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러링’의 정당성과 한계, 그리고 메갈리아는 왜 범죄집단이 아닌가

2016.08.03 09:48 입력 2016.08.03 11:18 수정
미래 맑스주의 페미니스트

‘메갈리아’를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집니다. 작가,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티셔츠 사태와 웹툰 작가, 메갈리아와 미러링, 페미니즘에 관한 글을 향이네에 보내왔습니다. 향이네는 기고를 1일부터 7회에 걸쳐 싣습니다. 토론을 위한 반론도 환영합니다. h2@khan.co.kr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기타뉴스]‘미러링’의 정당성과 한계, 그리고 메갈리아는 왜 범죄집단이 아닌가

‘미러링’: 현실을 반대로 뒤집어 보여줌으로써 현실의 부조리함을 꼬집는 풍자 기법

저 시가 자본가를 납치·유괴로, 경찰을 폭력시위로 처벌하자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이윤은 노동자로부터 빼앗은 것이며 노동자는 그것을 힘으로 되찾아와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걸 그런 방식으로 하자고 저 시를 쓴 것은 아닐 터다. 백무산이 ‘납치범’ ‘과격시위’ ‘폭력시위’ 등의 용어를 노동자의 입장에서 재정의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당해왔던 그대로 경찰에게 복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빼앗긴 것을 되찾고 사회 일반의 정의를 실현하려는 저항을 ‘과격시위’, ‘폭력시위’로 몰아붙여 폭력으로 압살하는 자본주의 법담론의 부조리를 폭로하기 위해서이다.

폭력은 나쁘다.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언어폭력도, 인터넷상의 폭력도 마찬가지다. (‘여혐은 현실 어디에나 있지만 남혐은 컴퓨터를 끄면 없어진다’는 반론은 이 점에서 문제가 있다.) 지금 메갈리아를 지지하는 사람들이나 거기에서 활동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여기에 반대하는 이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나쁜 폭력이 여성을 대상으로는 어디에서나 만연하고, 별반 큰 문제가 아닌 것처럼 여겨져 왔다는 것이다. 사람을 성기로 환원하고, 외모가 못생겼다고 온갖 욕과 조롱을 퍼붓고, 일도 가사도 감정노동도 척척 해내는 것을 당연한 듯 요구하는 것은 분명히 보편 인권에 반한다. 그럼에도 이 모든 일들은 여성에게, 여성임을 이유로 가해질 때는 그래도 되는 것처럼 용인되어 왔다. 이 모든 일들의 대상을 남성으로 바꿔놓는 미러링은 이런 모순을 폭로하는 기법이다.

메갈리아에 대해 쏟아지는 비난의 대부분은 ‘당해왔던 대로 보복하겠다는 건 똑같이 못된 짓 아니냐’라는 논지를 밑에 깔고 있다. 메갈리안들이 진심으로 당한 만큼 복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해도 나로서는 그럴 만하지 않은가 싶긴 하지만, 그 이전에 이것은 메갈리아가 여성과 남성의 처지가 뒤바뀐 일종의 가상세계를 전제로만 성립한다는 사실에 눈을 감고 풍자를 현실과 등치하는 부당한 해석이다.

남성이 단톡방에 어떤 여성을 대상으로 ‘따먹고 싶네’ 라는 말을 할 때, 그것은 농담이든 진심이든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강간을 옹호하거나 용인하는 ‘강간 문화’라는 현실적 권력관계에 합치하는 발화이다. 이 사회에는 강간의 폭력성을 희석하고, 남성의 자연스러운 성욕 표출이라며 묵인해주고, 심지어 남성다운 것으로 여기는 문화가 만연해 있다. 여성을 실제로 ‘따먹는’(강간하는) 행위는 이 문화의 정점이자 중심이다. 그것은 물론 잘못되었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하나의 사회적 문법이다.

반면 어떤 여성이 메갈리아에서 남성을 대상으로 ‘따먹고 싶네’라는 말을 하는 것은 사회적 문법에 따르는 행위가 아니라 그 문법을 완전히 거스르는 행위이다. 신체적, 사회적으로 약자인 여성은 나이나 계급 등 다른 권력을 동원하지 않는 한 남성을 강간할 수 없다. 강간 문화를 포함한 이성애 성각본(性脚本)은 남자를 능동적 주체로 여자를 수동적 대상으로 놓지 그 반대로 하지 않는다. 이것은 메갈리안도 알고 메갈리안 아닌 사람들도 알고 사회 전체가 다 아는 현실이다.

