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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라이프

서울 말고 로컬①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없어도 괜찮다. 주말 반나절, 20평 크기의 논을 일구는 농부가 된다. 모판을 만들어(4월 중순) 모내기를 하고(5월 말) 김을 맨다(6월 말). 수확하고 벼를 털어(10월 초) 직접 키운 쌀을 얻는다. 1년에 네 번의 농사 일정만 빠지지 않으면 된다. 농사법은 ‘진짜’ 농부들이 알려준다.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모를 내며 낫으로 벼를 벤다. 농약과 제초제는 사용하지 않는다. 피와 잡초는 우렁이가 먹게 하거나 직접 손으로 뽑는다. 20평이면 쌀 20kg 정도가 나온다. 논에 물이 잘 채워졌을지, 우렁이를 어떻게 관리할지, 태풍에 벼가 쓰러지진 않았을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평소에는 ‘프로’ 농부들이 관리해주기 때문이다. 경남 밀양 다랑협동조합의 ‘20평의 기적’ 참가비는 1년에 30만원. 휴경으로 사라지는 다랑논을 지키기 위해 작년부터 시작된, 논을 공유하는 프로젝트다.

곽빛나 다랑협동조합 대표가 경남 밀양 감물리의 한 다랑논에서 도시 사람들에게 모내기 하는 법을 알려주고 있다.

곽빛나 다랑협동조합 대표가 경남 밀양 감물리의 한 다랑논에서 도시 사람들에게 모내기 하는 법을 알려주고 있다.

지난 5월30일 오후. 밀양 감물리에서는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부산, 대구, 진주 등에서 찾아온 일곱 팀이 논 한 배미를 20평씩 나눠 농사를 짓고 있었다. 못줄을 이용한 ‘줄모’가 아니라 대나무자를 이용한 ‘자모’ 모내기를 했다. 대나무 장대에 그어놓은 눈금 간격(25㎝)에 맞춰 모를 심는 방식이다.

이수영씨(41) 일곱 살 아들은 논에서 뛰어놀다가 드러누웠고, 문정수씨(35)의 세 살 딸은 논을 가로질러 모 뭉치를 아빠에게 배달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윤진화씨(37)의 초등학생 아들은 논둑에 있던 모판에서 모를 덩어리째 뚝뚝 떼어 모내기 중인 부모 옆으로 던져줬다. 내친 김에 직접 모를 심어보더니 “이게 게임보다 재미있긴 하다”고 말 해 어른들을 웃겼다. ‘진짜’ 농부들은 논둑을 돌고 ‘주말 농부’들에게 모내기법을 알려주며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했다.

모내기 중인 부모에게 아이들이 모를 뭉텅이째 전달하고 있다. 논 한가운데서 취재 중이던 이재덕 기자가 한 아이로부터 모를 건네받고 있다.

모내기 중인 부모에게 아이들이 모를 뭉텅이째 전달하고 있다. 논 한가운데서 취재 중이던 이재덕 기자가 한 아이로부터 모를 건네받고 있다.

도시에서 온 팀들이 다랑논 한 배미를 20평씩 나눠 모내기를 하고 있다. 못줄을 이용한 ‘줄모’가 아니라 대나무자를 이용한 ‘자모’ 모내기를 했다.

도시에서 온 팀들이 다랑논 한 배미를 20평씩 나눠 모내기를 하고 있다. 못줄을 이용한 ‘줄모’가 아니라 대나무자를 이용한 ‘자모’ 모내기를 했다.

오후 2시에 시작한 모내기가 6시쯤 끝났다. 전날에도 오전과 오후에 각각 예닐곱팀이 ‘4시간 모내기’를 하고 돌아갔다. 마무리는 남편에게 맡기고 논길 옆 개울에서 아이들을 씻기던 이수영씨가 말했다. “저희는 작년에도 프로그램에 참여했어요. 애들은 우리가 농사지은 쌀이라고 하면 한 톨도 안 남기고 다 먹어요. 아이들이 벼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지켜보게 되니까 교육적 의미도 큰 것 같아요. 옷이야 빨면 되고, 다치면 밴드를 붙여주면 되죠. 저희 부부도 도시에 살면서 이렇게 몸을 쓰면서 일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해보니) 일 자체가 주는 즐거움이 있더라고요.”

