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드러난 노동의 그림자

(상)사각지대 노동자들 ‘자나 깨나 해고 공포’

2020.04.20 06:00 입력 2020.04.20 11:47 수정

항공사 하청 노동자의 한숨

[코로나19로 드러난 노동의 그림자](상)사각지대 노동자들 ‘자나 깨나 해고 공포’

대한항공 기내 청소노동자인 한지선씨(55·가명)의 통장에 4월 급여로 87만원이 찍혔다. 추가근무수당을 포함해 220만원이던 한 달 벌이가 반토막도 더 났다. 코로나19가 확산되며 비행기가 멈춰서면서 3월에는 13일, 4월 들어서는 3일밖에 일하지 못했다. 지난 17일 인천 주안역에서 만난 한씨는 “4월에 일해야 5월을 살고, 5월에 일해야 6월을 사는데 다음달은 월급이 얼마가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회사는 4월치의 나머지 임금을 이달 말 준다고 했지만 그가 급여 연체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은 해고 통지다. “회사에 출근하면 ‘그만두라’는 말을 들을까봐 무섭고, 집에서는 ‘그만두라’는 회사의 해고 통보 문자메시지를 받을까봐 겁이 난다”고 그는 말했다.

비행기 운행 줄어 급여 ‘반토막’
출근하면 그만두라 할까 걱정
집에서는 ‘해고 문자’ 올까 걱정
동료 “병원비 없는데” 눈물도
회사 “경영난” 공지 후 침묵

취업준비생인 20대 자녀 둘을 둔 그는 어떻게 생계를 꾸려야 할지 눈앞이 캄캄하다. 이달 급여에서 자동이체로 통신비·가스비·보험·집 대출이자·학자금 대출금 등이 나가니 5만원이 남았다. 25세 아들은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고, 23세 딸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만 생활비는 한씨의 몫이다. 평소 허리띠를 졸라매도 세 식구 생활비가 150만~160만원은 드는데 87만원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한씨는 전남편이 진 빚을 떠안아 신용회복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그는 “내년까지 갚으면 끝나는데 못 갚는 건 아니겠죠”라고 걱정했다. 절박해진 그는 인터뷰하러 오는 길에 친한 친구에게 돈 좀 빌려달라는 전화를 걸었다고 말했다. 한씨는 “우리처럼 힘없는 사람은 서럽다”며 눈물을 보였다.

코로나19 위기로 노동계의 ‘약한 고리’인 하청·용역 노동자들이 타격을 받고 있다. 특히 고사위기에 몰린 항공업계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은 벼랑 끝에 서 있다. 그는 대한항공 자회사인 한국공항이 기내 청소, 수화물, 세탁 등 서비스를 맡긴 12개 하청업체 중 하나인 ‘이케이맨파워’에 2015년 입사해 객실 청소를 해왔다. 비행기가 착륙하고 승객들이 다 내리고 나면 청소노동자 30여명이 비행기에 올라가 화장실, 갤리(부엌) 구역 등에서 역할을 나눠 일개미처럼 각자 분담한 일을 한다. 급히 다시 떠나야 하는 비행기는 10분 만에 청소를 끝내야 하기 때문에 40~50명이 투입되기도 한다. 이렇게 “하루에 비행기 20여대를 이렇게 청소했다”고 그는 말했다.

일 이야기에 잠시 밝아진 그의 표정은 근무표를 꺼내들며 다시 어두워졌다. 3월 근무표는 1월에 비해 근무인력이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 코로나19 사태 이전에는 오전 7시~오후 4시, 오후 1~10시, 오후 10시~오전 6시 등 3개 조가 있었지만 오후 10시부터 일하는 심야조는 오는 6월까지 무급휴직으로 전환됐다. 새벽에 들어오는 비행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촉탁직은 정리됐다.

회사는 침묵한다. ‘코로나19로 인해 회사 경영이 어려워졌다’는 안내문만 게시판에 붙어 있다. “회사가 필요 없을 때 사람을 버리고 필요할 때 다시 구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서글퍼요. 회사가 고용유지지원금도 신청할 수 없을 만큼 어렵다는데 평소에 번 돈으로 이렇게 어려울 때 좀 함께 살 수는 없는 걸까요.” 최근 화장실에서 한 동료가 울먹였다. 이유를 물었더니 ‘남편이 아파서 병원비가 많이 드는데 어떡하느냐’는 답이 돌아왔다.

한씨는 가방 속에서 대한항공 로고가 인쇄된 지퍼백 하나를 보여줬다. “비즈니스 좌석 책 꽂을 때 쓰는 건데요. 청소일을 해서인지 관절이 아픈 사람이 많아요. 다들 사무실에서 이 폴리백에 뜨거운 물을 부어서 핫팩으로 써요. 서로 쉬라고 말하지만 다들 ‘내가 벌지 않으면 안돼’라고 하죠.” 평소에 그는 동료들과 언젠가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고 함께 여행 가자는 이야기를 나눴다. 자신이 승객으로 머물렀던 자리를 청소노동자로 다시 만나는 상상을 함께하며 웃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의 동료들 상당수가 그만뒀다.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한씨의 아들은 2월 초 시험이 예정돼 있었지만 코로나19 사태로 3번째 미뤄졌다. “60세 정년까지, 애들 결혼할 때까지 일하고 싶다”는 그의 소원은 코로나19 위기 앞에서 위태롭기만 하다.

