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판결과 착종된 근대

2021.01.25 15:00 입력 2021.01.25 21:39 수정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1989년 즉위한 아키히토 일왕을 상대로 민사소송이 제기됐다. 앞서 1988년 선대 히로히토의 건강이 나빠지자 쾌유를 기원하며 여러 지방자치단체가 예산을 썼다. 이를 두고 히로히토가 부당하게 이득을 얻었다며 상속인 아키히토에게 배상을 요구한 사람이 있었다. 학계 다수설은 민사소송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도쿄대학 교수 기쿠이 쓰나히로는 “천황을 비롯해 어느 일본인도 사법권의 예외가 아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최고재판소는 “천황은 일본국 상징이자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인 점에서 민사재판권이 미치지 않는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일왕은 민사소송 대상이 아니게 됐다.

[이범준의 저스티스] 위안부 판결과 착종된 근대

일왕은 일본의 근대를 설명하는 존재다. 유럽의 근대는 헌법이라는 문서로 완성됐다. 영국의 명예혁명과 프랑스의 대혁명 결과인 권리장전(Bill of Rights), 여기에 국민의 지배를 규정한 통치구조 조항을 더해 지금 쓰이는 헌법이 완성됐다. 일본은 유럽의 근대를 모방하려 헌법부터 작성했다. 일본을 대표해 유럽을 돌며 헌법을 연구한 이가 이토 히로부미이며, 그가 초대 총리가 되어 작성한 것이 1889년 공포된 메이지 헌법이다. 일왕이 일본 신민에게 하사한 이 흠정헌법은 1945년 패전과 함께 현재 헌법으로 바뀐다. 일왕 주권인 메이지 헌법을 국민 주권인 일본국 헌법으로 전승국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가 바꿨다.

일왕 주권인 메이지 헌법과 국민 주권인 일본국 헌법은 근본이 달라 개정(改定)으로 교체될 수 없다. 그렇지만 국회 개정 절차를 거쳐 1947년 공포됐다. 이 결함을 돌파하려 등장한 이론이 ‘8월 혁명설’이다. 도쿄대학 헌법학 교수 미야자와 도시요시의 학설로, 1945년 8월 포츠담 선언 수락으로 일본에 혁명이 일어난 셈이고 주권 소재가 일왕에서 국민으로 이전됐다고 했다. 같은 대학 정치학 교수 마루야마 마사오의 아이디어를 법학이론으로 정리했다. 이처럼 명확하지 않은 전근대와 근대의 경계는 일왕을 민사재판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와 다르게 조선의 근대는 1894년 갑오농민전쟁에서 출발했다. 동학은 전근대 신분제로 고통받던 농민과 노비를 해방하는 사상이었다. “아무리 빈천한 사람이라도 정성만 있으면 도를 닦을 수 있다”며 평등과 인권을 주장했다. 여성 권리를 위해서도 싸웠다. 제1대 교주 최제우는 여성도 동학에 들어오면 군자가 된다고 했다. 남성과 여성은 성인과 군자가 되는데 차이가 없는 평등한 존재라고 했다. 갑오년에 관군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농민군은 폐정개혁안에서 ‘노비문서를 불태워 버릴 것’과 ‘청춘과부는 재가를 허락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갑오개혁에 영향을 미쳐 신분제가 법으로 폐지되고 사실상 금지되던 재혼이 가능해졌다.

근대국가 대한민국은 1919년 3·1운동에서 시작된다. 같은해 4월11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헌법으로 인권을 바탕에 둔 민주공화제를 표방했다. 신체와 생명의 자유, 재산권 보장,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이 헌장에 들어있다.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피압박민족의 주권국가 실현을 향한 천명이자 인권 운동을 토대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이정표였다”고 역사학자 김태웅 서울대 교수는 말한다. 이런 이유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비민주 정권들이 등장했지만 헌법 전문에서 3·1운동 정신이 빠진 적이 없다. 이렇듯 한국의 근대는 인권 확장 역사이고, 이를 문서화한 것이 한국 헌법이다.

이러한 헌법을 수호하지 못한 권력자를 제거하는 역사를 한국은 실천해 왔다. 4·19혁명, 6월항쟁, 촛불혁명이다. 2017년 박근혜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서 파면된 이유도 헌법을 지키려는 의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피청구인은 자신의 헌법과 법률 위배행위에 대하여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대신 국민을 상대로 진실성 없는 사과를 하고 국민에게 한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이 사건 소추사유와 관련하여 피청구인의 이러한 언행을 보면 피청구인의 헌법수호 의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일본을 통합하는 상징이 일왕이라면, 한국을 움직여온 뼈대는 인권이다.

지난 100년을 거쳐 한국과 일본은 서로 다른 헌법 감각, 즉 정치 의식을 지니게 됐다. 이런 두 나라의 헌법 역사가 달라붙은 지점이 위안부 범죄이다. 두 나라는 인권과 국권의 균형점이 다르다. 한국에게는 상대가 자신이라 해도 청산해야 하는 뼈아픈 과거이지만, 일본에게는 여전히 남아있는 전근대 의식을 들추는 괴로운 일이다. 두 나라의 착종(錯綜)된 사이비 근대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견뎌야 하는 일이다. 일본은 한국이 양국 합의와 국제법을 위반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완전히 틀린 얘기만도 아니다. 하지만 역사의 거대한 흐름 앞에서 국제법은 더러 왜소한 존재가 된다. 1910년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될 때도 국제법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런 것이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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