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과 체제를 바꿀 수는 있어도 정체성까지 흔들지는 못한다

2019.06.22 06:00 입력 2019.06.22 06:01 수정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무간도 - 마이자오후이·류웨이창|2002년 홍콩

경찰조직에 침투한 범죄단체 조직원 유건명(류더화·왼쪽)은 그와 반대로 범죄조직에 잠입한 비밀경찰 진영인(량차오웨이)이 자신을 조여오자 진영인의 신분기록을 삭제한다. 두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상대의 정체성을 위협한다.  디스테이션

경찰조직에 침투한 범죄단체 조직원 유건명(류더화·왼쪽)은 그와 반대로 범죄조직에 잠입한 비밀경찰 진영인(량차오웨이)이 자신을 조여오자 진영인의 신분기록을 삭제한다. 두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상대의 정체성을 위협한다. 디스테이션

홍콩 반환의 시대…경찰로 돌아가고 싶은 요원과 진짜 경찰이 되고 싶은 조직원, 얄궂은 운명의 두 스파이
99년 동안 영국이었다가 하루 만에 중국이 된 홍콩,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주인공과 꼭 닮았다

경찰학교 시절 범죄조직에 침투할 비밀요원으로 지목돼 입학기록과 경찰신분이 삭제된 경찰관 진영인(량차오웨이)은 10년째 범죄조직을 전전하고 있다. 그와 반대로 범죄조직 지령을 받아 경찰학교에 입학한 유건명(류더화)은 잘나가는 경찰 중간간부로 성장했다. 진영인은 비밀요원 생활 7년째에 마약밀매 범죄조직에 들어가는데, 이곳이 유건명을 경찰로 침투시킨 조직이다. 이렇게 해서 진영인과 유건명은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뒤바뀐 운명을 살아간다. 이 무렵 조직은 태국에서 마약을 들여오기로 하고, 이 정보를 확보한 경찰은 일망타진키로 한다. 하지만 두 스파이의 실시간 정보전으로 조직은 거래에 실패하고 경찰도 검거에 실패한다. 경찰과 조직은 모두 자신들 안에 스파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조직은 경찰관을 잡아내려 하고 경찰은 조직원을 찾아내려 한다. 두 스파이는 자칫 목숨까지 잃을 위기에 처한다. 이렇게 시작하는 영화 <무간도>는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돌아가고 5년도 지나지 않은 2002년에 나왔다.

“처음에는 3년이라 그래놓고, 3년이 지나니까 다시 3년, 그 뒤에 또다시 3년, 벌써 10년째라고요. 내가 경찰관이라고 매일같이 소리라도 지를까요. 밤에 자면서도, 손들어! 경찰이다. 이렇게요?” 진영인은 유일하게 자신의 신분을 아는 황지성 국장(황추성)을 만나 경찰관으로 되돌려달라고 호소한다. 이에 “이번 일만 끝나면 그만두라”는 얘기를 듣는 진영인도 말하는 황 국장도 믿지 않는다. 그가 언제 비밀요원 생활을 마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진영인의 욕망은 신분을 회복하겠다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에게 자신은 경찰관이라고 농담처럼 털어놓는 것도 자칫 신분을 회복하지 못한다는 불안에서 나온다. 당초 진영인의 신분을 아는 경찰 간부는 둘이었지만 한 사람이 순직하면서 황 국장만 남았다. 순직한 이 간부의 운구차량을 향해 진영인이 아무도 모르게 거수경례를 하는 데서 존재를 확인하려는 근원적인 불안이 드러난다. 조직과의 전쟁에서 황 국장마저 숨지자 진영인의 신분회복은 위협받는다.

유건명의 욕망은 다층적이다. 조직은 유건명이 경찰에서 자리 잡도록 범죄정보를 제공하고 이런 도움을 얻은 유건명은 빠르게 승진한다. 하지만 경찰에서 인정받을수록 유건명은 조직을 떠나 진짜 경찰관이 되고 싶어진다. 어떻게든 경찰로 돌아갈 수 있는 진영인과 달리 유건명은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경찰관이 아닌 유건명은 조직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그 역시 더 이상 조직원의 삶을 원하지 않는다.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갈 기회를 달라는 게 유건명의 서사(敍事)이다(박자영 협성대 교수). “나에게 기회를 줬으면 해. 과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지금은 좋은 사람이길 원해”라고 말하고,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소설가 여자친구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로 선택했어”라며 사과한다. 진영인은 과거를 회복하려 하고, 유건명은 과거를 삭제하려 한다. 마침내 유건명은 자신을 조여오던 조직의 보스를 죽이고, 자신의 정체를 알아낸 진영인의 경찰신분 기록도 삭제한다. 그러나 보스가 남긴 유건명과의 통화 녹음을 진영인이 확보하면서 두 사람은 서로를 겨냥한다.