그러면 현실의 권력관계에 반하는 이러한 발화는 왜 나오는가? 왜 많은 여성들이 이러한 발화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가? 바로 그 현실적 권력관계가 이 말을 폭력이 아닌 ‘농담’이나 ‘음담패설’로, ‘정상적 질서’로 통용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문법과 합치하는 방향이 아니라 반대하는 방향으로 이 발화가 나왔을 때에야 그것이 얼마나 문제적인지를 사회가 온전히 인식하기 때문이다. 강간을 당했으니 강간으로 갚아주어야 한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미러링의 효용 1. 알아듣기 쉽고 강력하게 현실을 폭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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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비유는 논리적으로 백 마디를 설명하는 것보다 더 빠르고 쉽게 문제를 인식하도록 도와준다. ‘정상적인’ ‘당연한’ ‘원래 그런’ 것으로 인식했던 현실이 성별만 바꿔놓으면 누가 봐도 우스꽝스럽고 말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만큼 성차별의 위력을 절감하는 순간이 있을까? ‘김치녀’라는 단어의 폭력성에 대한 수많은 여성들의 항변을 꿋꿋하게 무시하던 DC인사이드 운영진은 메갈리아가 생기자마자 비로소 ‘김치남’과 ‘김치녀’ 모두를 금지어로 지정했다. 이 유명한 사건은 그간 통용되어온 ‘표현의 자유’가 사실은 그저 여성에 대한 혐오와 낙인찍기는 묵인하자는 말에 불과했음을 극도로 간명하고 명확하게 드러냈다. ‘표현의 자유’의 한계나 농담의 범위, 사회적 권력관계나 혐오범죄에 대한 어떤 논변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메갈리아가 많은 여성들의 ‘코르셋 벗기’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 것은 미러링이 이러한 사회적 이중기준의 모순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미러링의 효용 2. 혐오발언에 대항할 무기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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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몸무게, 성을 가지고 희롱하고 모욕하는 발언들은 남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 여성의 입을 닫게 만드는 데 무척이나 유용한 수단이었다. 수위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 사회에서는 ‘여성은 기본적으로 성적 대상이며 대등한 인격체가 아니다’라는 인식을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공유하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서는 상대방이 여성임을 상기시키는 것만으로 상대방이 말하는 내용을 무화하고 사람들이 상대방을 성적 대상으로 환원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이 프레임이 일단 동원되면 여성은 그 안에서 무슨 논리를 펼치든 ‘못생긴 여성의 히스테리’라는 시선을 면할 수 없다.

미러링은 이러한 혐오발언의 문법을 모방함으로써 그 프레임에 반격할 수 있는 언어를 여성에게 제공한다. 이는 여성을 발언권을 가진 대등한 주체로 복권시키는 하나의 강력한 수단이다. 혐오발언에도 평등권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당하지 않고 똑같이 받아치는 상대에게는 함부로 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메갈리아가 등장한 후 남성들이 여성 혐오 발언을 함부로 하는 일이 줄어들었다고 느끼는 누리꾼들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미러링이 아닌 것/잘못된 미러링

미러링에 대한 이상의 논의는 타깃이 되는 부조리한 권력을 정확하게 겨냥해서 뒤집는 ‘정반사’에만 타당하다. 메갈리아나 메갈리아의 파생사이트 일부에서 사용하는 몇몇 언어나 문화코드는 이런 식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이곳들에서 일반적, 반복적, 의식적으로 사용되는 언어 가운데 실패한 미러링이거나 미러링이 아닌 사례들을 골라보았다. (메갈리아 참여자들조차 대부분은 알지도 못했을 게시글을 가져와서 메갈리아를 대표하는 양 제시하는 것은 부당하다. 불특정 다수 대중이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말을 섞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특성상, 이런 기준으로 ‘반인륜단체’를 판별하기 시작하면 어느 커뮤니티든 ‘반인륜단체’를 면할 수 없다. 이런 부당한 공격 방식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상황이 매우 유감스럽다.)

-원본이 없거나 불분명한 경우, 난반사

여성들에게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성적 억압을 뒤집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남성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발화는 미러링이라고 볼 수 없다. ‘한남충’은 ‘김치녀’의 대응어로서 미러링이라고 볼 수 있지만, ‘똥꼬충’은 레즈비언에 대한 비하어에 대응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냥 게이를 공격하는 말이기 때문에 미러링이 아니다. ‘재기해’ 역시 ‘운지해’의 대응어로서 나왔지만 원본이 여성혐오표현이 아니기 때문에 성적 이중기준을 꼬집는 기능을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극단적 미소지니를 조롱하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나름의 정당성을 찾는 의견도 있겠지만, 이것은 미러링과는 다른 논리다. 그냥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현실에 존재하는 남성 개인에게 ‘한남충’ ‘씹치’ 등의 표현을 쓰는 것도 여성에게 차별적인 사회 일반이나 여성 혐오 발언의 주체를 정조준하지 않기 때문에 정반사가 아닌 ‘난반사’에 해당한다.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답습하는 경우

