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집 구경의 재미

2020.02.21 16:14 입력 2020.02.21 16:26 수정
이인규

집을 보면 보인다, 누군가의 소우주

집을 보면 사람이 보인다. 누군가의 집을 구경하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많은 것이 있다. 지금의 그가 되기까지 지나온 오랜 시간의 켜를 만날 수도 있고, 언젠가 열망했던 옛꿈을 엿볼 수도 있다. 벽에 붙여 놓은 사진이나 작은 메모에서 그 사람의 정서나 감정 상태도 짐작해볼 수 있다. 지금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말로는 전해지지 않는 어떤 기운 같은 것도 느낄 수 있다. 내가 집 구경을 재미있어하는 이유이다.

‘집 구경’의 재미를 알게 된 것은 어릴 적 엄마의 수납장을 구경할 때부터였다. 엄마는 꾸미는 날이면 내 눈엔 누구보다 예뻤지만, 평소에는 화장을 많이 하시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의 화장대는 어린아이의 마음을 홀릴 만한 색색의 화장품이 가득한 공간은 아니었다. 대신 엄마의 수납장을 채운 건 수년간 써온 가계부였다. 명함보다도 작은 전자계산기를 두드려 숫자를 맞추고, 종이끈을 엮어서 만든 연필통에서 펜을 꺼내셨다. “와, 이 연필통은 나 대학생 때 만든 거니까 벌써 20년쯤 된 거다”라고 얘기하시곤 했다. 부모님 댁 서재에는 40년간 써온 가계부가 우리 집의 역사로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엄마가 옷장을 정리하실 때 곁에서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의외로 강렬한 스타일을 좋아했던 패션 감각에 놀라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같이 나이 들어가는 딸에게 “이거 너 할래?”라며 더러 물려주시기도 하니 훈훈할 수밖에.

필자는 둔촌주공아파트가 재건축되기 전인 2016년 6월, 12가구를 직접 방문해 집의 기억을 담는 ‘안녕, 둔촌×가정방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는 <안녕, 둔촌주공아파트>의 네 번째 책과 라야 감독의 다큐멘터리영화 <집의 시간들>로 만들어졌다. 위 사진은 둔촌주공에서 27년간 거주했던 4인 가족의 작은 방. 아래 사진은 거실을 작은 화원처럼 꾸며놓았던 3인 가족의 집.

필자는 둔촌주공아파트가 재건축되기 전인 2016년 6월, 12가구를 직접 방문해 집의 기억을 담는 ‘안녕, 둔촌×가정방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는 <안녕, 둔촌주공아파트>의 네 번째 책과 라야 감독의 다큐멘터리영화 <집의 시간들>로 만들어졌다. 위 사진은 둔촌주공에서 27년간 거주했던 4인 가족의 작은 방. 아래 사진은 거실을 작은 화원처럼 꾸며놓았던 3인 가족의 집.

가구부터 소품들까지 사람들의 시간과 기억으로 채워
유행과 소비로 넘쳐나는 ‘랜선 집들이’에선 찾을 수 없는
생명력 넘치는 집과 지혜로 가득찬 삶을 마주하게 된다

■ 12가지 빛으로 반짝이던 12개의 집

엄마의 수납장 구경에서 시작되어 인테리어 잡지로 번지고 부동산 매물 구경으로 이어지며 성장해온 나의 오랜 취미 ‘집 구경’은 이후 비슷한 관심을 갖고 있던 영상작가 라야 감독을 만나면서 ‘안녕, 둔촌×가정방문’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우리는 둔촌주공아파트가 재건축으로 철거되기 전이었던 2016년, 당시 그곳에 살고 있던 열두 집을 방문하여 그분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집 안팎을 촬영했다. 이를 모아 나는 500쪽 조금 안되는 두꺼운 책으로 엮었고, 라야씨는 다큐멘터리영화 <집의 시간들>을 완성했다.

아파트의 삶은 다 비슷할 거라는 편견이 흔하지만, 우리가 만난 열두 집은 하나하나 다른 빛을 띠는 삶이 담겨 있었다. 집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닮아있었다. 이를 흔히 쓰는 ‘취향이 드러나는 집’이라고 표현하기엔 마음이 기우는 방향을 뜻하는 ‘취향’이라는 단어가 너무 가벼운 듯하다. 집은 마치 각자의 시간과 기억으로 만들어 놓은 하나의 작은 우주 같았다. 우주라는 단어가 한자로 ‘宇(집 우)’ ‘宙(집 주)’임을 생각하면 ‘집이 하나의 우주’라는 것은 직역일 수도 있겠다. 각자의 성향과 꿈, 구성원의 관계, 삶을 누리는 속도, 머문 시간 등 수많은 변수가 조합되어 집은 만들어진다. 이 물건이 이 사람을 만나 이곳에 자리 잡게 된 연유를 상상하다 보면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런 게 집을 구경하는 맛이 아닐까.

