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블랙리스트 ‘위헌’ 강조한 대법관 4명 “도저히 합리적이라고 볼 수 없다”

2020.01.31 14:25 입력 2020.01.31 15:47 수정

“박근혜 정부 이전까지의 정부에서 문화예술계 지원이 지나치게 이념적으로 좌파적 성향의 개인·단체에게만 편중돼있었다. 이를 바로 잡아 균형을 맞추기 위해 좌파 지원을 배제하고 우파 지원을 늘리라고 지시한 것이므로 위법·부당한 지시가 아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운용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81)은 재판 과정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 논리다.

박정화·민유숙·김선수·김상환 대법관은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선고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판결문에서 보충 의견으로 김 전 실장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들은 “(김 전 실장 등이 한) 행위의 실질은, 그들이 내세운 동기와 명분과는 전혀 달리 헌법과 법률에 위배된다”고 했다.

4명 대법관은 크게 3가지 차원에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왜 헌법에 어긋나는지를 짚었다. ①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어긴 자의적 차별이고, ②표현의 자유 등 문화예술인의 인권을 침해하고, ③밀실에서 결정돼 절차적 하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의견은 박근혜 정부에서 나아가 향후 어떤 정치적 이념과 성향을 가진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같은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편 이들은 블랙리스트에 ‘직권남용죄’ 외에 ‘강요죄’까지도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2017년 1월17일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대치동 특별검사팀 사무실로 출석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2017년 1월17일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대치동 특별검사팀 사무실로 출석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공익을 위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대법관들은 헌법 7조를 꺼냈다. 헌법 7조는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라면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규정한다. 대법관들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은 공익을 실현할 헌법적 의무를 다하기 위한 필수적 조건”이라며 “개인적인 정치적 신념 등 주관성은 공직 수행의 헌법 및 법률 구속이라는 객관성에서 후퇴되어야 한다”고 했다. 즉 공무원의 행위는 국민 ‘일부’가 아닌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문화예술 분야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하게 이같은 헌법 7조의 의미가 준수돼야 한다고 대법관들은 밝혔다. 오로지 자유시장 영역에 맡길 경우 개별성·고유성·다양성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가 문화예술을 지원할 필요는 있지만, 국가 지원이 문화예술의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우려도 있었다. 대법관들은 “국가는 지원 대상인 예술의 내용이나 방향에 개입하는 방식을 통해 구성원의 정신적 일상을 일정 정도 지배하거나 유도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온 게 ‘팔길이 원칙’이다. 이 원칙은 국가가 예술가를 지원할 때 팔길이 만큼 거리를 둔다는 것으로, “지원은 하되 예술의 내용에 대한 간섭은 있을 수 없다”는 의미다. 대법관들은 “단지 특정인이 정부와 반대의 정치적 입장을 갖고 있다거나, 야당의 정치지도자를 지지했다는 것이 지원 배제를 정당화할 합리적 사유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다”며 “헌법의 근본 이념인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부합하지 않음이 명백하다”고 했다.

■블랙리스트는 정부의 메시지

대법관들은 블랙리스트가 문화예술인의 표현의 자유 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단순히 보조금을 주지 않는 것에서 나아가 정부에 반대하면 지원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정부에 억지로 찬성하거나 적어도 반대 의견을 표명하지 않게 유도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대법관들은 “예술가로 하여금 표현의 자유와 정부의 지원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함으로써, 문화예술인들의 예술적 상상력과 이를 표현하려는 의지를 위축 또는 왜곡시킬 수 있다”고 했다.

또 대법관들은 블랙리스트는 예술가들이 지원에서 배제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검열해 정부 의도에 맞는 예술만을 생성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예술활동의 독창성과 창의성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시민들이 정부에게 우호적인 내용의 문화만을 향유하게 할 위험이 있다고 했다. 이는 헌법이 표현에 대한 국가의 사전 검열을 금지하는 취지에도 어긋난다는 게 대법관들 판단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30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판결 선고를 앞두고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에 착석해있다. 연합뉴스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30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판결 선고를 앞두고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에 착석해있다. 연합뉴스

■국무회의 심의 없는 불투명한 결정

블랙리스트 지시에 ‘절차적 문제’가 있기 때문에 적법하고 정당한 국가의 의사결정으로 보기 어렵다는 대법관들의 주장은 2심 판결에는 없었던 내용이다. 헌법 88조 1항은 정부의 권한에 속하는 중요한 정책은 국무회의에서 심의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대법관들은 보충 의견에 이렇게 썼다. “피고인들의 주장 취지처럼 일부 문화예술인에 대한 블랙리스트 명단 작성 및 지원 배제가 행정부 차원에서 중요한 정책사항에 해당한다면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결정했어야 한다. 과연 그러했는가? 그렇지 않았다. 의미 있게 추진해야 할 정책이라는 명분에 부합하는 공식적이고 투명한 절차를 밟았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대통령비서실 소속 몇몇 공무원이 밀실에서 비공식적으로 논의한 것에 불과한 사항은 행정부의 ‘정책’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다.”

행정청이 처분을 할 때는 공정성·투명성·신뢰성 확보를 위해 처분기준을 구체적으로 정해 사전에 공표해야 하지만, 김 전 실장 등은 그러한 기준을 공표하지 않았다.

■“직권남용죄 외에 강요죄도 성립”

당초 검찰은 김 전 실장이 블랙리스트 운용을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 직원들에게 지시한 게 직권남용죄 뿐만 아니라 강요죄에도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2심은 직권남용죄는 성립하지만 강요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김 전 실장 지시를 순차 전달한 문체부 직원들이 산하기관에 해악의 고지, 즉 협박을 하지는 않았다고 본 것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의 다수의견도 2심과 같았다. 그러나 4명 대법관들은 강요죄가 성립한다는 의견을 냈다. 문체부 직원들이 산하기관에 블랙리스트 방침을 수용하지 않으면 사업을 없앨 수 있다고 한 말 등이 협박이라고 봤다. 대법관들은 “(산하기관) 직원들은 인사와 예산, 정책집행까지도 결정할 수 있는 대통령과 그 비서실 직원들 및 문체부 공무원들과의 관계에서 복종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며 “문체부 공무원들의 지원배제 지시는 강압적이었다”고 했다. 김 전 실장이 문체부 1급 공무원들에 사직을 요구한 혐의, 김상률 전 청와대 교문수석이 노태강 전 국장에게 사직을 요구한 혐의도 요구를 받은 대상자들이 공포심을 느꼈을 것이라면서 강요죄가 성립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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