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CCTV도 없는 ‘60초 청부살인’…1년 만에 찾아낸 용의자가 사라졌다

2020.03.14 06:00

필리핀 한인 사업가 피살사건 ‘4년 만에 일망타진’ 스토리

필리핀 앙헬레스의 코리안타운은 1㎞가 채 안되는 도로를 중심으로 식당·약국·마사지숍·한인마트 등이 모여 있다. 지금은 우발적인 살인사건이 드물게 발생하지만, 과거에는 현지인 킬러를 고용해 완전범죄를 노린 청부살인 사건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필리핀 앙헬레스의 코리안타운은 1㎞가 채 안되는 도로를 중심으로 식당·약국·마사지숍·한인마트 등이 모여 있다. 지금은 우발적인 살인사건이 드물게 발생하지만, 과거에는 현지인 킬러를 고용해 완전범죄를 노린 청부살인 사건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청바지에 하얀색 티셔츠, 노란색과 파란색 줄무늬가 사선으로 들어간 하얀 모자. 마른 편이었지만 단단해 보이는 몸. 비교적 흰 피부로 미뤄볼 때 청년은 스페인계 또는 중국계 필리핀인으로 보였다. 2015년 9월17일 낮 12시4초. 그는 필리핀 앙헬레스 코리안타운의 한식당 ‘멕시칸24’ 건물 철제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2층 사무실 유리문을 맨손으로 열고 들어선 그는 선글라스를 코끝으로 살짝 내리고 사무실 안을 살피며 물었다. “Who is Mr. Park?”(박 선생님이 누구시죠?)

2~3m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박모씨(당시 60세)가 본능적으로 대답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박씨는 앙헬레스의 한 골프장에서 140여개 객실 규모의 호텔을 운영하던 사업가였다. 한국인 직원 김모씨(당시 39세)는 자신을 찾는 손님이 아닌 걸 확인하고 칸막이 위로 들었던 고개를 숙였다. 총성은 예고 없이 울렸다. 총알은 박씨의 복부로 날아들었다. 순간적으로 몸이 뒤틀리면서 허벅지와 엉덩이에도 총알이 박혔다.

허리춤에 45구경 권총을 꽂아넣은 그는 계단을 뛰어내려왔다.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는 식당 앞에 주차된 8~9인승 MPV(다목적차량)인 은색 도요타 이노바 보조석에 올라탔다. 이노바는 도요타가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차종으로 필리핀의 국민차로 통한다. 거리에서 시간당 수십대를 볼 수 있을 만큼 많다. 식당 밖에 설치된 CCTV에는 햇빛이 반사돼 번호판이 찍히지 않았다. 도로변에 있는 CCTV 역시 하필 그날 작동되지 않았다. 범인은 사라졌다.

인테리어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박씨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인부들이 황급히 박씨를 옮겼다. 현장엔 검붉은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있고, 탄피가 발에 차였다. 주변 사람들은 5~6발의 총성을 들었다고 했다. 박씨는 앙헬레스대학재단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졌다.

사건의 실체는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았다. 한국인이 사주한 청부살인이라고 추정만 할 뿐이었다. 현지 경찰은 ‘내 마음같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이 검거한 용의자는 진범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난 1월23일 오전 10시50분경, 앙헬레스의 한 주택가에 무장한 현지 요원들과 한국 경찰들이 모였다. 필리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얀색 외벽의 빌라 앞이었다. 밖에서 두드리자 조용히 문이 열렸다. 한국과 필리핀에서 4년 동안 경찰이 비밀스럽게 파헤친 박씨 살인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기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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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17일, 점심식사를 하던 이지훈 경감(37)은 살인사건이 벌어졌다는 연락을 받고 코리안타운으로 향했다. 살해된 박씨의 사무실에서는 필리핀 경찰의 현장 감식이 한창이었다. 평범한 사무실은 피 묻은 발자국이 가득 찍힌 범죄 현장으로 변해 있었다. 탄피와 총알의 흔적에는 증거물 촬영을 위한 노란 팻말이 세워졌다. 이 경감이 살인사건 현장에 출동한 건 2010년 경찰이 된 뒤 처음이었다.

