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사라지지만…‘임신중단 권리 논의’도 멈췄다

2020.12.22 20:52 입력 2020.12.23 19:10 수정

헌법재판소가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 조항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며 제시한 대체입법 시한이 열흘도 남지 않았다. 국회에서는 낙태죄 관련 논의가 멈춰 있어 올해 대체입법 마련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대체입법이 마련되지 않은 채 입법 시한이 지나면 낙태죄는 내년 1월1일부로 효력이 사라진다.
다만 전문가들은 무리한 법 개정보다 여성이 임신중단을 안전하게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지난해 4월 헌법재판소는 임신중단을 한 여성을 처벌하는 형법 제269조 1항과 임신중단 수술을 한 의사를 처벌하는 형법 제270조 1항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1953년 형법을 제정하면서 임신중단을 범죄로 규정한 지 66년 만이었다. 당시 헌법재판소는 올해 12월31일까지 국회가 관련 법률을 개정하도록 했다.
그 후 1년8개월이 지났다. 낙태죄 관련 형법 개정은 이뤄지지 않았다. 22일 복수의 국회 관계자들은 “낙태죄 개정안 관련 일정은 지난 8일 법제사법위원회 공청회 이후 없다”며 “올해 낙태죄 관련 형법 및 모자보건법 개정안이 통과되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국회에는 현재 6가지 낙태죄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정부는 임신 14주까지는 본인 의사만으로도 임신중단을 허용하고, 15~24주에는 사회·경제적 사유 등에 따라 허용하는 개정안을 내놨다.
권인숙·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은주 정의당 의원은 각각 낙태죄를 전면 폐지하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서정숙 국민의힘 의원은 임신 10주까지만 임신중단을 허용하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같은 당 조해진 의원은 임신 6주까지 임신중단을 허용하고 임신 20주까지는 제한된 사유에 따라서만 허용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발의된 개정안 수에 비해 개정안을 둘러싼 논의는 뒤늦게 시작했다. 정부가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내놓은 것은 대체입법 시한이 3개월도 남지 않은 지난 10월7일이었다. 국회 법사위에서 열린 낙태죄 관련 공청회는 입법 시한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지난 8일에야 열렸다.
그마저도 같은 날 여당 의원들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공수처법) 개정안을 법사위에서 처리하면서 이에 반발한 야당 의원들이 모두 퇴장한 채 진행된 반쪽짜리 공청회였다.
그동안 낙태죄 전면 폐지를 주장해온 여성단체들은 제대로 논의가 이뤄지지 않은 채 낙태죄를 존속시키는 정부안 등이 통과되는 것보다는 내년에 다시 논의하는 게 낫다는 분위기다.
문설희 ‘모두를 위한 낙태죄폐지공동행동’(모낙폐) 공동집행위원장은 “(낙태죄 대체입법에 대해) 정부와 국회가 지금까지 책임을 방기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며 “하지만 제대로 된 논의 없이 국회에서 낙태죄를 존속시키는 정부안이 통과되는 것은 오히려 후퇴”라고 말했다. 문 위원장은 “그런 법 개정을 할 바에는 아무런 개정을 하지 않고 내년에 처음부터 다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문제는 형법 개정안 논의가 지지부진하면서 안전하게 임신중단을 할 권리에 대한 논의도 멈췄다는 것이다. 예컨대 정부와 권인숙 의원 등이 형법 개정안과 함께 발의한 모자보건법 개정안에는 수술 외에도 미프진 등 약물을 통한 임신중단을 허용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러나 형법 개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서 발이 묶였다.
이외에도 권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에는 ‘정부와 지자체가 여성의 경제적 능력을 고려해 임신중단에 필요한 의료비를 지원할 수 있게 한다’는 조항이 있다. 이은주 의원이 형법 개정안과 함께 발의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에는 ‘사용자는 임신중단을 한 여성에게도 유산·사산에 준하는 휴가를 주도록 한다’는 내용이 있다. 대체입법이 마련되지 않으면서 이 모든 논의도 좀체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모낙폐는 내년 1월1일부터 안전한 임신중단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입법 외에도 현장에 필요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신중단이 합법화된 만큼 임신중단에 대한 건강보험, 안전한 임신중단을 위한 의료 가이드라인, 임신중단 약물에 대한 정보 등을 체계적으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낙폐는 ‘낙태죄 없는 2021년 D-10’인 이날 낙태죄 폐지 이후의 10가지 과제를 매일 하나씩 알리는 온라인 캠페인을 시작했다. 캠페인 첫날인 이날에는 유산유도제의 공적 도입과 국가필수의약품 지정을 요구하는 게시물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렸다.
모낙폐는 “낙태죄 없는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우리는 문재인 정부에 요구한다”며 “더 이상 책임을 방기하지 말고 안전한 임신중지와 재생산 권리 보장을 위한 2021년을 준비하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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