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뿌리 깊은 ‘순수성 집착’…순수하지 않은 것은 정녕 나쁜가

2017.09.17 22:00 입력 2017.09.17 22:05 수정
김성환 | 부산대 인문학연구소 교수

잡스러운 것을 허하라

기존의 가치와 거리가 멀거나, 낯선 것일수록 순수하지 않으며 나쁜 것이라는 순수성의 신화가 한국에서는 아직 큰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삶을 재현하는 문화와 예술은 결국 인간의 그 삶만큼이나 다양하고 잡스러울 수밖에 없다. ‘순수’라는 내용, 형식에 가두기에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잡스러운 것들이 분방하게 펼쳐질 때 삶도 문화도 더 다채로울 것이다. 사진은 기존 가치에 도전한 전위예술가로 세계적 주목을 받은 백남준(1932~2006)의 비디오 아트 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백남준아트센터에 전시된 장면이다.  백남준아트센터 제공

기존의 가치와 거리가 멀거나, 낯선 것일수록 순수하지 않으며 나쁜 것이라는 순수성의 신화가 한국에서는 아직 큰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삶을 재현하는 문화와 예술은 결국 인간의 그 삶만큼이나 다양하고 잡스러울 수밖에 없다. ‘순수’라는 내용, 형식에 가두기에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잡스러운 것들이 분방하게 펼쳐질 때 삶도 문화도 더 다채로울 것이다. 사진은 기존 가치에 도전한 전위예술가로 세계적 주목을 받은 백남준(1932~2006)의 비디오 아트 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백남준아트센터에 전시된 장면이다. 백남준아트센터 제공

■ 순수라는 신화

보수적인 사회에서 낯선 것은 환영받기 어렵다. 목표가 무엇이든 ‘낯선 것’은 ‘나쁜 것’으로 매도당하기 쉽다. 기존의 가치와 거리가 멀수록 매도하는 힘은 커지고 순수한 것이 도리어 강조된다. 순수가 사사로운 욕심과 못된 생각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만큼, 순수하지 않은 것은 못된 것이 된다. 그렇지만 순수가 항상 순수할 리는 없다. 보수가 선을 독점하고 진보를 매도할 때 탄생한 순수라는 개념은 일종의 신화다. ‘못된 생각이 없고 선한’ 순수가 존재한다는 신화, 혹은 망령이 정치를 지배할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멀리 내다보지 않아도 안다. 민족의 순수성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전쟁의 끔찍함에는 그 논리의 헛됨도 포함돼 있다. 만세일계(萬世一系)의 기치를 휘두르다가도 식민지인들의 희생이 필요할 때는 동조론(同祖論)을 들이민 것이 순수성의 신화다.

침략적 국수주의는 사라졌지만 한국에서 순수성의 신화는 여전히 힘이 세다. 특히 문화의 장에서 내용과 형식의 순수성을 검증할 때 신화는 더욱 극성맞다. 상업적 이익이나 정치 이념에서 자유로울 때에만 순수하다는 믿음은 신화의 핵심을 이룬다. 보수적 세계관은 문화를 초월적인 고귀한 정신으로 고양시키고 순수한 문화가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삶에서 문화를 분리함으로써 일상과 동떨어진 진공상태의 결정(結晶)을 가정하는 논리가 생겨났다.

그러나 여기에는 의문이 따라붙는다. 문화는 왜 순수해야 하는가, 혹은 순수할 수 있을까. 진보의 가치가 외면을 받아온 한국 사회에서 대답은 뻔하다. 그래도 현실 문화의 몇몇 장면들을 되새기면서 따져보고 싶다. 순수하지 않은 것은 정말 나쁜가.

