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김소연 ‘꿀잠’ 운영위원장

<b>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의 산증인</b> 비정규 노동자의 쉼터 ‘꿀잠’ 운영위원장인 김소연씨가 지난달 29일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위치한 ‘꿀잠’ 벽면의 로고를 쓰다듬으며 웃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의 산증인인 그는 대우조선해양 파업 노동자를 위한 ‘희망버스’ 공동집행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성동훈 기자  zenism@kyunghyang.com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의 산증인 비정규 노동자의 쉼터 ‘꿀잠’ 운영위원장인 김소연씨가 지난달 29일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위치한 ‘꿀잠’ 벽면의 로고를 쓰다듬으며 웃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의 산증인인 그는 대우조선해양 파업 노동자를 위한 ‘희망버스’ 공동집행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성동훈 기자 zenism@kyunghyang.com

지난달 22일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의 파업이 끝났다. 파업 51일 만이다. 하청노조는 2015년 이후 삭감된 임금의 원상회복 등 당초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조선업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들의 저임금 문제를 세상에 알리는 데 성공했다. 특히 1독 선박 바닥에 철판을 붙여 사방 0.3평 공간에 스스로 몸을 구겨넣은 채 31일간 농성을 벌인 유최안 민주노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의 모습은 고통받는 하청노동자들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극명히 보여줬다.

김소연씨(52)는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의 산증인이다. 한국 노동사에 길이 남을 ‘기륭전자 비정규 노동자들의 10년 싸움’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 과정에서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네트워크’ 결성과 ‘희망버스기획단’ 활동 등 비정규직 및 정리해고 노동자들과 연대했다. 현재는 2017년 8월 설립된 비정규 노동자들의 쉼터 ‘꿀잠’ 운영위원장이다. 수많은 비정규 노동자들 그리고 산업현장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노동자의 유가족이 이곳에 머물며 위로받고 마음을 다잡았다. 김씨는 대우조선해양 파업 노동자를 위한 ‘희망버스’ 공동집행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난달 29일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꿀잠’에서 김소연씨를 만났다. 지하 1층, 지상 4층, 옥탑방으로 이뤄진 ‘꿀잠’은 상당히 넓고 깨끗하고 아늑했다. 그는 “상처받은 노동자들이 이 공간에 왔을 때 ‘나는 정말 소중한 사람이고 존중받는 일을 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음식과 청소 등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고 말했다.

김소연씨가 지난달 29일 자신이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위치한 비정규 노동자 쉼터 ‘꿀잠’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김소연씨가 지난달 29일 자신이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위치한 비정규 노동자 쉼터 ‘꿀잠’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의 파업, 어떻게 평가하나요.

“너무나 열심히 잘 싸웠어요.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라는 그분들의 절규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 같아요. 도대체 조선업 하청노동자들의 노동실태가 어떻길래, 하는 궁금증을 일으킨 거죠. 비정규직인 하청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해 단합된 힘을 보여준 것도 큰 성과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희도 희망버스를 같이 준비한 건데….”

그의 눈자위가 갑자기 붉어지더니 이내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그는 쑥스러운 듯 휴지로 눈물을 연신 닦아내며 “병이야, 옛날 생각이 나서…”라고 말했다. 과거 자신이 당사자였던 기륭전자 10년 싸움이 생각났기 때문인 듯했다. 그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비정규직이 양산된 것은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에서 파견법과 정리해고제를 제정하면서부터예요. 그전까지는 정규직, 비정규직 이런 단어도 사실 없었어요. 조선업의 경우 이전에도 일용직이 있었지만 고용이 불안한 만큼 임금이 훨씬 많았다고 해요. 하지만 비정규직이 양산되면서 하청노동자들의 임금이 점점 깎였어요. 급기야 지금은 제일 많이 받는 분이 시급 1만500원이에요. 이번에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단식농성한 조합원 한 분은 용접 경력 15년차인데 시급 9500원을 받으셨고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조선업에 고용된 인원은 현재 10만여명. 이 중 약 70%가 비정규직인 사내하청노동자이거나 재하청 형태의 물량팀 노동자들이다. 용접·도장·비계(발판) 등 배를 만드는 작업 대부분이 이들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대우조선서 시급 9500원 받는 노동자들에 8000억 손배소에 너무 화나

- 정부는 노조의 불법에 대해 법과 원칙을 내세웠어요. 경찰의 업무방해 수사와 사측과 원청의 손해배상소송도 기다리고 있고요.