‘코리안데스크’로 앙헬레스에 온 지 반 년 남짓 지났을 때였다. 코리안데스크는 필리핀에서 한인 관련 사건·사고가 많아지자 2012년 우리 경찰이 현지 경찰과 협의해 마련한 한인 담당 경찰이다.

앙헬레스에 살고 있는 이창호 중부루손한인회 회장은 “해외 교민 살인사건의 60%는 필리핀에서 벌어지고, 그중 60%는 앙헬레스에서 일어난다는 말도 있었다”고 했다.

앙헬레스는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1시간30분 정도 차로 달리면 닿는 관광도시다. 인천을 오가는 직항로가 있고 공항에서 20~30분 거리에 골프장과 카지노가 있다. ‘천사의 도시’라는 이름과 달리 미 공군이 주둔하던 시절부터 자리를 잡은 성매매·유흥업소가 즐비하다. 또한 물가가 저렴해 관광객이 몰리다보니, 이들을 상대로 한 한인 상권이 형성됐다. 반경 1㎞도 안되는 코리안타운에 식당·약국·유흥주점·한인마트·PC방 등 없는 게 없다. 유학생, 주재원, 관광객, 사업가 등은 물론 한국을 떠난 도피자들도 이곳으로 찾아든다. 한국 교민은 비공식 집계로 2만명에 이른다.

목격자와 현장에 달려온 한인회 관계자들의 증언을 들은 이 경감은 바로 감을 잡았다. 박씨를 쏜 범인은 그가 그 시간대 사무실에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는 몰랐다. 훔쳐간 물건도 없었다. ‘건 포 하이어’(Gun-for-hire), 돈을 받고 고용돼 총을 쏘는 킬러. 청부살인 사건이었다.

2014년 2월과 4월, 박씨 사건이 발생한 곳에서 걸어서 5~10분 거리에서 각각 두 차례의 총기 피살사건이 벌어졌다. 모두 청부살인 사건으로 의심됐지만,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 앙헬레스에 코리안데스크가 생긴 이유기도 하다.

살인사건 벌어진 코리아타운에 도착한 이 경감, 청부 살인 사건임을 직감
한국인으로 추측되는 교사범을 잡는 데 집중

교사범들에 관한 구체적 첩보 입수했지만 임기를 마치고 귀국
국제범죄수사대 이 반장과 합동작전 시작

후임 코리안데스크 최 경감까지 ‘3인4각’ 수사 본격화
체포영장까지 준비해둔 ‘청부 살인 브로커’ 돌연 잠적해버려

외사경찰 동료는 이 경감이 앙헬레스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시 생각해보라’며 말렸다. 관록 있는 형사 출신을 기대했던 대사관에서는 30대 초반의 이 경감이 코리안데스크로 정해지자 경찰청에 전화를 걸어 따지기도 했다. 박씨 사건이 터졌을 때만 해도 대다수 교민들은 그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다부진 체격의 인상 좋은, 간부 후보생 출신의 젊은 엘리트 경찰로만 여겼다.

하지만 이 경감을 잘 아는 한 베테랑 형사는 “계급이 경감인데 필리핀 길거리에서 땡볕에 CCTV 따러(확인하러) 다니는 거 보면 다 알지”라고 했다. 끈질기고 집요한 그의 성격을 간파한 것이다. 그가 앙헬레스에서 머무는 2년 동안 발생한 살인사건만 5건, 대부분 총상으로 인한 사망사건이었다. 이 방면으로는 어지간한 강력계 형사보다 경험이 쌓였다. “쪽팔리지 말자.” 이 경감의 머릿속은 온통 ‘마스터마인드’(Master mind), 즉 살인교사범을 잡는 생각뿐이었다. 사건 정보를 끌어모아 추적하다보면 퍼즐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킬러 검거는 현지 경찰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돈을 받고 총을 쏜 현지인보다 한국인으로 추측할 수 있는 교사범을 잡는 것이 더 확실한 방책이었다.