미러링은 사회적 문법을 정반대로 뒤집는 것이다. 남성을 겨냥한 여성의 발화라고 해도 다른 방면에서의 소수자성을 공격하는 것은 소수자 혐오라는 사회적 문법을 답습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러링이 아니라 단순한 모방·변형에 불과하다. 항문섹스에 대한 주류 사회의 포비아를 똑같이 모방하는 ‘똥꼬충’이 대표적 사례이다. 외모 차별에는 성 부가적 차별의 속성이 있기 때문에 ‘똥꼬충’만큼 칼같이 ‘답습’이라 판정하기는 어렵지만 비만인을 비하하는 표현인 ‘파오후’를 비판 없이 가져다 쓰는 데에도 비슷한 문제점이 있다. ‘월 200도 못 버는 게 어디서 들이대노’처럼 소득 낮은 남성을 멸시하는 언어 역시 경제적 조건을 따지는 여성들을 ‘김치녀’라고 낙인찍는 데 반발하는 위악의 성격이 있기는 하지만 빈곤과 저임금을 개인의 무능 탓으로 돌리는 주류 이데올로기에 편승하는 표현이다. 이 또한 미러링이라 보기 어렵다.

메갈리아가 발행한 남성잡지 ‘맥심’을 미러링해 발행한 잡지 ‘멕심’

메갈리아가 발행한 남성잡지 ‘맥심’을 미러링해 발행한 잡지 ‘멕심’

미러링의 한계

그렇다면 ‘제대로 된 미러링’은 문제가 없고 전적으로 긍정적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모든 전략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미러링 역시 고유한 장점이 있는 만큼 벗어날 수 없는 한계와 위험성도 있다. 메갈리아가 보여주는 잘못된 측면들 중에는 원본이 명확하고 정반사된 미러링에도 어느 정도 수반될 수밖에 없는 문제들도 많다.

미러링의 단점 1. 진심이 되어버릴 위험이 있다.

여러 권의 소설과 대중적 신학서를 남긴 작가 C. S. 루이스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 숨어있는 소소한 영적 유혹들을 드러내기 위해 악마의 입장에서 인간의 생활을 묘사하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악마의 관점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의 사악함을 한계까지 추적하려는 거창한 시도가 아니라 그저 일상을 성찰하는 소박하고 위트 있는 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 S. 루이스는 책을 다 쓰고 나서 ‘쓰는 동안 마음이 비틀리고 왜곡되어 힘들었다’며 괴로운 심경을 토로했다.

기독교인이 악마의 관점을 빌어오는 데도 가면과 진짜 얼굴의 구분이 흐려지는데, 하물며 빌려온 관점이 부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경우라면 어떨까? 아무리 역할극을 위한 가상이라고 해도, 지속적으로 ‘남성혐오’의 렌즈로 사물을 보다 보면 그만 진심으로 ‘남혐’을 내면화하게 될 위험이 분명히 있다. 메갈리아의 여러 파생사이트 가운데 ‘워마드’ 등 일부는 실제로 ‘남성혐오 커뮤니티’를 표방한다.

‘당해온 게 있는데 남혐이 뭐가 문제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인류가 남성과 여성으로 갈라져 서로를 증오하는 것은 아무도 행복하게 만들지 않으며 별로 정의롭지도 않다. 성별주의는 결국 사회 구조의 문제이며 이 사회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남성, 여성, 그 외의 성별 모두가 연대해야 한다는 거창한 이야기는 제쳐두더라도, 사람을 성별로 일반화해 선입견을 품는 것은 기본적으로 옳지 않다. 그런 일 좀 안 당하자고 싸우는 거 아닌가.

미러링의 단점 2. 상호교차성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

계급모순부터 시작해서, 이 사회에는 성별주의 이외에도 이성애자 중심주의, 비장애인 중심주의, 인종주의, 나이주의 등 수많은 사회적 억압들이 있다. 누구의 경험도 이 중 하나로 환원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억압들이 서로 얽혀 교차한다는 관점에서 현실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미러링은 하나의 모순을 축으로 사물을 뒤집음으로써 부조리를 직관적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기법이기 때문에 이분화와 도식화를 수반하기 쉽다. 축이 되는 모순 이외의 다양한 차이들을 지워버리거나 부차화할 가능성도 있다. 메갈리아의 많은 게시글들은 다분히 젠더환원론적이다.