두 사람이 사는 홍콩은 영국 조차(租借) 99년 만인 1997년 중국으로 반환됐다.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꾼다. 조선이 겪은 35년 적대적 식민지조차 나라의 DNA를 크게 변형시켰다. 홍콩 사람들은 제자리 중국으로 돌아가는 것에 불안을 느꼈다. 그래서 영국과 중국은 반환 이후에도 50년 동안은 홍콩의 기존 체제를 유지하기로 1984년 협정을 맺었다. 불안은 근거가 없이 자라지만, 종종 실현되어 위협한다. 올해 홍콩 정부가 범죄인을 중국으로 보내는 법안을 발표하자 시민들은 사상 최대 규모 시위를 하고 있다. 2014년에도 홍콩 행정장관 후보를 중국 정부가 사전에 심사하겠다고 하자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자본주의를 살아온 사람에게 사회주의의 시간은 두려운 것이다. 지난해 능라도 5·1경기장에서 “우리는 5000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다”고 문재인 대통령이 말했다. 하지만 남북한 대부분 사람은 오히려 분단된 70년을 살았다. 함께한 5000년 가운데 한 자락이라도 살아본 사람은 많지가 않다. 그래서 홍콩이 한국의 미래라고 보수언론은 겁을 준다.

정체성이 단순하고 적을수록 불행한 삶, 헌법과 법률은 다양한 정체성을 확인하며 역사를 전진시킨다
“외국인은 임금을 적게 받으라”는 주장은 양반과 상놈을 나누듯 국민과 외국인을 나누자는 것
한 나라 두 체제 실현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남북이 교류와 협력을 주저할 이유는 없다

홍콩 반환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영화의 주인공은 진영인보다는 유건명이다. 진영인에게는 결론이 보이는 선택지가 있다. 갈등은 있겠지만 결정해서 나아가면 된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경찰관으로 돌아가도 되고 어쩌면 범죄조직에 남아도 된다(실례로 한국영화 <신세계>에서 비밀경찰은 조직을 장악하고 보스가 된다). 유건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홍콩의 운명과 닮았다. 경찰학교에서 퇴학당하는 진영인을 보며 “차라리 내가 여기에서 나가고 싶다”고 말한 것도 유건명이다. 그가 원해온 것은 경찰관이라는 지위라기보다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이다. 그러고 보면 “좋은 사람이길 원한다”는 얘기는 유건명의 자기최면일 뿐이다. 좋은 사람이 되고자 조직의 보스를 살해하는 것도 이상하고,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진영인의 경찰신분 기록을 없애는 일도 이해되지 않는다. 유건명은 정체성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진짜 경찰관이 되려는 것이다. 스파이가 경찰관이 되려는 보기 드문 이야기는 이 시절 홍콩이어서 가능하다.

개인 성격이 집단 성격을 이룬 것이 정체성이다. 그런데 대표적인 정체성의 토대인 민족이나 국가도 실재하지 않는 상상된 공동체에 불과하다고 베네딕트 앤더슨은 말했다. 자신과 운명을 함께하는 집단이 상상해낸 공동체가 네이션인데 이것이 민족이나 국가로 변역된다. 정체성은 개인적이면서 집단적인 확신이다. 유건명은 경찰관이란 확신도, 범죄단체 조직원이라는 정체성도 없었다. 처음에는 조직원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경찰관이 되려 했다. 홍콩은 1997년 6월30일까지 영국이다가 다음날 7월1일부터 중국이 됐다. 하지만 공동체의 확신까지 변경하지는 못했다. 사람의 정체성도 국가의 정체성도 법이 바꾸지 못한다. 중국국적이 되었다고 중국인이 아니고,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 기본법이 적용된다고 중국이 아니다. 정체성은 시간과 확신이 만든다. 진영인은 경찰이라는 확신으로 10년을 살았고, 정체성에 흔들림이 없었다. 그 확신을 확인하는 장치만 필요했다. 법과 제도는 확신을 수습할 뿐이다.

사람들은 다양한 정체성으로 살아간다. 나는 신문사 기자이면서, 달리기 동호회 회원이다. 선택하지 않은 정체성도 많다. 40대 남성이면서, 가족의 장남이다. 정체성이 단순하고 적을수록 삶은 불행하다. 군대를 다녀온 남성인 것이 정체성의 대부분이거나, 페미니즘이 자신의 거의 유일한 신념이라면 인생은 피폐해진다. 양성이 평등해질 때마다 상실감이 몰려올 것이고, 성차별에서 비롯되지 않는 문제는 인식하지 못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국민이라는 거대한 정체성이 사회를 장악한다면 공동체는 불행해진다. 헌법과 법률은 다양한 정체성을 확인하면서 역사를 전진시킨다. 서울시장과 같은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는 외국인도 투표한다. 국민은 아니지만 주민이기 때문이다. 불법체류자도 노동조합에 가입한다. 불법체류라는 정체성이 노동자 정체성을 없애지 못한다. 이처럼 공동체의 다양한 확신을 포착해 권리와 의무를 잘게 구분하는 것이 법과 법률가의 역할이다. 그렇지 못하니 외국인은 임금을 적게 받으라는 주장을 하게 된다. 20세기에 등장한 노동시민권도 모르고 그 옛날 양반, 상놈 나누듯 국민, 외국인을 나누는 것이다.

중국과 홍콩이 한 나라 두 체제 실현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그것이 남북한이 교류와 협력을 주저할 이유는 아니다. 민족도 역사도 다른 28개국이 사법권 등 주권을 포기한 연합체인 유럽연합도 있다. 유건명이 경찰이라는 정체성을 원했던 것은 다양한 정체성의 발판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에게는 가족도 없고, 여자친구와는 아슬아슬하고, 직장동료들은 살갑지가 않았다. 남북한이 화해할 이유는 같이 살았던 5000년 때문이라기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다양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같은 언어를 쓰는 우호적 인접국의 등장은 정체성을 확장해 공동체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