박씨 사망 이후 호텔의 경영권 분쟁이 벌어졌다.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지어진 박씨 소유의 호텔은 투자자들을 모집해 수익금을 나눠 갖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한인사회에서 박씨는 ‘선뜻 도움을 주시는 고마운 분’이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 금전·채무 관계로 원한을 살 만한 이도 없지 않았다. 박씨의 사망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뜻이었다.

■ “나쁜 놈은 꼭 잡아야지”

한국인에게 살인 청부는 영화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필리핀에선 다르다. 비교적 총기를 쉽게 구할 수 있으며 직업을 얻기 힘든 빈민층 청년들이 청부살인을 업으로 삼기도 한다. 선거철 같은 첨예한 시기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원한 관계로 청부살인이 벌어지기도 한다. 2018년에는 하루 평균 34명이 총기 관련 사고로 숨졌다. 외국인의 경우 분쟁이 발생했을 때 공권력에 기대기 어렵다보니 자구책으로 청부살인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인 피살사건이 전해지며 필리핀 관광을 꺼리는 이들도 생겼지만, 아무런 연고 없는 관광객이 표적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청부살인을 갈등 해소 수단으로 삼는 건 늘 가깝게 알고 지내는 이들이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등장한 건, 1년이 훌쩍 지났을 때였다. 이 경감은 우연히 박씨 소유 호텔의 투자자 중 한 명인 김모씨에 대한 첩보를 접했다. 김씨가 친하게 지내던 동갑내기 교민 권모씨에게 사설 환전상을 거쳐 수천만원을 보냈고, 돈을 받은 권씨가 함께 지내던 필리핀인을 통해 킬러를 물색했다는 내용이었다. 첩보 내용은 꽤나 구체적이었다. 권씨가 운영하던 현지 한인식당에 김씨가 단골손님으로 오면서 가까워졌고, 호텔 투자 문제로 하던 하소연이 청부살인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2017년 2월 임기를 마치는 이 경감은 고민했다. 코리안데스크는 수사 담당자가 아니기 때문에 사건을 맡아 파헤칠 형사가 필요했다. 보안도 필수였다. 도움이 될 만한 교민 몇 명과 차기 코리안데스크에게만 그동안 수집한 첩보를 전달했다. 한국으로 복귀해 경찰청 인터폴계에 근무하면서 동료 직원들과 사건 내용을 공유했다. 해외 사건을 수사할 때는 인터폴계가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는다. 몸은 이미 필리핀을 떠났지만, 이 경감은 박씨 살인사건을 놓지 않았다. 수사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조직의 지원도 필수였다. 담당 계장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이 경감이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3대 이상훈 반장(현 양천경찰서 사이버팀장)에게 전화한 건 2017년 늦여름이었다. 경찰청 1층 로비 커피숍에서 세 사람이 만났다. 이상훈 반장은 파트너인 신용호 경사와 함께였다. 세 사람은 2014년 2월 앙헬레스에서 벌어진 60대 관광객 허모씨(당시 65세) 피살사건을 수사하면서 알게 됐다.

이 반장과 신 경사는 2016년 국제범죄수사대에 근무하면서 이 사건을 다시 꺼내들어 증거를 보강했다. 이 반장은 4000쪽이 넘는 기록을 매일같이 살펴보느라 눈의 실핏줄이 터지기도 했다. 이 반장과 신 경사는 뭐든 대충하는 법이 없었다. 사건에 애착이 강하고 수사에 거침이 없었다. 특히 이 반장은 “이런 놈 잡아야 하는데” “나쁜 놈 꼭 잡아야 하는데”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커버스토리]CCTV도 없는 ‘60초 청부살인’…1년 만에 찾아낸 용의자가 사라졌다

“앙헬레스에서 사건이 있었는데요.” 이 경감은 박씨 피살사건 관련, 자신이 수집한 모든 정보를 브리핑했다. 해외 수사의 목적은 범법자를 한국 사법체계에서 처벌받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모로 애로사항이 많다. 현지에서 수사권이 없기 때문에 증거 확보부터 쉽지 않다. 현지 기관의 도움이 필요할 때는 갖은 인맥을 끌어모아야 한다.