도시에서 온 팀들이 밀양 감물리 다랑논에 나무 팻말을 세워놓았다.

도시에서 온 팀들이 밀양 감물리 다랑논에 나무 팻말을 세워놓았다.

아이들이 논에서 놀고 있다. 다랑협동조합 조합원 농부가 한 아이에게 모를 건넸다.

아이들이 논에서 놀고 있다. 다랑협동조합 조합원 농부가 한 아이에게 모를 건넸다.

■다랑이 부치는 청년들

밀양 감물리에는 오랜 세월 산비탈을 개간해 계단식으로 조성된 좁고 긴 다랑논이 14만 평쯤 있다. 하지만 주민들이 나이가 들어 농사를 포기하면서 다랑이도 사라지고 있다. 몇년씩 묵힌 논은 금세 버드나무 숲으로 변했고, 논둑은 무너져 내렸다. 산마루 논배미에는 전원주택단지가 지어지고 있다. 논과 논을 타고 내려오던 물길도 막혀 이제는 대부분 논에서 지하수를 끌어다 쓰거나 저수지에서 퍼 올려 물을 댄다.

다랑협동조합 대표 곽빛나씨(32)는 “농업유산이자 다양한 생물종이 살고 있는 다랑논을 보전하기 위해 조합원 농부들과 감물리 논 1만평에서 자연재배 벼농사를 짓는다”고 말했다. 천주교 사제인 조합원 유영일씨(66)가 “젊은 사람들이 농사를 이어가야 한다”며 신부 월급을 모아 구입한 감물리 다랑논 2500평을 선뜻 내놓았고, 나머지 7500평은 주민들에게 빌렸다. ‘20평의 기적’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다랑이는 1000평 정도다. 조합원 김진한씨(41)는 “마을 어르신들께 휴경 중인 다랑이를 경작하겠다고 하니 임차비도 받지 않으시고 쓰라고 내어주셨다”고 했다.

밀양 감물리에는 오랜 세월 산비탈을 개간해 계단식으로 조성된 좁고 긴 다랑논이 14만 평쯤 있다. 하지만 주민들이 나이가 들어 농사를 포기하면서 다랑이도 사라지고 있다.

밀양 감물리에는 오랜 세월 산비탈을 개간해 계단식으로 조성된 좁고 긴 다랑논이 14만 평쯤 있다. 하지만 주민들이 나이가 들어 농사를 포기하면서 다랑이도 사라지고 있다.

다랑협동조합의 조합원은 모두 8명. 유영일씨를 제외하면 모두 1980년 이후 태어난 젊은 세대들이다. 모내기를 끝낸 요즘은, 뜬 모를 다시 심고 피를 뽑아주는 작업을 한다. 논배미를 돌며 못물을 점검하는 것도 일이다. 요즘은 두더지 때문에 할일이 배로 늘었다고 한다. “논둑에 두더지 구멍이 뚫렸거든요. 두더지가 지나간 구멍으로 논에 댄 물이 싹 빠져요. 덕분에 잡초가 무성히 자라죠. 작년에는 두더지 피해가 없었는데 이상하네요. 약 안치는 논이라는 게 벌써 소문이 났나? 두더지 못 오게 하는 방법이 있긴 해요. 발을 쿵쿵 굴리며 다니거나, 비릿한 냄새가 나는 것을 땅에 묻거나… 근데 효과가 좋진 않아요. 구멍이 뚫릴 때마다 막는 수밖에 없어요.”(곽빛나)

곽빛나 다랑협동조합 대표.

