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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직원들 “날 시험하지 말라” “소송하면 다 무너져” 회유·협박

2019.08.31 06:00 입력 2019.09.01 15:08 수정

국정원 ‘민간인 사찰’ 정보원 활동 ㄱ씨, 녹음파일 들어보니…

국가정보원의 정보원으로 활동한 ㄱ씨가 국정원 직원과 주고받은 문자메시지. ㄱ씨가 정보원 활동을 그만두겠다고 하자, 국정원 직원이 만류하기 위해 수원시의 한 건물에서 만나자며 주소를 보냈다.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국가정보원의 정보원으로 활동한 ㄱ씨가 국정원 직원과 주고받은 문자메시지. ㄱ씨가 정보원 활동을 그만두겠다고 하자, 국정원 직원이 만류하기 위해 수원시의 한 건물에서 만나자며 주소를 보냈다.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그만두겠다”고 하자 만류·질책
되레 더 깊숙한 정보 캐내라 주문
돈 건네고 ‘보안 각서’ 요구도

ㄱ씨, 국민권익위에 신고하며
‘공익신고자’로 신변 보호 요청

“언젠가 지금처럼 아무런 보상 없이 버려질 걸 예상해서 저도 오랜 기간 준비했어요. 몸도 마음도 처참한 상황이라 경제적·정신적 피해 등 국가 상대 소송을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저를 대한 모습을 봐선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할 것 같네요.”

2014년 9월부터 국가정보원 정보원으로 활동한 ㄱ씨는 지난 16일 오전 11시19분 자신을 담당한 국정원 직원 ‘유 박사’에게 이 같은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ㄱ씨는 국정원 지시에 따라 한 시민단체의 간부로 일하며 과거 학생운동 단체 출신 선후배들 동향을 보고(경향신문 8월30일자 16면 보도)해왔다. ㄱ씨는 지난 29일 국민권익위원회에 국정원이 자신을 이용해 민간인 사찰을 했다며 신고하고 공익신고자로서 신분보장 및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경향신문은 ㄱ씨에게 국정원 직원과의 대화가 담긴 녹음 파일 20여개를 받아 당시 구체적 상황을 파악했다. 국정원은 ㄱ씨의 ‘탈출’을 막으려고 했다. 유 박사는 하루에도 수차례 ㄱ씨에게 전화를 걸어 만류하며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이미 16일 ㄱ씨는 이동식저장장치(USB)에 자신의 정보원 활동 증거들을 담아 언론에 전달한 상태였다. 유 박사와는 17일과 19일 2차례 만났다. 19일에는 경기 수원시의 국정원 경기지부 근처 카페에서 유 박사의 상사인 ‘과장’도 함께 만났다. 과장은 “(언론에 보낸) USB를 회수하라”고 ㄱ씨를 질책했다. 이들은 ㄱ씨의 경제적 곤란을 어느 정도 해결해주겠다고 했다. 이때 ㄱ씨는 정보원 활동을 그만두기로 마음을 굳히고 ‘사찰’ 증거를 얻기 위해 속옷에 녹음기를 숨겨 갔다.

이 자리에서 과장은 ㄱ씨에게 “나를 상대로 시험하지 말라”며 “왜 그런 문자를 보냈는지 솔직하게 얘기하라”고 했다. ㄱ씨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면서 ‘재발 방지’ 방법을 생각해보라고도 했다. “이런 일이 또 안 생긴다고 남자로서 보장할 수 있나. 사본이 있을 수도 있지만 다음에 USB 회수해서 와. 올 때는 본인이 믿음을 줄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 봐. 선서를 한다든지, 각서를 쓴다든지, 말을 녹음한다든지.”

과장은 ㄱ씨에게 심기일전하라며 시민단체에서 더 깊숙한 정보를 캐낼 것을 주문했다. ㄱ씨가 “지금까지 하듯이 하면 되냐”고 묻자 과장은 “부족하다”고 했다. “1시간이라도 네가 신경만 쓰면 캐치할 수 있는 부분이 상당히 많잖아. 최(감시 대상인 시민단체 대표)나 그런 사람들의 문제 표현들에 대해 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잖아. 본인이 컴퓨터에서 단체 관련해서 쫙 알 수 있는 것 아냐. 전체가 모여서 하는 모임도 있지만 2~3명이 하는 모임도 있잖아. 중요한 이야기 같으면 핸드폰 녹음해주고. 그 정도만 도와주면 우리도 최대한 도와주겠다는 거야.”

유 박사는 약 2년 동안 ㄱ씨를 담당하면서 동생처럼 생각했다고 했다. 유 박사는 ㄱ씨가 문자메시지에 적은 소송 의지를 일축했다. “우리는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하는 거야. 나는 김 대표(ㄱ씨)를 동생으로서 만났기 때문에 만약 소송을 했다면 서로 힘들어지는 모습은 차마 못 봤을 것 같아. 우리야 일거리 많아지고 끝나는 거지만 김 대표는 주변을 둘러싼 것이 다 무너져 버리잖아.”

유 박사는 ㄱ씨와 헤어지며 활동비, 월세, 격려금 등 180만원을 건넸다. 그날 오후에는 ㄱ씨에게 전화를 걸어 국정원 경기지부로 와서 ‘보안 각서’를 쓰라고 요구했다. ㄱ씨는 국정원에 돌아가지 않았다. 23일부터 국정원과 모든 연락을 끊고 잠적했다.

ㄱ씨는 “마음이 후련하지만 두렵고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며 “사찰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싶다. 저도 지난 5년간 가정, 건강, 모든 것을 잃어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그들(국정원)은 내가 폭로하면 양측에게 적이 될 것이라고 했지만 피해자들은 나와 함께해주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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