“제일 화나는 부분이에요. 조선업 하청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일고, 교섭이 열리는 타이밍에 정부는 ‘노사 간 대화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불법적인 점거 농성을 지속하면 법과 원칙에 따라 대응하겠다’며 하청노동자들을 겁박했어요. 그러면 교섭의 힘이 어느 쪽에 실리겠어요? 공권력 투입이 시사되고, 유최안 부지회장 등 파업 참여 노동자들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노조는 결국 많은 양보(4.5% 임금 인상)를 한 거죠. 게다가 시급 9500원 받는 노동자들에게 8000억원에 달하는 손해배상까지 청구한다는 거잖아요. 책임은 정부와 기업에 있어요.”

- 남은 과제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희망버스를 진행했을 때 2000여명의 탑승객 중에는 현대중공업, 현대삼호중공업 등 크고 작은 조선업 하청노동자들이 상당수 계셨어요. 모두의 문제였던 거죠. 이분들이, 더 나아가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을 정도의 임금인상을 이뤄야 하고, 종국적으로는 비정규직을 철폐해야 해요. 또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 요구임에도,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는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 중 단체행동권을 제약하는 행위예요. 반드시 철회돼야 해요.”

김소연씨가 지난달 29일 ‘꿀잠’에서 지하 1층 강당의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한국 비정규 노동자 투쟁 연보’(1998~2020)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김소연씨가 지난달 29일 ‘꿀잠’에서 지하 1층 강당의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한국 비정규 노동자 투쟁 연보’(1998~2020)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김씨는 1970년 1월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에서 2남3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열쇠공·보일러수리공으로 일하며 생계를 꾸렸다. 방 한 칸에 일곱 식구가 살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상계동 산골짜기 달동네로 이사했다. 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1986년 실업계 고교인 정화여상에 입학했다. 그는 이듬해 11월 일어난 사립학교민주화투쟁의 중심에 섰다. 13명의 정화여상 교사가 누적된 학교 비리를 대자보로 폭로한 후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스스로 투쟁의 주체가 됐고, 이후 졸업생과 학부모가 동참했다.

- 당시 고2였는데 어떤 활동을 했나요.

“시험거부투쟁을 하고 관선이사를 파견하라고 청량리에 있는 학교에서 서대문구 서울시교육위원회까지 구호를 외치고 유인물을 나눠주며 행진했어요. 교사와 학생뿐 아니라 졸업생, 대학생까지 사회적 연대가 이뤄졌죠. 그 과정에서 교사 한 분과 학부모 한 분이 구속되자 재판 참관 등 할 수 있는 일들을 했어요, 관선이사가 파견되진 않았지만, 교장이 세 번 바뀌고 1988년 학생회 직선제를 얻어냈어요.”

- 당시 겪은 일이 이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제 삶을 바꿔놓았으니 지대한 영향을 끼쳤죠. 스스로 삶의 주인이 돼야 하고, 불합리한 일에는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으니까요.”

고2 때 사립학교 민주화투쟁 주도…기륭전자 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

그는 1989년 고교 졸업 후 청량리정신병원과 1990년 전교조 해직교사들이 만든 월간지 ‘우리교육’ 등을 거쳐 1992년 구로공단 갑을전자에 입사했다. 당시 어용세력이 장악한 노조의 민주화를 위한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이후 만 27세 때인 1997년 노조위원장이 됐다. 그해 IMF 외환위기가 터지자 갑을그룹은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계열사인 갑을전자는 부도를 낸 후 화의가 개시된 상태에서 폐업신고를 했다. 노조는 공장 재가동과 매각 시 고용·노조·단체협약 승계, 생계대책비 지급을 요구하며 155일간 갑을그룹 점거농성을 벌였다. 2000년 11월 노사 합의가 이뤄지면서 투쟁은 마무리됐다. 하지만 회사가 분할매각되면서 그를 비롯한 조합원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떠나야 했다. 2002년 6월 그는 인력파견업체인 휴먼닷컴을 통해 기륭전자에 간접고용 비정규직으로 입사했다.

- 왜 파견 노동자가 된 겁니까.

“정규직 뽑는 데가 없었어요. 휴먼닷컴은 ‘기륭을 가면 6개월 후에 정규직 된다’고 했어요. 갔더니 정규직, 계약직, 파견직, 아르바이트까지 같은 일을 하고 있었어요. 정규직은 상여금 700%, 계약직은 400%, 파견직은 0%였어요. 임금도 파견직은 최저 시급이었고요. 입사 후 3일 동안 아무도 저한테 말을 안 걸었어요. 나중에 알게 됐지만 하루 이틀만 일하고 그만두는 사람이 많아 그랬다고 해요. 운 좋게 저는 3개월 만에 계약직이 됐어요.”