곽빛나 다랑협동조합 대표.

■하루 4시간만 농부

5년차 농부인 곽빛나씨는 하루에 농사일은 4시간만 한다.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데, 날이 더운 요즘은 오전 6시쯤 다랑논으로 출근해서 오전 10시까지 일한다. “농사를 하루 4시간만 하자고 정한 건, 저 자신을 혹사시키지 말자는 다짐이기도 하고요, 농사가 질리는 일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것이기도 해요. ‘하루에 4시간만 하는 건데, 이걸 못해?’라며 저를 좀 다그치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요.”

반나절 농사를 마치면 자신이 운영하는 1인 디자인 사무실로 출근한다. 밀양에 사는 농부들과 소상공인들의 명함이나 유튜브 영상의 섬네일, 농가에서 만든 가공식품의 상표, 팸플릿 등을 디자인한다. 다랑협동조합의 로고와 상품도 그의 디자인이다. 사실 농사보다 디자인으로 버는 수입이 더 많다. 농한기에는 가공공장에 가서 품을 팔기도 한다. 밀양송전탑반대 활동가로도 일한다. “저는 많이 소비하지 않아요. 도시 사람들이 쓰는 정도의 3분의 1도 안될 걸요? 적게 쓰면 적게 벌면 되거든요. 사실 (이것 저것 하느라) 너무 바빠서 돈 쓸 시간도 없을 정도예요.”

다랑협동조합 조합원 농부들이 입은 단체티. 녀름지기는 농부의 우리말이다.

다랑협동조합 조합원 농부들이 입은 단체티. 녀름지기는 농부의 우리말이다.

수요일에는 밀양 청년들과 책읽기 모임을 한다. 모임을 하면서 친해진 부산대 조경학과 박사과정 이다영씨(29)와는 감물리 다랑논 실태조사를 함께하고 있다. 이씨는 감물리 연못(소류지)과 물이 흐르는 논, 묵은 다랑논들을 찾아다닌다. “저는 궁금한 걸 조사하고 알고 싶어서 대학원에 갔어요. 그런데 한동안 대학원에서 프로젝트를 맡아 하다보니까 저도 모르게 연구를 ‘업무’로서만 대하게 되더라고요. ‘내가 하려던 연구가 이런 거였나’ 몸에 무리도 왔고 힘들어서 쉬기로 했어요. 그때 빛나가 감물리 다랑이를 복원하고 싶은데 함께 조사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어요. 마침 제가 관심 있던 주제가 ‘농업유산’이었거든요. 정말 재밌을 것 같았어요.” 연구비는 농업 관련 민간 연구단체에서 지원받는다.

서울에서 동물권 시민단체 활동가로 일했던 박기완(33), 유다님(25) 커플은 올해 초 감물리로 귀농해 다랑협동조합 조합원으로 합류했다. 박기완씨는 토종종자 보급 사업을 벌이는 시민단체의 활동가로도 일한다. 토종종자를 수집하러 농가를 방문하기도 하고, 종자 수집 과정 중 있었던 일들을 글로 남기는 일을 하며 돈을 번다. 유다님씨는 ‘비거니즘(채식주의)’ 책을 만드는 1인 출판사를 운영한다.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인 텀블벅에서 후원금을 모아 책을 내는데, 얼마 전에는 자신이 기획하고 대학 친구가 쓴 채식 서적이 출간한 지 얼마 안 돼서 2쇄를 찍었다. 그의 꿈은 영화감독이다. 2019년 공장식 축산업과 동물권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연출했는데 지난해 부산, 제주에서 열린 소규모 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다음 영화는 ‘농부 이야기’가 될 것 같다고 했다. 이들은 “먹고사는 데에 크게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동물권 시민단체 활동가로 일했던 박기완, 유다님 커플은 올해 초 감물리로 귀농해 다랑협동조합 조합원으로 합류했다.