전위예술가 모임인 ‘제4집단’은 1970년 광복절에 문화의 독립을 외치며 ‘기성 문화예술인의 장례식’ 퍼포먼스를 벌였다. 하지만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경찰에 연행되며 퍼포먼스는 중단됐다. 사진은 당시 주간지 ‘선데이서울’이 ‘관 메고 예술하니 경관이 웃기지 마’라는 제목으로 다룬 기사.<br />경향신문 자료사진

전위예술가 모임인 ‘제4집단’은 1970년 광복절에 문화의 독립을 외치며 ‘기성 문화예술인의 장례식’ 퍼포먼스를 벌였다. 하지만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경찰에 연행되며 퍼포먼스는 중단됐다. 사진은 당시 주간지 ‘선데이서울’이 ‘관 메고 예술하니 경관이 웃기지 마’라는 제목으로 다룬 기사.
경향신문 자료사진

■ 낯선 것이 주목받을 때

지난 세기말, 새천년에 대한 낙관을 품고 등장한 파격적인 양식들처럼 낯선 것이 대접을 받을 때는 나름의 사정이 있다. 1960년대 들어 뜻밖의 주목을 받은 추상미술도 그러하다. 추상미술의 난해성이 시대의 부름을 받은 데에는 권력의 응원이 한몫했다. 군사정권이 내세운 개혁성과 추상미술의 급진성이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 덕에 추상미술은 오랫동안 한국 미술의 주류로 자리 잡았지만 권력과의 가까운 거리로 추상미술의 전위성과 진보성은 오히려 새로운 보수성의 상징으로 떨어지고 만다. 이런 아이러니는 예술과 권력이 부적절하게 관계 맺은 결과다. 권력이 예술의 역동성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점은 1970년대 이후 전위예술을 향한 집요한 탄압에서도 알 수 있다. ‘제4집단’과 같은 일군의 전위예술의 시도는 얼토당토않은 꼬투리를 잡혀 퇴폐라는 이름으로 철창 신세를 지기 일쑤였다.

도전적인 예술과 정치적 요구가 만났다 헤어지는 장면은 백남준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알려지기 전까지 백남준을 아는 사람은 한국에 많지 않았다. 1960년대 이래 행위예술로 세계적 주목을 받았던 그의 이름은 한국에서는 기껏해야 나체공연으로 연행됐다는 소식을 전하는 ‘해외토픽’에서나 확인된다. 그랬던 그가 1984년 극적으로 귀향한다. 88 올림픽 문화행사에 그의 ‘비디오전(展)’이 예정됐다는 소식과 함께 전 세계를 위성으로 연결하는 ‘우주쇼’를 예고한 신정 연휴 TV 프로그램 안내를 통해 백남준이란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이다.

■ 낯선 손님, 백남준

화려한 쇼를 기대하며 새벽까지 뜬눈으로 기다린 이들은 막상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화면을 채운 기괴한 이미지들이 뜻하는 바는 짐작하기도 어려웠고, 쇼의 주인공인 줄 알았던 백남준은 그 얼굴조차 제대로 내비치지 않았다. 유럽과 미국을 연결하는 위성신호를 백남준의 조국도 나눠 받았지만 한국인 다수는 강렬한 문화적 실험을 받아들일 준비가 덜 된 상태였다. ‘전위 모르면 무식인가’(경향신문, 1984·1·31)라는 볼멘소리가 아마 가장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백남준이 신년벽두 안방극장을 차지한 데에는 올림픽을 앞두고 세계적인 문화 이벤트에 목말랐던 한국의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비디오 아트의 맥락과 의미를 명확히 수용하기는 힘들었지만, 백남준을 통해 한국의 이미지와 예술의 천재성을 세계에 과시했다는 자찬만은 가능했다(동아일보, 1984·6·22).

이후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한국과 두 번 더 만났다. 86 아시안게임을 기념해 ‘바이 바이 키플링’을, 88 올림픽 직전에는 ‘손에 손 잡고’를 공연했다. 평가는 엇갈렸다. ‘바이 바이 키플링’은 내용 절반이 한국을 널리 알리는 데 쓰였다고 기뻐한 쪽도 있었지만(경향신문, 1986·10·10), 한편에서는 미국과 일본에 비하면 한국의 이미지가 보잘것없다는 이유로 ‘예술을 내세운 일본 선전쇼’로 폄하하고, 예술적 가치가 떨어졌느니, 백남준 신화는 깨어졌느니 하며 비난했다(조선일보, 1986·10·11). 남대문시장 상인의 호객행위 따위의 이미지로 한국을 표현한 데 대한 억하심정이야 이해한다 해도, 판단의 기준점을 예술성으로 되돌린 것은 의아스럽다.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예술의 순수성을 거론한 것은 비디오 아트 열풍이 결국 허상임을 실토한 셈 아닌가. 전작의 비난을 고려한 탓인지 ‘손에 손 잡고’에는 한국인이 좋아할 만한 이미지가 풍성하게 담겼다. 그러나 세계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리틀엔젤스와 같은 한국 선전이 너무 많았다는 뉴욕타임스의 혹평은 특히 뼈저렸다(김홍희, <백남준과 그의 예술>).

