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과 서초동 사이…“나의 깃발을 들겠다”

2019.10.06 17:20 입력 2019.10.07 13:24 수정

청년 10명 릴레이 기고

난개발·장애인·기후·불평등…

두 광장 어디에도 포함될 수 없는 소수자들의 다양한 목소리 전달

<b>‘검찰개혁 촉구’ 서초동서 촛불 든 시민들</b> 지난 5일 대검찰청과 서울중앙지검이 있는 서울 서초역 부근에서 검찰개혁사법개혁적폐청산 범국민연대 주최로 ‘제8차 사법적폐청산을 위한 검찰개혁 촛불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서초역사거리를 중심으로 교대역과 예술의전당, 대법원, 누에다리 네 방향으로 모여 앉아 함께 행동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제공

‘검찰개혁 촉구’ 서초동서 촛불 든 시민들 지난 5일 대검찰청과 서울중앙지검이 있는 서울 서초역 부근에서 검찰개혁사법개혁적폐청산 범국민연대 주최로 ‘제8차 사법적폐청산을 위한 검찰개혁 촛불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서초역사거리를 중심으로 교대역과 예술의전당, 대법원, 누에다리 네 방향으로 모여 앉아 함께 행동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제공

조국 정국은 ‘두 개의 광장’을 열었다. 서초동에 모인 이들은 검찰개혁과 조국 법무부 장관 지지를, 광화문으로 간 이들은 조 장관 사퇴와 문재인 정부 반대를 외친다. 두 쪽으로 갈라진 것처럼 보이는 광장엔 ‘사이’가 존재한다. 정권이 교체돼도 해결되지 못한 불평등, 사회가 주목하지 않은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두 개의 광장 사이를 비집고 올라온다.

서초동으로도, 광화문으로도 쉽사리 발길을 향할 수 없었다는 청년 10명은 “나는 나의 깃발을 들겠습니다”라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글쓰기 프로젝트를 열었다. 박근혜 퇴진을 위한 촛불정국 때 사회활동가들이 ‘N개의 깃발’이라는 이름으로 각자가 바라는 사회를 공유한 데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고은영·신지예씨 두 여성 청년 활동가가 제안자로 나섰다.

이들은 제안서에서 “세상이 다시 납작해졌다. 오직 두 갈래만 존재하는 것처럼 쪼개졌지만 그 사이 어디에도 포함될 수 없는 수많은 섬들이 존재한다”며 “우리 각자를 향해 안녕의 당부를 담은 편지를 보내자”고 했다. 이들은 서초동과 광화문 어느 곳에도 그간 자신들이 외쳐 온 목소리가 투영되지는 않는 것 같다고 했다. 사람 한두 명의 등·퇴장만으로 개혁이나 정의가 완성된다는 믿음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들은 서초동과 광화문광장이 담아내지 못하는 소수자의 목소리를 전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깃발을 들고 목소리를 외치려 한다.

장애인 탈시설과 학습 공간 마련을 촉구하는 대학원생은 “장애인 야학을 지키기 위해 혜화동 마로니에공원에서 깃발을 들겠다”고 했다. 사이버성폭력 근절을 위해 싸워 온 활동가는 “나는 서초동도, 광화문도 아닌 자매들 속에 있다”며 ‘모든 남성연대’와의 싸움에서 깃발을 들겠다고 했다. 이들은 장애인의 깃발을, 밀양송전탑 주민의 깃발, 성소수자의 깃발, 난민의 깃발, 노동자의 깃발을 들고 나아가겠다고 했다.

경향신문은 청년 10명이 서초동과 광화문 사이에서 고민한 이야기 10편 중 5편을 6일 경향신문 홈페이지에 실었다. IMF 외환위기 때 청소년기를 보낸 뒤 제주에서 난개발 저지 운동을 하는 정당인 고은영씨, 장애인 학습권과 소수자 행정정책 개선을 연구하는 대학원생 변재원씨,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활동가인 페미니스트 서랑씨, 기후정의를 외치는 환경운동가 권우현씨, 제주 예멘 난민국어교사 신현정씨의 이야기다. 7일 추가로 청년 5명의 글을 홈페이지에 싣는다.