- 당시 중간관리자들이 파견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해고하는 등 모욕적 대우를 서슴지 않았다지요.

“1주일에 20~30명씩 잘려나갔고 새로운 파견 노동자가 그 자리를 다시 채우는 일이 반복됐어요. 조회시간이면 대놓고 ‘공장 문 밖에 나가면 실업자들이 줄 서 있다”고 겁박했죠. 퇴근 후 휴대전화 문자로 해고를 통보받는 일도 비일비재했어요.”

- 2005년 민주노총 금속노조 서울지부 남부지역지회 기륭전자분회를 주도적으로 결성하고 분회장을 맡았어요. 정규직과 계약직, 파견직 노동자가 모두 함께 노조를 결성했는데,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회사는 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부당한 차별과 폭력을 행사했어요. 출산을 앞둔 노동자에게 출산휴가를 다녀온 후에는 계약직으로 전환시키겠다고 했어요. 저는 사직을 고민하는 해당 노동자에게 ‘법에 보장돼 있으니 버티라’고 조언했어요. 그러자 그때부터 회사는 계약직의 경우 갓 결혼한 여성은 3개월, 미혼은 6개월, 기혼인데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없는 여성은 1년씩 계약했어요.”

-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네요.

“지각을 하면 상여금을 깎는 일도 서슴지 않았어요. 저와 같은 생산라인에서 일하던 정규직 여성 노동자도 그런 일을 겪자 화가 나서 잔업을 거부했어요. 그래서 저는 제안했죠. 모두 잔업하지 말고 회식하자고요. 그래서 그날 제가 속한 생산라인은 정규직, 계약직, 파견직 모두가 함께 자발적으로 처음 회식했어요. 이후 팀워크가 생기면서 야유회도 같이하고 불합리한 사측 요구에는 문제 제기도 했죠.”

- 그런 과정을 거쳐 모두가 한마음이 돼 노조결성까지 된 거군요. 회사에선 눈엣가시 같았을 것 같은데요.

“우리 라인의 노동자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흩어진 노동자들이 구심점이 돼 전체 생산직 노동자들의 단합을 이끌어냈어요. 그러다 2005년 4월 그 유명한 ‘잡담 문자 해고’가 있었던 거예요. 잡담했다는 이유를 들어 파견 노동자에게 사측이 해고 통지를 한 거죠. 저는 이때가 노조를 결성할 적기라고 판단했어요. 007 작전을 통해 30명 초동모임을 가졌고, 7월5일 마침내 노조 결성에 성공했어요.”

생산직 노동자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200여명이 노조에 가입했다. 그는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1895일의 대투쟁을 시작했다. 용역깡패에 이어 10월17일 공권력이 투입되면서 농성자들은 강제해산됐다. 그를 포함한 간부 2명은 구속됐다. 3개월 만에 보석으로 출소한 그는 다시 싸움의 한복판으로 돌아왔다. 삭발, 진격투쟁 등을 벌이며 2006년 30일, 2008년 94일 단식도 감행했다. 체중은 34㎏까지 줄었다. 2010년 11월1일 마침내 회사는 1년6개월간의 유예기간을 거쳐 그를 포함해 마지막까지 농성장에 남은 10명을 정규직화하기로 합의했다. 5년4개월 만의 타결이었다.

2010년 11월1일 마침내 정규직화 합의를 이끌어낸 김소연 기륭전자분회장이 눈물을 흘리며 약식보고 대회를 하고 있다. 기륭전자분회 제공

2010년 11월1일 마침내 정규직화 합의를 이끌어낸 김소연 기륭전자분회장이 눈물을 흘리며 약식보고 대회를 하고 있다. 기륭전자분회 제공

- 노동운동을 하며 투옥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나요.

“아니에요. 2001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돼 구속됐다가 법원에서 집행유예를 받은 일이 있어요. 갑을전자 노조위원장으로 활동할 때였어요. 구로공단의 노동운동가들이 공장이 이전해도 계속 그곳에 남아 활동할 근거를 마련해보자는 취지로 서울민주노동자회라는 단체를 만들었고, 저도 회원으로 가입했어요. 그걸 검찰이 공안사건으로 엮은 거예요. 기륭전자 파업 때 3개월 구속기간 동안 검사가 저의 이 자료를 책상 위에 쌓아놓고 협박해 조합원들이 큰 충격을 먹었다고 해요. 우리를 갈라치기 하려 한 거예요.”