서울에서 동물권 시민단체 활동가로 일했던 박기완, 유다님 커플은 올해 초 감물리로 귀농해 다랑협동조합 조합원으로 합류했다.

■반농반X로 사는 법

다랑협동조합의 조합원들은 농사와 다른 일을 겸하는 ‘반농반X(반은 농부, 반은 다른 일)’이다. 곽빛나씨와 박기완·유다님 커플이 농사보다 다른 일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면, 김진한씨는 농사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서울에서 출판 편집자 일을 해서 지금도 가끔씩 편집 일이 들어와요. 하지만 저는 농사를 더 안정적으로 가져가고 싶고, 농사만 지어서 먹고살고 싶거든요. 그래서 ‘반농반X’에서 ‘X’를 줄여나가고 있어요. 다른 조합원들이 ‘X’ 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협동조합의 오후 농사는 제가 좀 많이 맡아서 해요. 지금은 농사만으로는 수익이 크지 않아요. 그래서 직장 다니는 제 ‘옆지기(아내)’에게 가장을 맡아달라고 했죠.”

조합원 조은숙씨(40)도 농사의 비중이 더 크다. 다랑협동조합 일을 하면서, 감물리에 300평 밭을 따로 빌려 콩과 들깨 농사도 한다. “고구마를 심었다가 멧돼지 피해를 봤거든요. 멧돼지가 들깨는 건드리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밀양 시내에 사는 그는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가 있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감물리로 건너와 농사를 짓는다. 남편도 한때 방울토마토 농사를 지었다. “공판장에서 (그 시절) 새벽 4시에 전화가 와요. 반갑지 않은 전화죠. 경매 가격이 좋으면 전화가 오지 않거든요. 얼마에 경매가 됐는데 (토마토를 이 가격에) 팔거냐, 안팔거냐…” 조씨의 남편은 결국 농사를 접고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농사에 집중하는 조합원들은 모두 배우자들이 버는 수입으로 가계를 꾸리고 있다.

다랑협동조합 유튜브 ‘다랑논 공유 프로젝트’ 영상

다랑협동조합 조합원 농부들. 왼쪽 뒷줄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진한, 곽빛나, 조은숙, 유영일, 박기완, 이다영, 유다님 조합원.

다랑협동조합 조합원 농부들. 왼쪽 뒷줄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진한, 곽빛나, 조은숙, 유영일, 박기완, 이다영, 유다님 조합원.

박기완·유다님 커플은 최근 감물리에 집을 구했다. 방 2칸, 화장실 1칸, 주방, 작업실, 창고까지 있는데 월 임차료 10만원이다. 박기완씨는 “집에 구석구석 활용할 만한 공간들이 많아 좋았다”고 했다. 문제가 있다면 뒷마당 대나무숲에서 가끔씩 지네가 나온다는 것이다. ‘지네를 어찌할 것인가’ 고민하던 커플에게 주민들이 “지네의 천적은 닭”이라며 닭을 세 마리 선물했다. 채식을 하는 두 사람에게 닭은 더 큰 고민거리였다. 지네를 잡기 위해 닭을 키우자니 암탉이 낳을 달걀들을 처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비건을 지향하지만 가끔씩 달걀은 먹는 박기완씨가 달걀을 소비하기로 하고 마당에 닭장을 지었다.

무엇이 이들을 밀양의 작은 마을에 모이도록 했을까. 유다님씨가 말했다. “생태적인 삶을 살고 싶었어요.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반하는 일은 하기 싫었고요. 도시 생활은 행동 하나하나가 자연에 부담이 되거나 해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불편해졌어요. 귀농을 결심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죠.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가치가 있어도 재미없으면 할 수 없잖아요.”


글 이재덕 기자 · 사진 채용민 피디 duk@kyunghyang.com



[서울 말고 로컬①] 하루 반나절, 농사 짓지 않을래요? 밀양 다랑이에서[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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