[서초동과 광화문 사이]①고은영 “하루하루 버티는 이들 옆에서 깃발을 들겠습니다”

[서초동과 광화문 사이]②변재원 “탈시설과 장애인 학습권을 위해 깃발을 들겠습니다”

[서초동과 광화문 사이]③서랑 “보수와 진보 모든 남성연대와의 싸움에서 깃발을 들겠습니다”

[서초동과 광화문 사이]④권우현 “멸종의 문턱에서 깃발을 들겠습니다”

[서초동과 광화문 사이]⑤신현정 “시민 아닌 시민, 난민을 위해 깃발을 들겠습니다”

■ “사회서 밀려난 약자들 삶의 문제도 광장에서 얘기해야”

#광화문도 서초동도 아닌 #나는 나의 깃발을 들겠습니다 - 청년의 목소리 ①

<b>“나의 깃발을 들겠다”</b> 환경운동가 권우현씨와 대학원생 변재원씨는 각각 기후위기와 장애인 학습권·탈시설을 위해 깃발을 들려고 한다. 청소년들이 ‘석탄 그만’ 등이 쓰여 있는 박을 터트리며 적극적인 기후행동을 요구하고 있다(왼쪽 사진).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서울 종로구 노들장애인야학 앞 도로를 지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나의 깃발을 들겠다” 환경운동가 권우현씨와 대학원생 변재원씨는 각각 기후위기와 장애인 학습권·탈시설을 위해 깃발을 들려고 한다. 청소년들이 ‘석탄 그만’ 등이 쓰여 있는 박을 터트리며 적극적인 기후행동을 요구하고 있다(왼쪽 사진).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서울 종로구 노들장애인야학 앞 도로를 지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장애인·철거민·기후변화 등
세상에 묻힌 의제들도 중요

“나는 나의 깃발을 들겠습니다”라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글쓰기 프로젝트를 진행한 청년 10명은 ‘광화문도 서초동도 아닌’ 소수자의 자리에서 깃발을 들려고 한다. 오랜 기간 사회 주변으로 밀려난 장애인과 난민, 철거민 같은 소수자와 기후변화 같은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내려 한다. 이들 청년에겐 추방당한 이들의 터전과 시끄러운 세상에 묻힌 의제가 중요하다.

■ 나는 ‘○○○’에서 깃발 들겠다

대학원생 변재원씨는 서울 서초동 집회가 열린 지난 5일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 있었다. 그가 환승하려 지난 지하철 2·4호선 사당역에는 서초동 집회에 참가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는 인파들을 뒤로 한 채 정반대인 강북 방향으로 향했다. 이날은 그가 몸담았던 ‘노들장애인야학 탈시설 기원 잔치’가 열리는 날이었다. 생후 10개월에 의료사고를 당해 장애인이 된 그는 고등학교에 엘리베이터가 없어 중퇴 후 검정고시로 대학에 진학했다. 현재 서울대에서 소수자 정책 개선을 위해 행정학을 공부한다.

“국가의 중대사를 논하는 거대 정쟁에 비하면 장애인의 학습권을 보장하기 위한 장애인 야학의 탈시설 잔치는 다소 조촐하고 어쩌면 초라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장애인 야학 교실을 지키기 위해 광화문도, 서초동도 아닌 혜화 마로니에 공원에서 깃발을 들겠습니다.” 변씨에게 장애인 야학의 작은 행사는 “학교에서 배제된 장애인들이 야학에 모여 공부하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인정투쟁이다.

환경운동가 권우현씨가 깃발을 든 장소는 ‘멸종의 문턱’이다. 그는 지난달 21일 혜화역, 27일 세종로 공원에서 열린 ‘기후위기 비상행동’ 집회에 참여했다. 서초동과 광화문 인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적은 수의 사람들이 모였다.

