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심판하려는 판사들

2021.06.14 12:00 입력 2021.06.15 06:08 수정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서울중앙지법이 강제징용 피해자가 일본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소를 각하했다. 앞서 대법원 전원합의체 다수의견이 아니라 소수의견을 따랐다고 재판부는 밝혔다. 하급심이 대법원 판결을 따라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날 종교적 병역거부에 무죄를 선고한 판결들도, 유신시절 긴급조치 피해자에 국가가 배상케 한 판결들도 대법원 판례를 무시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급심이 대법원을 따르지 않으려면 이유가 필요하다. 병역거부 무죄 판결은 시대가 바뀌었다고 생각했을 테고, 긴급조치 배상 판결은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고 했다. 나는 강제징용 사건 대법원 판결 소수의견에 의미가 있다고 보지만, 이번 서울중앙지법 판결은 왜 나온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 판결은 대법원 판결 이후 시대변화를 논증하지도 못했고, 대법원 판결에 없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이범준의 저스티스] 사회를 심판하려는 판사들

강제징용 사건 대법원 소수의견은 다수의견이 헌법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국가는 외국과의 조약을 무시할 수 없고, 국민에 대한 기본권 보장 책임은 정부에 있다고 했다. “헌법에 의하여 체결·공포된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는 헌법 제6조 제1항,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는 헌법 제10조다. 소수의견을 향한 여론의 무자비한 비난이 예상됐지만, 두 대법관은 오로지 헌법과 법률에 따라 사건을 판단하고 의견을 밝혔다. 이것이 법관의 한계이자 올바른 태도이다. 서울중앙지법 판결은 그렇지 못했다.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패소할 경우 대한민국의 문명국으로서의 위신은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라는 말들을 적어놨다. 지금까지 ICJ에서 패소한 미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등이 비문명국이란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우리나라 처지가 이 나라들과 달라 ICJ 패소로 야만국이 된다 해도, 그것은 ICJ 회부를 결정할 대통령과 그를 선출한 국민이 감당할 시련이다. 판사에게는 이를 걱정할 권한이 없다. 선출되지 않았고 그래서 정치적 책임도 없는 법관에게 공동체 운명을 시비할 권한을 헌법은 주지 않았다. 법관의 한계를 생각지 않은 과잉언설이고 사건을 계기로 정치에 발을 내딛는 것이다. 그런데 이 판결을 두고 광주고등법원장이 법원 내부통신망에 글을 올렸다. 서울중앙지법 판결의 주요한 내용을 반박했다. 원고 변호사의 항소이유서를 읽는 듯했다. 이에 대해 법관윤리강령 제4조는 “구체적 사건에 관하여 공개적으로 논평하거나 의견을 표명하지 아니한다”고 정하고 있다. 판사를 평정하는 법원장 발언은 판사들에게 압력이 될 수 있다. 결국 과잉언설은 김양호 판사나, 황병하 원장이나 매한가지다. 이게 요즘 법원이다.

국민이 위임한 한계를 무시하고 정치인과 종교인을 자처한다. 형사 법관은 소송법에 따라 피고인이 형법을 어겼는지 판단해 감옥에 가두거나 벌금을 물리면 된다. 법정을 교회로 만들어 피고인을 윤리적으로 비난할 권한이 없다. 그런데도 요즘은 여론에 편승해 자신을 법률 전문가가 아닌 윤리 심판자로 끌어올린다. 최근 기사를 보면 “재판부는 유무죄 판단은 기본이고 정(경심) 교수의 비도덕적 행태를 적나라하게 지적하며 여러 차례 꾸짖었다”고 한다. “공정한 경쟁을 위해 성실히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허탈감과 실망감을 야기했다”거나 “우리 사회가 입시 관련 시스템에 대해 갖고 있었던 믿음과 기대를 저버리게 (만들었다)”고 했다. 허탈감과 실망감까지 범죄사실에 포함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적나라하게 지적하며 꾸짖을’ 권한이 임정엽 판사에게 있지 않다.

강제징용 판결에서 소수의견을 쓴 권순일 석좌교수가 지난 주말 ‘연세법학 100주년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다. “오늘날 정치와 정책의 사법화가 화두이다. (정치문제가) 권리문제 형태로 제기되는 이상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하지만 법원은 헌법과 법률의 의미를 해석하는 곳이다. 한 걸음도 더 나아가서는 안 된다. 여기에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걸려있다. 그리고 현재 계속 중인 사건에 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은 법원을 떠난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전직 헌법재판관 목영준 변호사도 말했다. “법관들이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한이 무엇인지 오해하고 있다. 법률 해석에 관한 권한을 위임받은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피고인을 윤리적으로 꾸짖는 것은 권한에 있는 일이 아니다. 증거에 따라 판단하고 적절한 양형을 하면 그만이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법관이 우위에 있지 않고 헌법이 그런 권한을 주지도 않았다. 법관들이 사회를 이끌어 가야 한다고 오해하고 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에는 숨죽여 눈치만 보던 판사들이, 이제는 대법원 판결도 간단히 무시하면서 국민을 비난하고 가르치려 든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