미러링의 단점 3. 현상에 매몰되어 구조를 간과할 수 있다.

남성-여성의 자리를 바꿔치는 것은 현상적으로 분명하게 나타나는 남성과 여성의 처지 차이를 드러내는 데 매우 효과적인 기법이다. 그러나 이런 작업에만 집중하다 보면 외견상 드러난 여성과 남성 간 성별 갈등에만 주목하고 그 이면에 있는 구조적 원인을 간과하기 쉽다.

여성 혐오는 언뜻 남성 기득권집단과 이에 도전하는 여성간의 충돌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여성을 멸시하는 의식과 문화는 현실의 표층에 불과하다. 아무리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려고 노력해도 기업들이 ‘아내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장시간 노동할 수 있는 남성 노동자’를 표준으로 삼아 여성 노동을 배제하고 사회가 가사·육아·돌봄을 책임지기를 거부하고 개별 가정 내의 여성에게 이를 전가하는 한 여성은 언제나 사회경제적으로 종속된 지위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 구조 하에서 여성 혐오는 비옥한 토양에서 자라는 잡초마냥 잘라도 잘라도 자꾸 자라나온다. 최근 몇 년간 여성 혐오가 심화된 것 또한 신자유주의 하에서 경쟁과 불안정이 심화되면서 위기감, 박탈감을 느낀 남성들이 사회적 희생양을 찾기 시작한 데에 어느 정도 원인이 있다.

물론 분노와 불만을 정말로 책임이 있는 지배계급에게 돌리지 못하고 더 약한 사람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비열함에 ‘민중성’이라는 이름으로 면죄부를 줄 여지는 조금도 없다. 그러나 여성과 남성을 공히 억압하는 사회 구조가 아니라 그 구조의 압력을 그릇된 방식으로 해소하는 남성들에게만 주목한다면 증상이 아닌 원인을 해결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없다. 여성에 대한 모든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려면 현상적 성별 대립을 넘어 사회 체제를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메갈리아에 올라오는 표현들 중에는 분명히 ‘미러링’이라는 이유로 정당화되기 힘든 것들도 섞여 있다. 그 자체로는 정당화될 수 있는 미러링 또한 자칫 진심으로 번질 위험이 있고 현실을 도식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와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미러링을 현실과 등치하거나 나아가 미러링을 활용하는 사람들 전체를 악마화할 근거는 될 수 없다.

어디서든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면 시위대 일부가 경찰을 집단린치하는 등의 ‘사고’가 반드시 한두 건씩은 일어난다. 이런 통제되지 않은 불필요한 폭력을 약자의 저항이라는 이유로 정당화할 수는 없으며, 시위대가 이러한 폭력을 자체적으로 통제하지 못했을 때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것은 감수해야 할 대가이다. 시위대의 폭력이 정당 방위에 필요한 최소한에 해당하는 경우에도 당사자들에게 폭력이 미치는 악영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모든 폭력은 당하는 사람에게는 분노와 증오를, 가하는 사람에게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둔감함을 심어놓게 마련이다) 끊임없는 성찰과 반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를 근거삼아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는 집회·시위를 전부 악마화하거나 이러한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마녀사냥하는 것은 모든 집회·시위를 사회적 금기로 만들고 싶어하는 정권과 보수언론이나 하는 짓이다.

결론: ‘미러링’은 사회 풍자이지 반사회적 혐오담론이 아니다

메갈리아는 남성에 대한 증오로 결집한 범죄 집단이 아니라 집단 역할극을 통해 성차별을 풍자하는 사회 비판 집단이다. 그 풍자는 때로 부적절하거나 비도덕적일 수 있고, 제대로 사용되었을 경우에도 위험과 한계가 있으며, 따라서 끊임없는 성찰과 비판 속에서 매우 제한적으로만 사용되어야 한다. 메갈리아가 이것을 전적으로 잘해온 것은 아니다. 이런 측면에서 메갈리아를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이를 이유로 미러링 자체를 사회적으로 배척하고 악마화하는 것은 정의 구현이 아니라 사회 풍자에 대한 불관용에 불과하다. 미러링에 대한 이러한 공격은 여성들에게서 자신의 경험을 고발하고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빼앗고 사회 전체의 비판과 표현을 위축시킬 것이며, 결국 여성 해방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적 진보를 방해하게 될 것이다. 메갈리아 마녀사냥이 메갈리안들만의 문제도 페미니스트들만의 문제도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래 : 맑스주의 페미니스트, 20대, 젠더퀴어. ‘다른 세상을 향한 연대’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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