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 10대 투신 1년, ‘우울증갤러리’는 달라진 게 없다

2024.05.06 14:26 입력 2024.05.06 15:08 수정

디시인사이드 게시판 현재도 정상 운영

이용자들 떠나지 못했거나, 다시 돌아와

“달라진 건 신고후 삭제 시간 빨라진 것”

지난해 4월 17일 온라인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우울증 갤러리’에서 활동하던 10대 여학생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생중계하며 사망한 현장 인근에 국화 한 송이가 놓여 있다. 조태형 기자 이미지 크게 보기

지난해 4월 17일 온라인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우울증 갤러리’에서 활동하던 10대 여학생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생중계하며 사망한 현장 인근에 국화 한 송이가 놓여 있다. 조태형 기자

지난해 4월16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고층 건물 옥상에서 10대 여학생이 투신했다. 그는 목숨을 끊기 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실시간 방송을 켜놓고 이렇게 말했다. “울갤 접으시고. 잘 사셔야 돼요.” “인생 허비하지 마시고요.” ‘울갤’은 국내 최대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의 ‘우울증갤러리’ 게시판을 가리키는 줄임말이었다.

사건 이후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우울증갤러리를 통해 만난 이들 사이에서 자살방조, 성 착취, 마약 투약 등 각종 범죄가 일어난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피해자는 주로 10대 청소년인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더했다. 경찰은 이 사이트에서 발생한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별도의 태스크포스(TF)를 꾸렸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도 경찰 요청을 받고 게시판 ‘일시차단’ 검토에 나섰다.

그 후 1년이 지났다. 우울증갤러리 게시판은 현재 정상 운영 중이다. 경향신문은 1년 전 취재한 우울증 갤러리 이용자들을 다시 접촉해 ‘사건 이후’를 추적했다. 이들은 우울증갤러리를 떠났거나, 떠나지 못했거나,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했다. 이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신호탄’이 된 1년 전 사건

디시인사이드 ‘우울증 갤러리’ 게시물.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미지 크게 보기

디시인사이드 ‘우울증 갤러리’ 게시물.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용자 A씨(25)는 1년 전 사건을 ‘신호탄’이라고 표현했다. 2020년부터 우울증갤러리에서 활동했다는 그는 “피해 사실을 숨겨왔던 이들이 1년 전 사건을 계기로 경찰에 신고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전에도 어린 여성 이용자가 성인 남성에게 성 착취를 당하고 자살하는 일은 몇 번 있었어요. 주목을 받지 못했을 뿐이죠. 투신 사건 이후에는 묻혔던 일이 사건화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몇몇 사건은 재판 결과도 나왔다. 지난 1월 서울중앙지법은 가출한 미성년자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된 이른바 ‘신대방팸’ 사건 주요 피고인 20대 김모씨에게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강남 투신 사건 당시 10대 여학생이 자살하도록 방조한 혐의로 기소된 20대 남성도 지난해 11월 인천지법 부천지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중학생과 성관계를 한 혐의 등도 받았다.

A씨는 상당수 사건에 피해자·목격자로 연루됐다. 신대방팸 사건에선 참고인 신분으로 진술하기도 했다. 1심 선고 후에는 허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주요 피고인들이 집행유예나 무죄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미 사망한 피해자도 있었어요. 생전에 썼던 피해글은 증거로 인정되지도 않았더라고요.” 수사가 멈춰버린 사건도 있었다. A씨는 자신의 신체 부위가 담긴 불법촬영물을 유포한 이용자들을 경찰에 신고했지만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수사중지 통보서를 받았다. ‘피의자를 특정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마약’이 된 울갤…‘금단현상’에 돌아간 이들

디시인사이드 ‘우울증 갤러리’ 이용자였던 A씨가 불법촬영물 유포 피해를 경찰에 신고하고 난 후 받은 수사중지통보서 내용. A씨 제공

디시인사이드 ‘우울증 갤러리’ 이용자였던 A씨가 불법촬영물 유포 피해를 경찰에 신고하고 난 후 받은 수사중지통보서 내용. A씨 제공

1년 전 사건 이후 우울증갤러리 이용자 상당수가 갤러리를 떠났다. 경향신문이 접촉한 이용자들은 “이제 갤러리에 들어가지 않는다”며 연락을 꺼렸다. 5년 이상 우울증갤러리에서 활동했던 B씨는 “워낙 ‘더러운 곳’이라고 생각해 그만두고 사람들과 연도 끊었다”고 말했다. “그 사건이 발생한 이후 한창 경찰에서 전화가 와서 이것저것 물었는데 다 차단해버렸어요. 잘못한 것도 없고 안 좋은 일에 엮이고 싶지도 않으니까요.”

일종의 ‘금단현상’을 느끼고 다시 우울증갤러리로 돌아간 사람도 있다. 한동안 우울증갤러리를 끊었던 C씨(23)는 한 달 전부터 다시 접속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부모님이 이혼 위기에 처하자 불안과 초조함에 시달린 탓이었다. C씨는 “우울증갤러리는 익명성이 보장되고 우울한 얘기를 해도 남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며 “힘들 때 생각날 수밖에 없는 곳”이라고 했다.

그가 1년 만에 들어가 본 우울증갤러리는 ‘세대교체’가 이뤄진 것 외에는 달라진 점이 없다고 했다. “신기한 게 뭔지 아세요? 예전 이용자들 이름은 하나도 안 보이는데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와서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더라고요. 성인 남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미성년자한테 만나자고 하거나, 성관계를 하자고 하는 식이죠. 달라진 건 게시글을 신고하면 삭제되는 시간이 조금 빨라졌다는 것밖에 없어요.”

“기댈 곳 없는 이들의 거대한 수용소”

우울증 환자를 표현한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우울증 환자를 표현한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경향신문이 지난 한 달간 우울증갤러리를 모니터링해본 결과 자살·자해 암시글이 수시로 올라오고 있었다. 방심위는 지난해 5월 디시인사이드에 우울증갤러리 ‘접속 차단’이 아닌 ‘자율규제 강화’를 요청했다. 디시인사이드 관계자는 “국내에 15명, 해외에 30~40명 모니터링 요원을 두고 모든 게시판을 관리하고 있다”면서도 “‘자살’과 같은 단어를 직접 쓰지 않고 변형해 사용하는 경우 통제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1~2년 전까지 우울증갤러리에서 활동했다는 D씨(19)는 “게시판을 없애는 게 나았다고 본다”고 말했다. D씨는 “‘울스타’라 부르는 전용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어 개별적으로 소통을 하는 경우도 많다”면서 “게시판이 활성화돼 있는 이상 정신적으로 취약한 사람들과 그걸 이용하려 하는 사람들이 유입되는 걸 막을 수가 없다”고 했다.

우울증갤러리 이용자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당한 적이 있다는 E씨(18)는 게시판 접속 차단 같은 대책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우울증갤러리를 “거대한 수용소”라고 했다. “울갤이 없어져도 어디엔가 비슷한 다른 사이트가 생길 거예요. 기댈 곳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수용소’ 같은 곳이니까요. 게시판을 폐쇄한다고 하면 ‘죄수’들은 여기저기 흩어질 거에요. 물론 어디에선가 다시 모일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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