증거를 확보해도 바로 체포할 수 없다. 현지 이민국 단속반과 동행해야 하는데 이를 설득하고 일정을 맞추는 것도 일이다. 체포해도 문제다. 필리핀에서는 한국인 범법자를 체포하는 것보다 얼마나 빨리 ‘떠 올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체포 후 송환까지의 과정이 매우 복잡하기 때문이다. 여권 효력을 정지시키고 한국에서 체포영장을 미리 받아두었다 하더라도 용의자가 필리핀 내에서 사소한 고소·고발 사건 하나라도 걸려 있으면 현지 당국이 추방시키지 않는다. 이를 악용해 지인을 통해 사건을 만들어 송환을 피하는 악질도 있다. 이민국 수용소에 머물다 탈출하는 경우도 있다. 언제 사건을 종결할지 장담할 수 없다는 얘기다.

“아니 사람 죽인 놈인데 당연히 잡아야죠.” 이 반장은 사건 앞에서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국제범죄수사대 형사로 여러 사건을 해결하면서 자신감도 붙은 상태였다. 이 반장과 신 경사는 국제범죄수사대에 근무하며 모두 8차례 앙헬레스를 찾았다. 두 사람은 2018년 가을부터 수사에 들어갔다. 일단 한국에 머물고 있는 살인교사 용의자 김씨의 동선을 추적했다. 본게임은 앙헬레스 교민 권씨를 체포하는 일이었다. 이미 현지 경찰은 엉뚱한 사람을 범인이라며 체포한 전례가 있어 신뢰도가 떨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의 적극적인 개입 없이는 수사가 불가능했다.

■ 사라진 용의자

2017년부터 앙헬레스 코리안데스크를 맡고 있는 최고야 경감(39)은 진한 경상도 사투리로 “이름이 특이하죠”라며 웃어 보였다. 한국에선 정보경찰로 오래 일했기 때문에 강력사건을 접할 일이 많지 않았다. 코리안데스크가 주로 하는 일 중 하나가 수배자 송환이다. 한국에서 수배를 받고 필리핀으로 도피한 범인을 추적해 필리핀 이민국과 함께 검거한 뒤 한국으로 돌려보내는 일이다.

사격 훈련 때나 총을 만져본 최 경감은 체포 현장에 동행한 이민국 요원들이 M-16 같은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모습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앞서 최 경감은 인수인계를 위해 이지훈 경감과 2주간 함께 지내는 동안 박씨 피살사건에 대해 전해들었다. 이 경감은 “한국에서 실력 좋은 형사들과 같이 사건 만들어볼 테니 현지 적응 잘하고 계시라”고 당부했다.

세 사람이 다리를 묶고 달리는 것 같은 어려운 수사가 본격화됐다. 코리안데스크는 필리핀 경찰 등 현지 기관을 만나 설득하고 첩보를 모으는 역할을 했다. 현지 사정에 정통한 교민들의 인맥을 활용해 정보를 수집하는 일도 중요하다. 한국 수사관의 의지와 수사력도 절실했다. 현지에서 수집한 정보나 진술은 대개 정황 자료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하고 체포가 이뤄져도 법정에서 증거능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수사관이 명확한 진술을 확보해야 했다.

처음엔 사건이 순조롭게 풀릴 줄 알았다. 2018년부터 이상훈 반장과 신용호 경사는 이 경감과 함께 두 차례 출장을 통해 앙헬레스의 최 경감과 합세했다. 먼저 김씨와 권씨의 송금 내역부터 살폈다. 2500만원이 사설 환전소를 통해 오간 정황을 확인했는데, 이는 이 경감이 파악한 청부살해 대금과 일치했다. 피살된 박씨가 운영하던 호텔 관계자나 주변 한인들과 조심스럽게 접촉하며 진술을 모아갔다. 현지에서 어느 정도 증거를 확보하자 체포영장도 미리 받아뒀다. 용의자 권씨는 본인이 살인교사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머지않아 한국으로 입국할 때 공항에서 체포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권씨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중고차 판매를 대행해주겠다며 다른 한인들에게 선수금을 받은 뒤 차를 주지 않고 잠적한 것이다. 운영하던 식당은 다른 교민에게 매각한 상태. 전기요금도 납부하지 않은 채 종적을 감췄다. 몇 달이 지나도록 권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공들인 수사가 물거품이 될 위기였다. 다른 사건을 해결한 공을 인정받아 특진한 이 반장은 조급해졌다. 팀장급으로 영전하는 인사이동이 마냥 달갑지 않았다.