■ 제품 정보만 가득한 ‘랜선 집들이’

명절이면 당연히 찾아가던 부모님 댁에 지난 설에는 가지 못했다. 지난달에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입원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코로나19가 국내에도 번지면서 면회도 어려워져 명절 내내 병원에서 홀로 지냈다. 지루한 시간을 보내며 온라인으로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집 덕후’인 나에게 딱 맞는 것을 찾아냈다. 바로 요즘 유행하는 ‘랜선 집들이(온라인으로 자신의 집을 구경시켜주는 것)’ ‘룸 투어(room tour)’였다. 검색해보니 수많은 콘텐츠가 쌓여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를 궁금해하는 듯하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음식을 먹는지, 집은 어떻게 해놓고 사는지 속속들이 알고 싶어 하고 소개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런데 집 이야기가 가득 쌓여있으면 지루할 틈이 없어야 마땅한데, 이상하게도 보면 볼수록 지겨움을 넘어 지긋지긋해지는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집을 구경하는 일이 이처럼 끝없는 ‘제품 정보’와 ‘리뷰’를 듣는 일이 되어버렸다니! 사람의 삶은 안 보이고 물건만 가득하니 집이라기보다는 쇼룸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맞지 않나 싶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제품 소비와 다를 바 없어진 현실을 보여주는 단면이 아닐까 싶었다.

■ 오래되고 산뜻한, 밀라논나의 집

아무리 심심해도 이런 건 그만 봐야겠다 싶어질 때 즈음, 가뭄에 단비를 만나듯 ‘밀라논나(Milanonna)’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밀라논나’는 이탈리아어 Milano(밀라노)+Nonna(할머니)를 줄인 말로 밀라노에서 유학한 최초의 한국인, 1952년생 장명숙씨가 시작한 유튜브 채널의 제목이자 그의 애칭이다. 2019년 10월, 밀라논나는 은발에 어울리는 화사한 흰옷과 진주 목걸이 차림으로 등장하여 자신을 “산뜻하고 상큼한, 삶에 찌들지 않은 노인”이라고 소개했다. 트위터를 통해 그 첫 영상을 보고 ‘우와! 진짜 멋쟁이 할머니가 나타났네!’라며 반가워했는데, 3개월 만에 구독자가 무려 30만명을 넘어서 있었다. 정말 폭발적인 반응이다.

1952년생 장명숙씨의 유튜브 채널 ‘밀라논나’는 패션뿐만 아니라 집을 통해 한 사람의 삶을 보여주며 구독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1952년생 장명숙씨의 유튜브 채널 ‘밀라논나’는 패션뿐만 아니라 집을 통해 한 사람의 삶을 보여주며 구독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1990년대부터 여러 해외 유명 브랜드를 국내에 론칭한 패션 바이어이자 문화 코디네이터로 활동한 그는 한국과 이탈리아 사이의 훌륭한 가교 역할을 한 공로로 2001년에는 이탈리아 기사 작위까지 받았다. 그의 주특기답게 유튜브 영상은 ‘패션’으로 시작되지만, ‘사람 장명숙’이 드러나는 다른 영상의 조회 수가 현재로선 더 높다. 지금까지 올라온 20개의 영상 중 ‘옷장 공개’, ‘룸 투어’, ‘이야기가 담긴 보석함’, 그리고 ‘아침 루틴’ 편은 집을 통해 한 사람의 삶을 구경하는 재미를 다시금 느끼게 해준 귀한 영상이다.

