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법연구회의 긴 그림자

2021.05.18 11:50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김명수 대법원장은 오는 8월 이기택 대법관 후임 대법관을 제청한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하는 마지막 대법관 제청이다. 대법원장은 임기 동안 대법관 12명을 제청하며, 김 대법원장도 이후로 3명을 더 제청하게 된다. 다만 제청 상대가 자신을 대법원장에 임명하지 않은 새로운 대통령으로 바뀐다. 대통령 임기가 5년이고 대법원장 임기가 6년이어서 생기는 일이다. 이런 경우 대법원장과 대통령 사이에 긴장이 생기는데, 대부분 대법관 임명권자인 청와대 뜻대로 된다. 이번이 김 대법원장이 자기 의지대로 대법관을 제청할 마지막 기회이다. 법조계가 주목하는 것은 정계선 판사를 제청할지다. 그는 우리법연구회와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장을 모두 거친 사람이다. 이런 이력을 가진 사람은 대한민국을 통틀어 김 대법원장 자신과 정 판사뿐이다.

[이범준의 저스티스] 우리법연구회의 긴 그림자

지난주 취임한 천대엽 후보자 제청은 다소 의외였다. 이번 인사는 검사 출신 박상옥 대법관 후임이라 검사 출신이 되는 게 자연스러웠다. 검찰의 수사 기능 축소와 재판 기능 확대라는 시대 흐름에도 맞았다. 공소 유지가 검찰의 역할이라면서 이미 있는 대법관 자리를 없앨 수는 없다. 후보자 가운데 실력이나 인품에 손색이 없다고 평가받는 전직 검사도 있었다. 하지만 김명수 대법원장의 선택은 그렇지 않았다. 검사 출신 대법관은 차기 대통령에게 제청하자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그 대신 제청하려 마음먹은 대상이 정계선 판사였다고 많은 판사들이 생각한다. 실제로 정 판사는 이번에 처음으로 대법관 후보 검증에 동의했다. 그런데 그가 검증 동의서에 사인한 직후 임성근 판사 녹음파일 사건이 터졌다. 그다음은 모두가 아는 대로이고, 그러면서 천 후보자가 제청됐다.

대법관 제청권은 헌법 제104조에 정해진 대법원장 권한이다. 이 제청권을 대법원장 개인의 것이 아니라, 대법원 나아가 법관 모두의 권한으로 해석하는 판사들이 있다. 2000년대 초반 대법관 제청에 반발하며 연판장을 돌린 이용구 판사나 여기에 합세한 우리법연구회 회원들이 대표적이다. 그러니 지금 판사들이 대법관 제청을 평가하는 것도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이번 여름 대법관 제청에 촉각을 기울이는 데는, 이런 연원에 더해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권한과 의무를 다른 기준으로 행사하고 있다는 의심이 법원 안에 퍼져 있다. 김 대법원장이 권한은 남용하고 의무는 해태(懈怠)하는데, 배후에 우리법연구회가 있다는 것이다. 이곳 출신이 일으킨 불상사는 모른체 눈감고, 이곳 출신의 성과는 부풀려 보상한다고 많은 이가 말한다.

가령, 1293억5175만원 규모 대법원 전자법정 입찰비리가 김명수 대법원장 임기 둘째 해인 2018년 언론 보도로 드러났다. 법원행정처가 전자법정 장비 업자와 짜고 17만원짜리 영상·음향 장비를 225만원에 사들이는 일들을 저지르며 거액의 뇌물을 받은 비리다. 보도를 계기로 검찰이 수사에 들어가 법원 공무원 등 14명에게 징역 8년 등 유죄가 확정됐다. 잇따른 의혹 보도에 대법원이 세 차례 허위 해명을 했는데, 이런 내용이 판결에도 나온다. 재판이 끝나고 법원행정처 내부에서 전자법정 입찰비리에 관련된 판사들을 징계하자는 건의가 있었다. 하지만 김 대법원장은 묵묵부답이었다. 국회도 대법원장에게 징계를 요구했는데 급한 불인 예산이 통과되자 태도를 바꿔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이 판사들은 퇴직해 변호사로 개업하거나 법원에 돌아가 재판을 하고 있다. 실은 입찰비리와 허위해명에 관여한 판사들이 모두 우리법연구회 출신이다.

이러한 김명수 대법원장의 태도는 법원과 업계에 잘못된 시그널을 줬다. 입찰비리를 저지른 전산정보 업체 출신들이 만든 회사가 다시 대법원과 거래하고 있는 사실이 최근 드러났다. 새 회사는 대법원이 2019년 이후 발주한 전자법정 사업 9건 중 7건을 수행하고 있다. 김 대법원장은 판사들을 징계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자신이 없다면, 적어도 국민에게는 잘못을 고하고 사과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고, 그 결과 김 대법원장 자신은 물론 사법부까지 딱한 처지가 됐다. 김 대법원장이 전자법정 입찰비리를 사과하지 않고 넘어간 게 임기 3분의 1을 지나던 시점이다. 지금 임기 3분이 2 시점에서 돌아보니 그 일을 계기로 김 대법원장은 법원 내부에서부터 신망을 잃었다고 판사들은 말한다. 오는 8월 대법관으로 정계선 판사를 제청해도 안 해도 김 대법원장은 어느 쪽에선가 비난을 받을 것이다. 우리 법원에 우리법연구회의 그림자가 너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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