■ 워킹스트리트에 답이 있다

앙헬레스의 워킹스트리트는 직선거리로 350m 정도 되는 짧은 도로다. 대표적 유흥가로 성매매 유흥업소인 ‘바’(Bar)가 즐비하다. 해 질 무렵부터 밤새 영업하는 ‘밤바’가 성업 중이며, 해가 떠 있는 시간 동안 영업하는 ‘낮바’ 거리도 있다. 코리안타운에서 차로 10분이 안 걸린다. 가게 문을 열기 전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는 남성들도 눈에 띈다.

◆영화 같았던 송환 작전…4년 추적 끝에 그를 한국 법정에 세웠다

2014~2015년 필리핀 앙헬레스 코리안타운에서 발생한 청부살해 사건 장소. 첫 번째 사진은 2015년 9월 한인 사업가 박모씨가 숨진 사무실이 있던 건물로 지금은 철거됐다. 이어 2014년 2월 60대 한국인 허모씨가 총격을 당한 세차장 앞 도로, 같은 해 4월 교민 신모씨가 식사 중 살해된 한식당이 있던 거리.  구글 지도 캡처·전현진 기자 이미지 크게 보기

2014~2015년 필리핀 앙헬레스 코리안타운에서 발생한 청부살해 사건 장소. 첫 번째 사진은 2015년 9월 한인 사업가 박모씨가 숨진 사무실이 있던 건물로 지금은 철거됐다. 이어 2014년 2월 60대 한국인 허모씨가 총격을 당한 세차장 앞 도로, 같은 해 4월 교민 신모씨가 식사 중 살해된 한식당이 있던 거리. 구글 지도 캡처·전현진 기자

용의자 권씨가 이 동네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최고야 경감은 허탈했다. 그동안 권씨를 찾아 마닐라 인근을 찾아 헤맸던 것이다. 주요 정보 접근이 어렵다보니 수사 협조를 구하며 현지 경찰에게 선물 공세까지 했다. 밥도 사고, 자녀들이 방탄소년단(BTS)을 좋아한다고 하면 앨범도 구해다줬다. 필리핀 경찰은 따로 수사비를 받지 않기 때문에 외부에 나갈 일이 생기면 사비를 써야 된다. 남의 나라 범죄자를 찾아달라는 한국 경찰의 부탁에 선뜻 나서줄 리 만무했다. 아쉬운 입장인 코리안데스크가 사비를 털었다. 코리안데스크는 대사관 소속의 외교관 신분도 아니다보니 공식적인 협조 요청을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다.

권씨의 소재가 미궁에 빠지자 한국의 수사팀도 초조해졌다. 신용호 경사는 “한국에 있는 김씨를 먼저 잡자”고 제안했지만, 필리핀 킬러를 고용하는 등 사건의 키를 쥔 권씨의 신병이 확보되지 않는 한 살인교사 용의자 김씨가 입을 열 리 없었다.

그리고 1년이 흐른 지난해 12월, 권씨가 워킹스트리트 인근 빵집과 한식당 등지에서 목격됐다는 첩보가 최 경감에게 접수됐다. 탐문을 이어가던 최 경감의 눈에 낯익은 모습이 들어왔다. 권씨였다. 당장 검거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숨을 골랐다. 앙헬레스는 좁은 동네다. 전에 수배자 검거를 위해 워킹스트리트의 식당에 앉아 잠복을 하고 있는데 다른 한국 교민이 “거기서 뭐해요?” 하며 알은체를 해왔다. 그가 세워둔 차 번호판을 보고 연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인은 너무 눈에 띄었다. 잠복이나 비밀 검거 자체가 어려웠다. 최 경감은 코리안데스크 사무실이 있는 앙헬레스 CIDG(강력범죄수사대)에 지원 요청을 했다. CIDG 요원 두 명이 왔다. “저 사람 따라가서 어디 사는지 좀 알아봐주세요.”