‘룸투어’ 영상에서는 그가 일년 중 절반을 보내는 밀라노 집을 소개한다. 1900년대 초반에 지어진 이 집은 11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지만 잘 관리되어 산뜻하고 세련되게 느껴진다. 마치 밀라논나처럼 말이다. “오래되고 낡은 것을 버리지 않고 새 생명을 불어넣는 걸 좋아한다”며 소개한 가구와 집기는 참 다양했다. 밀라논나의 할머니가 아버지를 낳은 1919년에 구입한 장부터 할머니가 농사를 지은 박으로 만든 바가지, 부모님이 쓰시던 수납장과 책상까지, 주 시청자인 젊은 세대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존재해온 소장품들이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수업에서 바느질해 만든 편지꽂이도 ‘밀라논나의 분신’이자 여전한 ‘현역’으로 제 몫을 해내고 있었다. 하트 모양의 돌을 보면 수집했다는 그의 ‘돌 컬렉션’이나 한두 달씩 집을 비우는 시간에도 잘 자랄 수 있도록 수경재배로 기르는 아이비가 만들어낸 덩굴에는 아기자기한 이야기와 알뜰살뜰 꾸려온 삶의 지혜도 쌓여있었다.

■ 내가 만들고, 나를 만들어주는 애장품

‘옷장 공개’ 영상에서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아이템인 아버지의 70~80년 된 흰색 셔츠를 입고 나타나 옷장 속 삶의 역사를 보여준다. 옷들은 하나같이 밀라논나에게 맞춘 듯 어울린다. 자신의 체형과 취향을 잘 알고, 갖고 있는 옷들과 어떻게 맞춰 입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 옷입기가 한결 수월해진다고 한다. 최근 공개된 ‘옷 수선비법’ 영상을 보니 단골 수선집에 들러 자신에게 더 편안하도록 조금씩 옷을 다듬는 것이 또 하나의 비결이었다. 이런 정성을 통해 옷은 수명을 연장하고, 그에게는 또 하나의 ‘애장품’이 생겨난다.

‘이야기가 담긴 보석함’ 영상은 제목 그대로 사연 가득한 애장품 컬렉션이다. 아프리카 봉사를 떠날 때 친구가 축원하며 선물했다는 종이 달린 팔찌, 젊은 시절 유명 브랜드의 경영인들을 만날 때 당당해 보이고 싶어서 직접 디자인했다는 과감한 스타일의 금목걸이도 있다. 할머니가 물려주신 금비녀로 만든 브로치, 시아버지의 마고자 단추로 만든 귀고리는 대를 잇는 물건도 고이 모셔둘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을 때 계속 쓸 수 있는 애장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어 자신의 탄생석(오팔)으로 만든 팔찌, 별자리(천칭자리) 아이콘이 새겨진 반지, 그리고 1952년생 용띠라 선물받은 ‘용’ 모양의 펜던트를 보여주며 “우리는 모두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유일무이한 소중한 존재인 만큼 스스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참 중요하다”는 인생철학까지 전한다.

■ 어떤 집, 어떤 우주에서 살고 싶은가요

마지막으로 밀라논나의 ‘다락방에서 시작하는 하루’ 편을 추천하고 싶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의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를 떠올리게 되는 그의 아침 루틴을 소개하는 영상이다. 고요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간단한 스트레칭에 이어 소박한 아침식사를 준비해 먹는 이 짧은 영상에서 그는 ‘자신의 리듬대로 살아가는 아침’을 늙어감의 장점이라 이야기한다. 자신이 꾸린 작은 공간에서 자신의 시간에 따라 돌아가는 평화로운 작은 우주를 목도하는 것 같다.

좋은 집 구경을 마치고 돌아오면, 내 집뿐만 아니라 내 삶까지 돌아보게 된다. 밀라논나의 집과 삶을 엿보면서 훗날 나의 우주, 나의 집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길 바라는지 생각해본다. 끝없이 유행을 좇으며 소비하고 갈아치우는 찰나의 우주일지, 아니면 애장품과 서로 맞춰가며 애정을 주고받는 긴 시간의 우주일지 지금부터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이 실린 신문을 받아든 토요일 아침, 당신에게도 자신의 집과 삶을 찬찬히 돌아볼 작은 여유가 있길.

▶필자 이인규

[안녕, 둔촌 프로젝트 이인규가 만난 다른 집](4)집 구경의 재미


둔촌주공아파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곳에서의 좋았던 시간과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프로젝트를 진행하였고, 다큐멘터리 영화 <집의 시간들>을 공동기획했다. 그동안의 작업을 통해 집에 대한 고정관념에 ‘작은 균열’을 냈다는 것에 작은 의미를 느끼며, 이제는 비슷하게 ‘작은 균열’을 내는 이들을 찾아가 ‘당신에게 집은 어떤 의미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