지난 1일 서울 중구 ‘민주노총 코로나19 노동자 피해 상담사례 발표 및 사각지대 노동자 대책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들이 재난상황 해고 금지를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지난 1일 서울 중구 ‘민주노총 코로나19 노동자 피해 상담사례 발표 및 사각지대 노동자 대책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들이 재난상황 해고 금지를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안전망 밖 300만명 “고용지원금 늘리고 한시적 해고 금지를”

경제위기가 지진이라면 기업의 도산과 실업은 해일이다. 345만명에 달하는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맨 앞 대열에서 해일을 맞닥뜨리고 있으나 이들의 해고를 막을 만한 실효성 있는 대안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이다. 정부가 이번주에 발표할 코로나19 관련 고용대책에는 불안정 노동자의 협상력을 높일 방안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임시·일용직에 해고 물결
지난달에만 59만여명 감소


19일 통계청의 ‘3월 고용동향’을 보면 지난달 상용직 취업자가 45만9000명 늘어 1년 전에 비해 증가폭이 전달인 2월(61만6000명)보다 꺾이는 정도의 타격을 입었지만 임시직은 42만명, 일용직은 17만3000명 감소했다. 일용직은 2월에도 10만명 넘게 감소한 바 있다. 일용직, 임시직, 상용직 등 불안정한 순으로 먼저 고용타격을 받고 있는 셈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코로나19 영향이 고용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양상이며 향후 불확실성도 매우 높다”고 말했다. ‘불안정 노동’이라는 기존 고용보호제도의 틈새를 비집고 파고가 들이닥쳐 사회의 가장 낮은 곳부터 침수가 이미 시작된 것이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 ‘물리적 거리 두기’로 소상공인 600만명도 위기 상황”이라며 “보수적으로 잡아도 300만명이 위기 상황에 놓인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모든 업종의 고용유지지원금 비율을 끌어올린다는 카드를 내놓았다. 정부가 매출액이 감소한 사업장에 해당 업종 평균 임금의 90%(대기업은 66.7%)까지 지원한다는 것으로, 기한은 오는 6월까지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들어 이달 16일까지 고용유지지원금을 신청한 사업장은 5만1067곳이다. 30인 미만 사업장이 전체의 94.4%(4만8226곳)를 차지한다.

[코로나19로 드러난 노동의 그림자](상)사각지대 노동자들 ‘자나 깨나 해고 공포’


6월까지 임금 90% 지원에도
차액 10%·4대 보험료 부담
영세사업자들은 ‘주저’


하지만 코로나19 위기를 넘기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사업주들은 느끼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소상공인 245개사를 대상으로 한 ‘고용유지지원금 활용실태’를 보면 조사 대상 3곳 중 1곳(33.5%)은 지원금을 신청했거나 신청할 예정이지만, 29.8%는 제도를 몰라서 신청을 못했다고 답했다. 신청을 검토했으나 포기했다는 응답도 13.8%였다. 지원금을 받더라도 나머지 인건비 10%와 4대 보험료는 사업주가 부담해야 한다. 지원금을 받는 기간과 이후 한 달은 권고사직 등 고용조정이 금지되는데 6월 이후 경기 상황을 알 수 없다는 점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해고자도 노조 가입하게
ILO 핵심협약도 비준해야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장에서는 광범위한 해고가 벌어진다. 경기도의 한 고용복지센터 관계자는 “영세사업장에서도 신청을 많이 하는데 ‘신고서 제출 전 권고사직은 괜찮은 거죠?’라고 물어보는 상담자들이 많다. 신청 전 최소 인원만 남기고 해고시킨 후 지원금 신청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라고 말했다. 파견·용역 등은 파견 사업장 기준으로 지원금이 지급돼 사업주가 매출액 감소 등을 입증하기 어렵고, 인력공급업체 특성상 계속 해고하고 채용하는 것을 반복하는 게 사업주 입장에서 나은 선택지가 된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은 “고용유지에 대한 지원 규모는 대폭 늘리되 요건으로 한시적으로라도 해고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필요하며, 모기업뿐 아니라 하도급업체까지 지급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인식 대한상의 고용노동정책팀장은 “지원금 신청서류는 기본적인 사항만 남기고 대폭 폐지하고 지급 방법을 ‘선 지급 후 정산’ 시스템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불안정 노동이 만연해지면서 노동자의 협상력이 약화됐다는 점도 고용대책에서 보완해야 할 시급한 문제이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 수는 2003년 460만6000명(전체 노동자 대비 32.6%)에서 2019년 748만명(36.4%)으로 대폭 늘었다.

기업은 고용을 유지하는 대신 노조가 임금 인상을 유예하고 고용보험료율 부담을 높이면서 해고자도 노조 가입을 허용하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을 비준하는 대타협을 이루는 방안도 거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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