1년 만에 모습 드러낸 용의자, ‘불법체류’ 명목으로 체포
통상 3개월 걸리는 송환 지체될까 ‘만반의 준비’

하루 만에 이례적 송환…국적기 오르자마자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입니다”
오래전 받아둔 살인교사 혐의 체포영장

앙헬레스 한인 피살사건, 코리안데스크·교민 자정 노력으로 줄고 있지만
여전히 곳곳에 미제사건 ‘해결 과제’로 남아

권씨는 워킹스트리트 입구, 외국인은 거의 없는 현지인 동네에 살고 있었다. 상의를 벗은 남성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거나, ‘트라이시클’이 쉼 없이 지나가는 골목의 작은 빌라였다. 1층에는 화장실과 거실, 부엌이 있고 2층에는 2개의 방이 있는 전형적인 필리핀 빌라. 이제 체포만 남았다.

필리핀에서 한국 경찰들은 직접 체포에 나설 수 없다. 한국 경찰이 특정 범죄 혐의로 사건 피의자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받고 여권을 무효화시키거나 인터폴의 적색수배를 발령하면, 이를 근거로 피의자 정보를 받은 필리핀 이민국에서 ‘불법체류’ 명목으로 추방한다. 해외 수배자 송환은 대개 이런 방식으로 이뤄진다. 최 경감은 “필리핀 이민국이 연말연시에는 외부 작전을 잘 안 하려 해서 스케줄을 잡기 어려웠다”고 했다. 체포 작전이 가능한 날을 미리 알려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염없이 대기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틈날 때마다 찾아가 권씨 집에 불이 켜 있는지 확인했다. 그의 부탁을 받은 CIDG 요원들이 세입자로 위장해 권씨가 살고 있는지 살피기도 했다.

■ 드디어, 디데이

“내일 체포하러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 1월22일 최고야 경감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나마도 날이 빨리 잡힌 것이라 했다. 설 연휴를 하루 앞두고 이상훈 반장은 그날 저녁 출발하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1월23일 새벽 클라크국제공항에 도착한 이 반장은 숙소에서 잠깐 눈을 붙인 뒤 오전 10시50분쯤 권씨의 집으로 향했다. 필리핀 이민국과 CIDG 요원, 여기에 이 반장과 신용호 경사, 최 경감 등 모두 10여명이었다.

이민국 요원이 문을 두드리자 권씨가 나왔다. 1층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고 했다. 보랏빛 원피스에 귀밑까지 오는 단발머리를 한 권씨는 수척해 보였다. 이민국 직원이 권씨를 체포했다. 불법체류 혐의로 고지했다. 살인교사 혐의로 한국 경찰이 수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민국 요원이 알릴 이유가 없었다. 필리핀 관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사팀의 ‘묘수’였다. 권씨는 다음날 저녁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권씨가 체포 하루 만에 송환된 건 한 수 앞을 내다본 작전 덕분이었다. 필리핀에서 도피 사범을 송환하는 데 통상 3개월이 걸린다. 이 때문에 권씨를 체포하고도 최 경감은 마음을 놓지 않았다. 필리핀에서 권씨를 추적한 지 1년, 앞서 한국의 동료들과 공조한 기간까지 합하면 3년이 넘었다. 그를 빨리 한국 법정에 세우고 싶었다. 국제범죄 수사에서는 피의자의 체포보다 국내 송환 조사가 더 중요하다. 2016년 앙헬레스에서 3명의 한국인을 총으로 살해한 박모씨는 공범이 한국에서 붙잡혀 처벌받았지만, 그는 아직도 한국에서 처벌을 받지 못했다. 필리핀 이민국 수용소에서 탈출을 거듭해 지금은 행방이 묘연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찰청 인터폴계와 마닐라의 코리안데스크 장성수 경감, 주필리핀 한국대사관의 경찰 영사 등은 권씨 송환 작전을 미리 설계했다. 체포 사흘 전인 1월20일, 필리핀 법무부 이민국 추방과 전담팀에 빠른 추방 조치를 요청해놨다. 체포 작전 일정이 23일 오전으로 확정되자 이민국 추방 담당 국장과의 면담도 23일 오후로 잡아뒀다. 체포 3~4시간 뒤 예정된 책임자 면담이 이뤄졌다. 장 경감은 “한국에서 호송단이 이미 와 있고, 가능하면 내일 바로 송환하면 좋겠다고 요청하니 담당자가 ‘쿨’ 하게 받아들였다”고 했다.