“각종 ‘이례적’ 재난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 온열 질환으로 사망하는 노약자, 노동자, 농민들은 국내에도 적지 않습니다. 기후위기는 이 세계의 가장 끝자리에 있는 것들부터 파멸시키고 있습니다.” 권씨에게 기후위기는 “어느 조직의 누구를 바꾸는 일”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더 귀한 대접을 받으려면 끊임없이 소비하는 구조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했다. 그는 광화문도 서초동도 아닌 “기후위기 시대에 살아남으려는 생명들 곁에서” 자신만의 깃발을 세우겠다고 다짐한다.

제주에 사는 신현정씨는 지난해 6월 예멘 난민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던 때를 “평화를 배운 시간”으로 기억했다. “경해도 구제할 사람은 구제해사주(그래도 구할 사람은 구해야지)”라며 선뜻 잠자리를 내어준 도민들을 기억했다. 하지만 난민들이 두 발을 붙일 공간은 많지 않았다. 법무부는 이들 중 단 한 사람도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전국은 ‘난민 찬성’과 ‘난민 반대’라는 두 쪽으로 갈라졌다.

밀려난 이들은 예멘 난민뿐만이 아니다. 신씨에게는 제2공항 건설로 평생 살던 마을을 떠나야 하는 주민들,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원을 사용할 수 없는 제주 퀴어문화축제 참가자 모두 “시민임을 인정받지 못한 난민”이다. 그는 “죽어가고 아픈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는 사실을 모두 잡아먹는 서초동에도 광화문에도 나갈 수 없다”며 “수많은 ‘시민 아닌 시민’들을 위해 이곳 제주에서 깃발을 들겠다”고 말했다.

■ 광화문도 서초동도 못 가는 이유

청년들이 광화문도 서초동도 아닌 곳에서 깃발을 드는 이유는 분명하다. 어느 쪽도 자신을 대변하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서초동이나 광화문 집회의 구호가 실현된다고 해도 자신들이 원하는 세계는 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활동가 서랑씨는 이번 글쓰기 프로젝트를 하며 조국 사태에 대한 질문을 처음 받았다고 했다. 그는 “조국 수호 또는 조국 반대로 양분된 세계에서 페미니스트, 20대, 여성, 작은 정당의 지지자인 나의 목소리를 궁금해하는 이가 없어보였다”며 “그저 언저리에서 배회하며 이 싸움의 전선이 내 싸움과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자각할 뿐이었다”고 했다.

그는 요즘 “보수 남성연대를 넘어 진보 남성연대와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며칠 전엔 버닝썬 최초 신고자 김상교씨가 여당 의원과 진보단체 인사로부터 “버닝썬 사태를 최순실과 엮어 제2의 국정농단 사건으로 키워야 한다”는 제안을 받았다는 기사를 읽었다. 여성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아 부와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남성연대에 ‘진보’와 ‘보수’는 없다는 문제의식은 더 커졌다. 그는 “국회가 더는 똑같은 얼굴의 중년 남성들로 채워지지 않기를 바란다”며 “서초동도 광화문도 아닌 자매들 속에서 여성 정치를 위한 깃발을 들겠다”고 했다.

정당인 고은영씨는 제주 강정 해군기지 반대 농성을 하던 이들이 경찰에 끌려나오고, 제2공항 건설에 반대한 활동가들이 사법처리 대상이 되는 것을 보며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느낀다고 했다. 개혁된 검찰이 정치적 판단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면 시민의 저항권을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다만, 고씨는 서초동도 광화문도 가지 않았다. 그는 “안전망도 없이 사회에 내던져진 채 열심히 사는 친구들이 눈에 밟힌다”며 “그들에게 삶이 나아진다는 희망을 누가 주고 있느냐”고 되물었다.

공동의 터전·미래 걱정하고
낡은 제도·습관 바깥에서
더 많은 깃발들이 나부껴야

권씨 역시 검찰개혁이나 특권층의 위선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구호에 공감했다. 하지만 사람 한두명의 등·퇴장만으로 이를 이룰 수 있다는 시각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모두가 ‘공정하게’ 계층 상승을 이뤄 부를 축적하고, 다시 그것을 소비하는 사회를 꿈꾸는 것 정도로는 이 위기의 출구를 찾을 수 없다”며 “공동의 터전, 공동의 미래, 공동의 생명을 함께 걱정하는 깃발이 더 많이 나부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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