2014년 12월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는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요구하며 서울 신대방동 옛 기륭전자에서부터 청와대까지 4박5일간 ‘오체투지’ 행진을 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4년 12월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는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요구하며 서울 신대방동 옛 기륭전자에서부터 청와대까지 4박5일간 ‘오체투지’ 행진을 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러나 최동열 기륭전자 회장은 합의사항 이행을 거부하고 2013년 12월 야반도주한 후 폐업했다. 김씨는 꺾이지 않았다. 2008년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네트워크 결성에 참여하고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기획단 활동을 비롯한 각종 투쟁 현장과 연대했다. 2012년 12월 18대 대선에서 노동자대통령후보로 나서 완주하기도 했다. 2014년 12월엔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요구하며 서울 신대방동 옛 기륭전자에서부터 청와대까지 4박5일간 ‘오체투지’ 행진을 했다. 오체투지 행진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과 LG유플러스 비정규직 노동자 등과도 연대해 3차까지 진행됐다. 사회적 울림은 컸다. 그 길 끝에 2017년 8월 ‘꿀잠’이 설립됐다.

농성 때 화장실 고통 생각하며, 편안하고 아늑한 ‘꿀잠’ 조성하려 최선

- ‘꿀잠’은 어떻게 설립된 건가요.

“앞에 서사가 좀 있어요. 2010년 기륭전자가 정규직화에 합의하면서 1년6개월 유예기간을 뒀잖아요. 그 기간 동안 노조사무실을 회사 안에 둘 수 없으니, 어떤 사무실을 얻을까를 두고 남은 10명의 조합원이 토론을 했어요. 공통적으로 첫 번째 나온 게 화장실이 좋아야 한다였어요. 거리 농성을 하는 사람들은 화장실 문제가 특히 힘들거든요. 인근 열린 화장실을 찾기 어려우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농성할 때는 물을 안 마셨어요. 두 번째는 늘 불안한 생활이다 보니 편안하고 아늑했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 그런 사무실을 구했습니까.

“욕조까지 구비된 화장실에 방 2개와 거실이 있는 작은 빌라를 얻었어요. 그런데 지방에서 집회나 재판 때문에 상경하는 노동자들이 계시잖아요. 경제적 여력이 없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저희가 낮 동안 노조사무실로 사용하는 이 집에서 주무신 후 일을 보셨어요. 저희와 밥이나 술도 같이하고 투쟁 이야기도 나누면서 이 집이 사랑방처럼 됐어요. 그것을 모티브로 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언제든 와서 밥도 먹고 빨래도 하고 잠도 자고 투쟁 얘기도 나눌 수 있는 쉼터를 마련해보자고 제안하게 된 거예요. 5년, 10년 동안 함께 싸워온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노동자들도 공동 제안자로 나섰고요.”

- ‘꿀잠’은 공공 지원 없이 노동계, 시민사회, 문화예술, 종교계 등 3000여명의 후원과 더불어 연인원 1000여명의 다양한 사람들이 직접 망치와 톱을 들고 참여해 완성했다지요. 그동안 어떤 분들이 ‘꿀잠’을 거쳐갔나요.

“개소 뒤 4년간 1만5000여명의 노동자 및 다양한 활동가들이 머물렀어요. 발전소에서 일하다 숨진 김용균씨의 부모님과 문중원 기수의 아내 오은주씨, 열악한 방송환경을 비판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한빛 PD의 유족 등도 계셨고요.”

- 무엇보다 산재 등 노동현장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가족을 지켜보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온 마음을 다해 함께해야겠구나 생각해요. 유가족들이 불편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마음을 잘 추스를 수 있고, 함께 싸워나갈 수 있도록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이죠. 그분들이 겪은 일은 바로 내 문제이자 우리의 문제니까요.”

- 서울 신길동 재개발로 ‘꿀잠’이 철거 위기에 처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잘 해결됐습니까.

“다행히 재개발조합과 합의가 이뤄졌어요. 현재 ‘꿀잠’의 존치에 준하는 조건(대체부지 등)으로 신길2구역 재개발 지역 내에 마련하기로 했어요.”

차별 없이 서로 존중하고 더불어 사는 세상 만드는 데 뭐라도 보탬 될 것

김소연씨가 지난달 29일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비정규노동자 쉼터 ‘꿀잠’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김소연씨가 지난달 29일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비정규노동자 쉼터 ‘꿀잠’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그는 연애나 결혼을 할 틈조차 없이 험준한 길을 걸어왔다. ‘왜?’라는 우문(愚問)에 돌아온 그의 현답(賢答)은 이랬다.

“내가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최소한 사람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 거잖아요. 누구는 더 특별히 잘난 사람이고, 또 누구는 못난 사람인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니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어떤 차별도 없이 서로를 존중하고 생계 걱정 없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하니까 뭐라도 보탬 되는 일을 함께하는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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