다른 장애물이 없는지도 미리 확인했다. 필리핀 NBI(국가수사국) 확인 결과, 사기 관련 혐의로 권씨에게 고소건이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필리핀에서 작은 사건이라도 걸려 있으면 현지에서 재판을 마친 뒤 송환할 수 있다. 온라인으로 재판 정보 확인이 불가능하자 대사관 관계자가 직접 앙헬레스의 법원으로 찾아갔다. 다행히 권씨에 대한 고소사건은 기각된 상태였다. 권씨가 수를 쓰기 전에 이민국에 ‘전화사용금지’ 규정을 지킬 수 있도록 요청해뒀다.

송환을 위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마지막으로 수배자 본인이 귀국을 거부할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그 경우 강제집행 등으로 추방 절차가 복잡해진다. 다행히 열악한 현지 수용소에서 하루를 보낸 권씨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24일 오후 1시30분 권씨의 분실 여권을 대신한 여행증명서가 발급됐다.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입니다.” 공항에서 이 반장과 신 경사가 필리핀 이민국으로부터 권씨를 인계받았다. 권씨는 오후 11시 한국행 대항항공편에 올랐다. 체포 당시 입었던 원피스와 샌들 차림이었다. 이 반장은 오래전 받아둔 체포영장을 내밀었다. 살인교사 혐의. 미란다 원칙과 함께 고지했다. “하루 이틀 수사한 게 아니에요. 송금한 내역까지 다 알아보고 왔습니다.” 국적기인 대한항공은 우리나라 영토에 해당된다. 돌이키기엔 이미 늦었다. 권씨는 그제야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 반장과 신 경사는 설 연휴를 서울 영등포구 국제범죄수사3대 사무실에서 권씨를 조사하며 보냈다. 이 반장은 인사이동 하루 전까지 조사를 마무리해야 했다. 권씨의 진술은 이 경감이 수집한 첩보와 장기간에 걸친 수사 결과와 일치했다. 살인교사 피의자 김씨도 마포구에서 체포됐다. 다른 사업(?)의 투자자를 유치하던 중이었다고 했다. 김씨는 자신이 박씨 살해를 청부하지 않았다고 부인했고, 권씨에게 돈을 보낸 것도 다른 이유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결국 구속됐고 오는 17일 첫 공판준비기일을 앞두고 있다.

앙헬레스 코리안데스크인 최고야 경감(오른쪽)이 지난달 26일 CIDG(강력범죄수사대) 수사 보조 요원과 대화하고 있다.  전현진 기자

앙헬레스 코리안데스크인 최고야 경감(오른쪽)이 지난달 26일 CIDG(강력범죄수사대) 수사 보조 요원과 대화하고 있다. 전현진 기자

■ 남겨진 사건들

2014년 4월6일 사업가 신모씨(당시 44세)는 아내와 앙헬레스 코리안타운의 한 정육식당 야외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두 명의 필리핀 청년이 탄 오토바이가 식당 앞에 멈췄고 이어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몰려든 식당 손님들 너머로 오토바이는 유유히 사라졌다.

