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매매특별법 10년

“성매매특별법, 얼마 안가 무뎌져… 내 삶을 구해주진 못했다”

2014.09.22 21:50 입력 2014.09.22 22:13 수정

(상) 집결지 여성이 보낸 10년

2004년 9월23일.

이현빈씨(37·가명)에게는 유난히 시끄러운 날이었다. 신문은 ‘성매매특별법’이 통과됐다고 떠들썩했다. 서울의 성매매 집결지 ‘청량리588’의 업주와 성매매 여성들은 거리에 나와 “우리 다 죽는다”며 반대 시위를 했다. 열일곱에 성매매를 시작한 이씨의 나이 스물일곱 때였다. 세상물정은 잘 몰랐지만, 업주들에게 떠밀려 이날 처음 시위라는 걸 해봤다.

성매매특별법 시행 10년. 이씨는 붉은빛의 유리방을 떠나 평범한 여성으로 돌아왔다. 그는 인천의 탈성매매지원센터 ‘강강술래’에서 직업교육을 받으며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특별법 시행 전 10년, 시행 후 10년을 현장에서 보낸 이씨에게 특별법이 바꿔놓은 현장 풍경은 어땠을까. 인천의 성매매 집결지 ‘옐로우하우스’에서 2008년부터 일했다는 박지은씨(33·가명)도 인터뷰에 응했다.

“특별법은 말 그대로 폭탄이었죠. 한동안은 가게를 다 닫아야 했으니까요. 경찰이 맘먹고 단속하는데 어느 손님이 오겠어요. 업주들은 우리에게 ‘일을 하든 안 하든 나가서 서 있으라’고 하더라고요. 손님 없이 불만 켜놓고 멍하니 서 있었죠.”

서울 영등포에 있는 성매매 업소인 속칭 ‘유리방’에서 지난 17일 밤 성매매 여성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서울 영등포에 있는 성매매 업소인 속칭 ‘유리방’에서 지난 17일 밤 성매매 여성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 김창길 기자

▲ 2004년 특별법 ‘폭탄’
업주·여성들 생계 타격… 해외 나가거나 업종 변경
법, 2~3개월 후 느슨해지며 폐쇄된 집결지 다시 모여

▲ 탈성매매 지원 한계
취업 위한 진학 필요하지만 검정고시까지만 지원
정부, 형식적 지원 아닌 실제 자립 도와야

이씨는 “특별법 직후 집결지는 황량해지고, 업주·아가씨의 생계 걱정은 커져갔다”고 말했다. 집결지에 문을 닫는 업소가 많아지자 일부 성매매 여성들은 안마시술소·오피스텔 등 다른 성매매 업소들로 옮겨갔다. 일부는 원정 성매매에 나섰다. 이씨는 “내가 아는 사람도 국내에서 장사가 안되니 아가씨 몇 명을 데리고 해외로 건너갔다”며 “얼마 전엔 그 사람이 아가씨가 번 돈을 모두 갈취해 게임으로 탕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말했다.

집결지에 남은 여성들로서는 업주와의 관계가 나아진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특별법 시행 전 이씨가 있던 청량리에선 손님들에게 돈을 받으면 업주들이 70% 이상을 가져갔다. 감금·폭행에 ‘하이방비’란 벌금도 있었다. 한 달에 이틀만 쉬어야 하며, 추가로 쉴 때는 미리 말하면 벌금 50만원, 말하지 않으면 100만원을 내는 것이다. 이씨는 “특별법 이후 악습들은 사라지고, 돈을 나눌 때도 업주들이 아가씨 의견을 들어줬다”며 “예전에 업주란 우리에게 김일성 같은 존재였는데, 이젠 아가씨 중심의 분위기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시간이 지나자 업주들이 더욱 달콤한 제안을 해왔다고 했다. “가게를 빌려줄 테니 월세만 내고 나머지 돈은 다 가져도 좋다”는 제안이었다. 업주에게 선불금을 비롯해 많은 돈을 상납하던 여성들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당시 인천 옐로우하우스에 있던 박지은씨도 월세를 내고 유리방 주인이 되는 길을 택했다.

업주들의 속셈은 금방 드러났다. 단속 때문에 손님이 없다 보니 한 달을 일해도 300만원 안팎의 월세를 내기 힘들었다. 빚이 쌓여가자 조바심에 무리하는 날이 늘었다. 박씨는 “주인이 없으니 힘들고 몸이 아파도 월세(집세, 공과금, 인건비)를 맞춰야 한다는 생각이 커졌다”며 “돈을 맞추려고 참고 일하다 골병까지 얻었다”고 말했다.

서로를 감시하는 분위기도 강해졌다. 박씨는 “주인이 없다 보니 서로를 더 의지하고, 혹여 누군가 이에 못 미치면 ‘왜 일 안 하느냐’며 서로 주인 역할까지 하는 경향이 생겼다”면서 “ ‘내가 빠지면 다른 동료들이 힘들 텐데’라는 생각에 성매매를 벗어나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성매매특별법의 여파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씨는 “시행 직후부터 집결지엔 순찰차가 끊임없이 돌았지만, 2~3개월이 지나자 손님 받는 것을 봐주는 분위기가 생겼다”고 말했다. 폐쇄된 집결지들이 이합집산하며 예년 경기도 회복하기 시작했다. 이씨가 있던 청량리588은 영등포 쪽 여성들이 넘어오며 다시 살아났고, 박씨가 있던 옐로우하우스도 근처에 있던 학익동, ‘끽동’ 등이 폐쇄되면서 그곳 여성들이 넘어오자 활성화됐다.

박씨의 경우 집결지에서 발병한 척추 디스크로 의사로부터 ‘더 이상 일하지 말라’는 권고를 듣고 지난해 12월 집결지를 나왔다. 그는 걱정이 많았다. 박씨는 “집결지 안에서는 씀씀이가 컸는데 나오고 난 뒤에는 돈벌이가 한정됐다”며 “돈 만원을 쉽게 생각했는데 그러지 못하게 되니 무기력했다. 돈 개념을 바로잡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박씨는 집결지의 ‘갇힌 방’에서 오래 일해 공황장애를 얻었다고 한다. 성매매 생활을 감추기 위해 지인들과 연락을 끊고 살며 대인기피 증상도 생겼다. 그는 “집결지를 나와서도 이런 문제들에 갇힌 내 자신을 본다”며 “귀 막고 눈 막은 세월을 보내다 사회에서 다시 시작하려 하니 결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씨도 지난해까지 성매매 업소에서 일했지만, 탈성매매지원센터 ‘강강술래’의 도움을 얻어 같은 해 9월 굴레에서 벗어났다. 이씨는 “요즘처럼 17살 이후 이렇게 태양을 오랫동안 본 적이 없다”며 “지난해만 해도 어두워질 때 눈뜨고 아침엔 눈을 감았는데, 해를 많이 보고 하늘을 오래 볼 수 있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다”고 말했다.

최근 검정고시를 통과한 이씨는 대학 진학을 꿈꾼다. 하지만 탈성매매 여성에 대한 지원은 검정고시까지라 수능학원을 다니지 못하고 있다. 이씨는 “요즘 같은 세상에 검정고시만으로는 제대로 취업하기 힘든 게 사실”이라며 “정부에서 형식적인 지원만 할 것이 아니라 당사자를 만나 실제 자립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들어주면 좋겠다”고 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