애초부터 백남준의 전위성은 한국의 기대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올림픽에 버금가는 예술적 성취를 바랐지만 비디오 아트의 일차적인 목표는 그런 예술성에 대한 도전에 있었다. 20세기 ‘물질문명’의 총아인 텔레비전 속에 온갖 잡다한 일상을 융해시켜 혼란스러운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비디오 아트의 외양이다. 이를 통해 한국인의 천재적인 예술성을 드러내려는 시도는 성립되기 어렵다. 백남준은 인터뷰에서 “예술은 사기이자 장사”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이 말이 비디오 아트의 본질을 대변하는 것인지 모른다.

2013년 7월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새 장편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가 발매되자 책을 사기 위해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 독자들이 줄지어 서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3년 7월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새 장편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가 발매되자 책을 사기 위해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 독자들이 줄지어 서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예술은 어디 있는가

20세기 후반 새로운 문화적 도전 속에서도 순수성에 대한 기대는 변함없었다. 한국에서 문학은 순수성의 신화가 유독 오래 지속된 장이었다. 식민지 시기부터 문학사의 중요한 장면마다 순수문학 논쟁은 반복적으로 등장했는데, 1960년대 순수·참여 논쟁이 대표적이다. 참여문학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세력으로 매도한 순수문학 측의 확신에 찬 태도와 순수라는 개념의 명징성은 반비례했다. 논쟁이 격해질수록 문학의 순수성은 더 불분명해졌다. 문학작품이란 기껏해야 불쏘시개 정도의 쓰임새밖에 없는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궤변 말고는 순수성을 실증할 방도를 찾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상업성과 정치성에서 벗어나 예술의 순수성이 존재한다면 이를 보증하는 것은 무엇일까. 노벨 문학상 정도면 괜찮을까.

아닌 게 아니라 노벨 문학상이 실제 그런 역할을 했다. 일본문화의 ‘색(色)’을 강조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에 기대어 일본문화를 색정(色情)의 왜색문화로 규정하고, 일본문학은 본질적으로 저급한 통속문학·색정문학일 뿐이라고 말하는 놀라운 비약이 먹혀들었던 때가 1960년대다(신일철의 ‘문화적 식민지화의 방비’, <사상계>, 1964·4). 즉 일본문학은 세계문학이라는 예술의 보편성에 다다르지 못했단 얘기다. 그러던 중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자 일본문학을 부정하던 이들은 혼란에 빠졌다. ‘좋은 문학’에 한정해 일본문학을 받아들인다는 절충론을 내세웠지만 예술의 순수성을 뒷받침한 무논리성은 달리 수습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일본문학은 능동적인 발의가 아니라 노벨 문학상이라는 국제적 공인에 승복하면서 예술적 시민권을 얻은 셈이다(윤상인 외, <일본문학 번역 60년 현황과 분석: 1945-2005>).

그 후로도 이런 사정은 나아지지 않은 듯하다.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열풍이 일었을 때 문단의 일반적인 평가는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상업적, 통속적, 선정적 등 온갖 나쁜 수식어가 다 등장했고, 심지어 음담패설이라고도 말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문학의 이상에서 동떨어진 하급문학’이라 결론 내렸다(유종호, ‘문학의 전락-무라카미 현상을 놓고’, <현대문학>, 2006·6). 엄밀히 말해 <노르웨이의 숲>을 쓰고 읽는 행위는 문학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 유행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판단은 조만간 수정돼야 할지 모르겠다. 2000년대 이후 그의 작품은 유럽의 유수한 문학상을 수상했고, 해마다 노벨 문학상의 유력 후보로 거론되기 때문이다. 그가 노벨상을 받는다면 우리가 믿고 있던 ‘문학적 이상’은 또다시 갱신될 것이다. 물론 타의에 의해서.