신씨 살해사건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담당 수사관이 인사이동 등으로 교체되는 등 집중적으로 다뤄지지 않은 탓이다. 필리핀의 코리안데스크가 사건을 살피고 있지만, 한국에서 수사를 담당하는 수사관이 의지를 가지고 풀어나가지 않으면 해외에서 발생한 범죄의 특성상 해결이 쉽지 않다. 신씨의 한 지인은 2018년 3월 한국의 사건 담당 경찰관이 도움을 요청하며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여주면서 경향신문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뜬금없이 연락 와서 사람 마음 뒤집어놓고, 이렇다 저렇다 연락도 안 합디다. 이건 아니잖아요.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요. 내 마음 접은 지 오래니 그만 (마음) 후비시죠. 다음달이면 내 친구 제삿날이오.”

앙헬레스의 한인 피살사건은 코리안데스크와 교민들의 자정 노력으로 줄어들고 있다. 지난해 앙헬레스에서는 2건의 한인 관련 살인사건이 벌어졌지만, 총기 관련 청부살인이 아닌 우발적인 범행이었다. 미제사건 해결은 남은 과제다. 필리핀은 물론 세계 곳곳에 신씨 살해사건과 같은 미제사건이 남아 있다. 하지만 한국에 있는 담당 수사관이 일상적인 업무에 치이면서 해외에서 벌어진 사건·사고까지 파헤칠 여력이 없는 게 현실이다. 지방경찰청 단위의 미제사건 전담팀이 ‘화성연쇄살인사건’ 같은 장기 미제사건을 해결하고 있는 것처럼, 해외에서 해결되지 않은 국제범죄사건을 맡을 별도의 전담팀이 필요해 보인다.

필리핀 앙헬레스에서만 20년 넘게 살면서 중고렌터카 사업 등을 하는 영사협력원 신경서 사장은 박씨 피살사건 해결의 숨은 주역이다. 영사협력원은 대사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의 영사 업무를 위해 현지 교민들의 추천을 받아 임명한다. 앙헬레스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건·사고 처리를 도맡았던 그가 없었다면 이번 사건을 해결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경찰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이지훈 경감이 앙헬레스에서 처음 접한 총기 피살 변사체를 조사할 때도, 박씨 피살사건 수사 과정과 권씨 체포 현장에도 그가 있었다. 신 사장은 “앙헬레스와 인근에 미제 살인사건이 1~2건 정도 있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난 상태”라며 “한국의 담당 수사관이 의지를 가지고 달려든다면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필리핀에서 고생하는 코리안데스크와 한국의 수사관들이 집중해 사건을 수사할 수 있는 환경이 얼마나 만들어지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2018년의 어느 날, 필리핀 앙헬레스 코리안타운의 ‘클라크애비뉴’ 세차장 앞 도로변. 이상훈 반장이 인근 한인마트에서 산 소주 한 병을 열어 바닥에 뿌렸다. 2014년 2월 앙헬레스에 온 허모씨가 총에 맞아 숨진 현장이다. 이 반장은 2016년 국제범죄수사대에서 부임한 뒤, 캐비닛에 잠자고 있던 허씨 피살사건 파일을 다시 열었다. 수사를 거듭해 허씨에게 5억여원을 빌렸던 신모씨를 살해 혐의로 구속했다. 신씨는 필리핀인 킬러를 고용해 허씨를 살해한 혐의(살인교사)로 구속됐고, 지난해 대법원에서 징역 24년의 확정 판결을 받았다.

이 반장은 소주를 따르며 먼 타국에서 죽어간 허씨에 대해 생각했다. 전·현직 앙헬레스 코리안데스크 이지훈·최고야 경감도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 반장은 “선배들에게 배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살인사건을 해결했을 때 느껴지는 자부심과 황홀함, 그렇지만 죽어간 이들을 되살릴 순 없다. 하지만 넋이나마 조금은 위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아련한 마음들이 뒤섞였을 것이다. 살인사건은 경찰에겐 그래서 더 특별하고 중요하다. 이 반장은 말했다. “사람 죽인 놈 잡는 데 이유가 있습니까. 나쁜 놈은 끝까지 잡아야죠.”

*수사 및 재판 관련 기밀 노출에 대한 우려로 등장인물과 협의하여 구체적인 수사 및 검거 과정 일부는 공개하지 않습니다.

<앙헬레스 |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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