한 듯하지만, 결국 갈증만 더 심해진다.

독설을 품은 댓글에 쾌감을 느끼는 사이, 자신을 돌아볼 양분은 점점 사라진다. 정작 나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 돌부리만 탓하느라 자신이 주의를 기울이지 못해 계속 넘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우울증이나 화병, 성격장애로 인한 질병들이 그렇다. 한결같이 ‘상대와 세상이 나를 우울하고 화나게 만들었다’는 관점이다. 그러나 상대나 세상은 내 맘대로 호락호락 움직여주지 않는다. 그러니 방법이 없다며 체념한다. 결국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내가 없어져야 한다는 착각에 빠진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고 가볍게 말하지만, 수년째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는 건 왜일까. 바로 실마리를 자기 내면에서 풀어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투사의 가장 큰 대가는 ‘본질을 회피하는 태도’가 고착되는 것이다. 밖으로만 내던지느라 내면을 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우울증이나 화병이 잘 낫지 않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아닌 배우자와 자식, 그리고 세상까지 바꾸어야 자기 병이 낫는다는 딜레마 때문이다.

독설에 환호하며 댓글로 뿜어내는 사이, 자신을 지탱할 내면의 두 발은 힘을 잃어간다. 배설만 하기에 속은 이내 더욱 공허해진다. 공허해진 만큼 더 강한 갈증만 찾아온다. 최근 3년간 악성댓글로 형사처벌을 받은 100명 중 40대와 50대가 각각 30명으로 가장 많았다. 악플은 애들이나 장난삼아 다는 것이란 통념을 깨는 조사결과다.

댓글을 달고픈 충동이 이는 순간, 자기 내면의 콤플렉스에 먼저 시선을 돌려야 한다. 콤플렉스 자체는 문제가 안된다. 대신 콤플렉스가 없다는 교만과 착각이 병을 키운다. 내 댓글 이면에는 감추어진 욕망의 추함이 없다고 믿는 것, 그것이 나를 병들게 한다. 그러나 뱀파이어에게 강한 햇살을 비추듯, 스스로가 인지하는 순간 콤플렉스는 힘을 상실한다. ‘아하~ 내게 이런 마음이 있었구나! 그래서 울컥해 댓글을 달려 했구나’를 관조하는 것이다.

산중엔 동안거가 한창이다. 스님들의 ‘묵언 수행’처럼 새해엔 ‘댓글 수행’에 도전해보자. 댓글 충동이 일 때마다, 그 원천인 내 마음부터 살펴보는 것이다. ‘두 마음이 살고 있다. 아, 내 가슴에!’라고 절규하던 파우스트처럼 말이다. ‘탐욕의 가운데 있으면서 탐욕에서 벗어나 살자’는 법구경 가르침대로, 산중 수련보다 결코 가벼운 목표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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