■ 우동은 우동

순수가 좋다지만 순수하지 않다고 나쁜 것은 아니다. 특히 잡스러운 현실이 녹아든 대중의 문화는 그 나름의 의미와 역할이 있다. 굳이 순수를 내세워 잡스러운 것을 없애려면 정치적 정당성 말고도 현실적인 타당성을 고려해야 한다. 순수하지 않아서 나쁜 것인지, 순화하여 무엇을 얻을 것인지를 따져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마지막으로 우리의 언어를 생각한다.

해방 이후 일관성을 유지한 몇 안되는 정책 중 하나가 국어순화 정책이다. 식민지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 순화 대상으로 첫손에 꼽은 것이 우리의 언어, 즉 ‘국어’다. 1949년 한글날을 맞아 한글학회는 일상의 일본어를 대체할 순화어 목록을 발표했다(동아일보, 1949·10·9). 제시된 순화어 중에 튀김이나 덮밥처럼 성공적인 사례도 있지만 실패한 경우도 많다. 일례로 우동의 순화어 가락국수는 끝내 우동을 대신하지 못했다. 우동은 우동으로 남아 지금껏 사랑받지만 가락국수는 대전역 명물 정도로 떨어졌다. 언중(言衆)이 지시 대상의 실체를 인정하고 소통의 기호로 쓰는 언어를 인위적으로 바꾸기는 무척 힘든 일이다.

그런데 가락국수는 죽지 않았다. 대전역이 아니라 정책과 심의 속에 살아남아 아직도 힘을 쓴다. 박명수, 제시카의 ‘냉면’을 본떠 만든 노래 ‘우동’은 가락국수가 순화어로 명시돼 있어 심의를 통과하지 못할 것을 걱정해 방송심의를 포기했다고 한다. 그 바람에 ‘우동’은 방송에서 들을 수 없는 비운의 노래가 되었다. 가락국수는 참으로 힘이 세다.

여느 문화들처럼 하나의 언어도 다양한 기원을 가진다. 외래의 것이든, 낯설게 변형된 것이든 잡스러운 기원에서 출발한 말들은 사람들의 쓰임을 거쳐 국어라는 전체에 도달한다. 온라인에서 만들어진 신조어나 외계어 같은 파자(破字)놀이도 결국 우리 삶에서 언어로 기능을 다한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순수성을 강제할 수 있을까. 국어순화 공익광고는 아름답지 않은 우리말과 현실적인 신조어 중에서 어떤 것이 옳은지 말해주지 않는다. 낯선 언어들이 한국의 순수성을 얼마나 파괴했는지도 알 수 없다.

삶을 재현하는 문화와 예술은 그 삶만큼 다양하고 잡스럽다. 이를 하나의 순수한 내용과 형식 속에 가두기는 불가능하다. 대중의 문화는 삶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가치들이 중층적으로 쌓여 형성되기에 예술성이 발생하는 순간은 매번 다르다. 어느 비평가는 그 순간을 “뽕 기운” 한마디로 정리한 적이 있다(박성봉, <마침표가 아닌 느낌표의 예술>). 잡스러운 것들이 ‘뽕 기운’처럼 분방하게 펼쳐질 때 삶도 문화도 더 다채로운 색을 띨 것이다. 그러니 부디 잡스러운 것들을 소중하게 받들길 기원한다.

▶필자 김성환

[금지를 금지하라](17)뿌리 깊은 ‘순수성 집착’…순수하지 않은 것은 정녕 나쁜가


한국 현대소설을 전공했으며, 비교문화학의 관점에서 한국 문학과 문화를 연구하고 있다. 부산대 인문학연구소 교수로 다양한 문화현상 속에서 현재 우리 삶의 기원과 미래를 발견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최근 논문으로 ‘1960~70년대 노동과 소비의 주체화 연구’ 등이, 함께 쓴 책으로 <1970 박정희 모더니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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